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국조 특위 공청회 ①
[우상호]
유가족과 생존자분들을 모시고 의견을 들을 수 있게 의사일정을 합의해 주신 여야 간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어려운 용기를 내어 자리에 나와주신 유가족, 생존자분들과 지역 상인 여러분께도 진심을 다해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사회에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오늘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의사일정 제1항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제2차 공청회를 상정합니다. 오늘 공청회 진술인으로는 유가족 8분, 생존자 두 분, 지역상인 한 분 등 총 11분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진술인의 신분은 사전에 확인하였으므로 별도의 호명 절차는 거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진술인 중 유가족 1명과 생존자 1명은 신분 비공개를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여야 간사 간 합의가 있었기에 별도의 가림막을 설치하여 배석해 있습니다.
이에 위원님들께서는 질의 시 유가족 진술인, 또는 생존 진술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주시기 바라며 회의 운영을 지원하는 국회 공무원 여러분들과 국정조사 현장 내외부를 취재하는 언론인분들께서도 이 두 분에 대한 신변이 보호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참고로 오늘 회의에는 지난 공청회와 마찬가지로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서울특별시 등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기관의 부서장이 배석해 있습니다. 정부 측 배석자의 성명과 직위는 배부해 드린 자료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회의는 국회방송을 비롯하여 KBS, MBC, SBS, YTN, MBN 등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에서 생중계되며 발언하시는 진술인과 위원님들께서는 마스크 미착용이 가능함을 아울러 안내해 드립니다. 회의 순서는 먼저 진술인 11분의 진술을 차례로 들은 후 위원님들 간의 질의응답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위원님들은 질의응답 방식을 선택하셔도 좋고 자신의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의견을 차분히 진술하셔도 좋습니다. 진술 시간은 7분이오니 진술인들께서는 시간을 확인하시면서 발언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럼 먼저 김초롱 진술인 진술해 주십시오.
[김초롱]
바로 하면 되나요?
[우상호]
바로 하시면 됩니다.
[김초롱]
저는 이태원 참사 당시 사고 현장에서 이태원 상인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 살아남은 김초롱입니다. 나는 왜 살았는가? 살았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매년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참사 당일 이태원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전보다 특별히 많지 않았습니다. 핼로윈에 이태원은 늘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저녁 9시 30분 세계문화음식거리에 도착했고 사고 현장 근처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이태원에 왔으면 한 번쯤은 가보자 하는 유명한 식당과 술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10시, 사고 현장 근처 와이키키 술집 앞에 도착했고 압박이 점점 심해져 발이 동동 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조금 버티고 기다리다 보면 풀리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친구를 잃어버렸고 주변에 키 큰 성인 남성들로만 둘러싸여서 시야 확보도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상황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와이키키 술집에서 1층 문을 열어주셔서 그 공간으로 들어가 대피한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뒤로 뒤로 하는 외침이 있었고 한 번 큰 흐름이 바뀌면서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옆 가게에서 잃어버렸던 친구가 대피하고 있기에 함께 그 술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사고가 발생했지만 보지 못했고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대피하던 술집에서 그냥 기다리지 말고 놀아보자 하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시각이 오후 10시 40분부터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때 혼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경찰관이 앞에 사람이 깔려 죽었어요. 제발 통제에 협조해 주세요 외치는 것을 보았고 이내 곧 1초에 4~5명씩 들것으로 실려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꼈지만 실려가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있던 술집의 상인들과 아르바이트생 모두 가게를 내팽겨치고 경찰을 도와 거리를 통제하고 새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막았습니다.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화가 나 상인분들의 얼굴을 가격하는 외국인도 있었지만 그렇게 맞으면서도 통제를 열심히 도운 상인들이었습니다.
