정치

YS, 위기를 기회로 삼은 '타고난 승부사'

2015.11.23 오전 09:03
■ 이진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객원교수 / 추은호, YTN 해설위원 / 이동형, 작가 ('김대중 vs 김영삼' 등) /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앵커]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별이 졌습니다. 물론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 그리고 공과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릴 수 있겠습니다마는 민주화의 큰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슈오늘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생을 몇 가지 키워드로 다시 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네 분 패널 모셨습니다. 그러면 김영삼 전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어떤 게 있을까요?

첫 번째 키워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도무문이라는 말입니다. 역사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대도무문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왔습니다. 이 교수님. 대도무문.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도무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사였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민주화투쟁의 리더고 대표적인 리더죠. 그래서 자신은 항상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정의로운 길을 가는 데 앞에 거칠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고 나를 가로막을 것도 없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아마 그런 뜻으로 계속 대도무문을 즐겨쓰신 것 같은데 1986년 신군부에 의해서 정치활동이 금지됐을 때부터 붓글씨를. 이것은 대도무문으로 많이 썼고 그래서 그 이후에도 대통령 되시고 난 후에도 선물로도 대도무문을 많이 선물하고 그래서 이래서 국민들 모두가 대도무문을 큰 글씨로 쓰는 기억이 날 겁니다.

[앵커]
이 이야기부터 짚어볼까요.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도무문이라는 말을 써주었는데 직접 쓰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서예 잘 모릅니다마는 김 대통령의, 추 기자님. 평소의 서예실력. 옆에서 많이 지켜보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습니까?

[기자]
서예 잘 쓰시죠. 한글로도 쓰시고요. 한글로 제일 먼저 쓴 게 역사 바로세우기. 이것도 한글로 쓴 게 기억이 나는데 대도무문이라는 저 글은 70년대 말 고 장준하 선생의 추모서예전이 열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도무문이라는 휘호를 게시를 했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경천애인란 휘호를 게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분이 비교가 된다는 말씀을 많이들 했고 그리고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던 게 95년에김종필 당시 민자, 민정, 공화가 합쳐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민자당 최고위원이었죠. 결별을 하면서 그때 김종필 최고위원은 자민련을 창당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해서 신한국당을 창당하는데 그때 새해 휘호가 대도무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결별을 암시하는 거다. 이런 해석들이 많았습니다.

[인터뷰]
조금 과거의 대통령과는 달랐는데요. 과거 대통령들은 군사정권 아니었습니까? 국민여론을 수렴하는 데 있어서 좀 어떻게 보면 공을 들이지 못했는데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국민여론을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천신만고 끝에 91년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이기고 한국을 처음 방문합니다. 외국 방문지로서는. 바로 대도무문. 거칠 것이 없이 큰 길을 나가라 그런 뜻이거든요.

금융실명제와 관련해서 사실 상당한 보안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국민여론을 반영해서 이 정책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8월 12일 바로 취임한 그해 8월 12일 전격 단행하고 끝난 그다음날 갤럽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서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여론조사를 반영하고 이 정책을 시행한 건 아닙니다마는 전격시행하고 난 다음에 여론조사는 국민10명 중 9명이 87. 1%가 잘한 일이다, 정말로 잘한일이다라는 응답을 했고 잘못한 일이라는 응답은 불과3. 3%에 불과했거든요.

이 대도무문. 짧게 더 설명드리면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93년도에 많은 반대 속에서도 의료개혁 정책을 단행하고 시행을 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94년에 멕시코와의 나프타 협정. 북미 자유협정, 이걸 맺을 때도 국민들의 반대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나가고 나중에는 협정에 대해서 클린턴 대통령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게됩니다. 어떻게 보면 첫 방문지였던 한국에서 대도무문을 아로새기지 않았었나 봅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앵커]
이 작가님, 대도무문적인 여러 가지 일들이 또 많이 있었습니다만.

[인터뷰]
클린턴한테 써주면서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글자의 획을 보면 거침없이 쓰는, 그러니까 대도무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생을 관통하는 글자라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저분이 굉장히 큰 승부사적 기질이 있지 않습니까? 싸움을 할 줄 알고 싸우면 꼭 이겨야 된다는 생각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 에피소드를 몇 개 설명드리면 어렸을 때부터 싸움 기질이 강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거제앞바다에서 친구들이랑 항상 잠수시합을 했습니다.

누가 더 오래 바닷속에서 버티느냐. 그런데 YS대통령은 너무 친구들이랑 잠수시합을 열심히 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서 어른들이 말렸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겨야 된다는 승부사기질이 심했고 또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필리핀의 라모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데 라모스 대통령하고 아침은 조깅 점심은 수영 이런 친선적으로 한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깅에서는 YS가 이겼죠. 그런데 죄송합니다. 수영이 아니라 농구입니다. 농구시합을 졌습니다. 지고 나서 예정에도 없이 라모스대통령에게 수영시합을 한번 더 하자고 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지는 것을싫어합니다.

한 가지만 더드리면 90년대 3당합당 이후에 그런데 당시 YS가 최고위원이었습니다마는 민정개혁을 흔들기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당론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내려갔거든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두손을 들게 만드는 그렇게 승부사적 기질이 강한데 바로 대도무문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었죠.

[앵커]
그렇죠. 그런 게 있었기에 하나회, 또 금융실명제 등 굵직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키워드 살펴보겠습니다.

YS 키즈. 이 부분은 추 위원님께서 옆에서 많이 지켜보셨기 때문에 과거에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하셨습니다, YS 정부시절에. 그리고 그 이후에 정치부 출입을 하셨을 때도 왜 기자들이 YS나 DJ, 직접 가서 아침을 먹고 누구보다 잘 알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을 설명해 주시죠.

[기자]
동교동계, 상도동계 비교를 해 보면 차이가 나는 게 있습니다. 상도동계 하면 좀 시끌벅적하고. 경상도가 주축이고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성격이 화끈한 성격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시끌벅적하고 격의없이 대하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람들을 부를 때도 형우야, 동영아. 이런 식으로 대하고요. 반면에 동교동계는 좀 조용하고 공부하는 스타일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항상 소수파었고. 그러다 보니까 천착하고 몰입하고 연구하고. 뭐든지 보고서를 올리고 그래서 이름도 누구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한 비서, 한 위원, 권 수석, 이런 식으로 호칭 자체가 달랐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두 측의 분위기가 굉장히 달랐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앵커]
YS키즈인데요. 대표적인 YS 키즈 하면 YS가 만들어내고 YS가 완성을 시키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정치인이 있다면 누구누구 있을까요?

[인터뷰]
만약에 그렇게 따지자면 YS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적으로 성공을 이뤘다면 대통령만 해도 둘 이나 배출하지 않았습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불러다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시키고 노무현 전 대통령 1988년에 그때는 한석봉 씨라고 있었었요.

미스코리아 한성주 아버지. 그때 한석봉 씨가 지구당 위원장을 하고 있는데 그 자리를 위원장은 당신이 하고 다만 이번에 출마는 노무현 변호사로 하자. 이래서 노무현 변호사를, 물론 김광일 변호사가 소개를 했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국회로 들어왔는데 3당통합 때 서로 결별해서 그때 나누어졌습니다마는 그 전까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결국 YS가 키운 사람이죠. 그렇게 봐야 되고요.

지금은 김무성 대표. 또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도 있고 김문수. 하여튼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정치지도자는 YS 그늘에서 다 수업을 하고 거기에서 배우고 해서 성장을 했다고 이렇게 봐도 될 것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수양산 역할을 톡톡히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산이라고 하는데, 큰 산 이런 데 사시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붓글씨를 쓰고 산에 다니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시절에 바로. 붓글씨를 반드시 쓰면 밑에 호가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 해서 급히 만든 게 거제도 거자에다 부산 산자를 해서 거산이라는.

[앵커]
YS는 사람 관리를 어떻게 했을까요. 옆에서 지켜보신 것도 있고요. 정치인들은 특히 계파정치의 보스는 지금의 계파와 당시의 계파는 다릅니다. 그때는 정말 1차집단적인 그런 끈끈한 게 있었않습니까? 어떻게 관리를 하셨습니까?

[인터뷰]
사람 관리에는 탁월했다고 평가를 하는 게 YS거든요. 평생을 DJ와 라이벌로 살았지만 사람관리는 DJ보다 훨씬 더 잘했던 것이 YS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하는 사람 없이 끝까지 가신들이 옆에 있었던 거고요.

또 우리가 YS가 극강의 카리스마를 내세운다고 하지만 가신들에게 그런 모습보다 따뜻한 모습을 보여줬고. 실질적으로 아침에 상도동으로 방문하는 가신들에게 커피를 직접 타주고 동교동은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마는 상도동은 상도동은 가신들과 맞담배도 했었거든요. 동교동은 상상할 수 없는.

[앵커]
같이 맞담배를 할 정도로 편안하게.

[인터뷰]
그리고 좌동영이라고 불렸던 김동영 씨가 YS한테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라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대통령 하면 소통령도 못합니다 이렇게 반발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다음 날 또 불러서 내가 어제 미안했다라고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사람관리에 탁월했고 또 자기가 자주가는 식당의 웨이터 결혼식 날짜도 기억하고 있다가 봉투를 주는. 정말 사람관리에서는 대한민국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YS는.

[인터뷰]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에는 여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정치적인 인재풀이 광범위했다고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좌동영 우형우라고 할 때. 좌동영, 김동영 보좌관 경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김태호 최고위원 이거든요. 인재가 막내가 연령대로 보게 되더라도 상당히 광범위했고 그런 점에서 위기국면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인재풀을 활용했던 것이거든요.

95년 지방선거, 96년 총선 때도 정치적 위기 국면을 돌파할 때 인재풀이 인용되고 또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이후에 등 개각폭도 상당히 넓었습니다. 역대 다른 이후에 대통령과 비교해서 정치적 인재풀에 대한 활용이 광범위했다, 그렇기 때문에 YS 키즈라고 하는 것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
이동형 작가가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생각나는 게1991년에 김동영 씨 암이 걸려서 사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캠프에서 말리지 않습니까? 거기서도 사나이가 가는 길이 이렇다고. 끝까지 YS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가겠다라고 하면서 당시에 YS를 따르는 분들은 사실 그런 게 있었죠.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모신 분이 김기수 수행실장일 겁니다. 그분이 한번은 대단히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 실수를 했는데 김영샴대통령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나가 죽어라라면서 이런 식으로 툭 던지는 말을 했었고. 김 실장은 그것때문에 밤새 고민고민하고 하지만 그 다음 날 모든 것을 다 잊고 다시 그대로 모시고. 이런 일화도 있고요. 또 96년으로 기억합니다마는 박찬종 전 의원 하면 무소속으로 독불장군처럼 가신 분이죠.

[앵커]
서울시장, 대선출마 등...

[기자]
총선 앞두고 수도권대책위원장 이런 직급을 맡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불러서 같이 점심을 하면서 이렇게 밥그릇에다가 김치 얹어주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포용할줄아는 그런 모습.

[앵커]
밥을 한술 뜨면 김치까지 얹어주면서. 이거 좀 드셔보셔 그렇게 하면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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