참사 당시 왜 음악을 끄지 않았나라는 댓글에 대답합니다. 가게를 버려두고 모두 거리에 나가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끌 사람이 없었고 12시가 넘어서야 잠깐 들어오셔서 음악을 껐습니다. 밤 12시 30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태원역 큰 거리로 나왔을 때 거리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순간이 이어졌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 사람들이 거리에 다 누워 있는 장면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뉴스속보가 들 때마다 사망자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현장에 있었던 것인지 피부로 느꼈고 죄책감과 후회로 서서히 제 일상은 모든 것이 망가졌습니다.
저는 300명 사상자 안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무원이나 행안부 등에는 별도로 연락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살고 싶었기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심리지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전화상담을 시작한 국가트라우마센터와 민간단체인 심리학회 전화상담을 처음으로 시작했지만 국가트라우마센터보다 심리학회의 전화상담으로 많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말하는 제게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딜 가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인 것이 맞다.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다라는 가슴 울리는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상담은 전문가들의 상담이라고 느낄 수 없었지만 거주하고 있는 구청의 정신상담 프로그램을 연계해 주었고 구와 연결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게 됐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느낀 바로는 우리나라의 복지 시스템이 잘되어 있었다고 느꼈지만 참사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에 이런 사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센터 내의 전문가 배치가 아쉬웠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원했던 저에게는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더 큰 슬픔을 겪는 유족분들이나 중증치료를 받고 있는 생존자들에게는 전혀 알 수 없고 도움받을 수 없는 체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입니다. 심리상담도 자발적으로 잘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성 댓글이나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2차 가해는 장관, 총리, 국회의원들의 말이었습니다. 참사 후 행안부 장관의 첫 브리핑을 보며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전에 비해 특별히 우려할 정도의 인파는 아니었고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저는 이 말을 놀러 갔다가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몇 주 전 고등학생 생존자가 스스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을 때 저는 스스로 잡고 있던 끈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했을 그 마음을 너무 알 것 같기에 슬펐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선생님을 찾았고 약의 용량을 늘렸습니다. 그때 국무총리가 했던 발언이 생각납니다. 스스로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습니다. 치료와 상담을 이렇게 열심히 받는 저는 매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합니다. 참사와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극복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만큼 큰 치유는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 찾아서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극복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치료와 상담으로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결국 바뀌지 않는 사회와 매번 쏟아지는 망언들이 제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듭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고 아직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함과 비열함에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저는 올해도 이태원에 갈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원과 핼로윈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이태원과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핼러윈이 왜 아직도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은 가는 것이 아니야라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사람들은 혐오 문화를 생성해내는지를 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그렇게 후지지 않았습니다. 재난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참사 현장에서 본 모두는 삼류가 아닌 일류였습니다. 삼류는 그 위에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지휘를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참사의 원인은 유흥과 밤 문화, 외국 귀신 파티 문화가 아닙니다. 참사의 유일한 원인은 군중 밀집 관리의 실패입니다.
[우상호]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익명을 요청한 생존 진술인 진술해 주십시오.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올해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자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로 인해 저는 저의 예비신부를 잃었습니다. 10월 29일도 결혼 준비를 위해 웨딩 플래너와 상담이 있었고 이를 마치고 귀가 전 이태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이태원 도착 시간은 10시 2분이었고 도착 후 15분 만에 참사를 당했습니다.
세계음식거리를 걷던 중 해밀톤 호텔 앞 T자 골목에서 인파가 갑자기 몰렸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태원역으로 내려가던 중 파도처럼 인파에 휩쓸렸습니다. 세계음식거리에는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만 그곳에 경찰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태원역으로 골목을 내려가던 중 108힙합클럽 앞에서 인파에 막혀 벽을 느꼈습니다. 앞에서는 내려가지 못하고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인파에 휩싸여 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 순간 제 여자친구를 놓쳤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여자친구를 찾으니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으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싶었지만 인파로 인해 도저히 공간이 나오지 않았고 인공호흡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발목이 뒤로 꺾인 상태였는데 이를 원위치시키는 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압박이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압박이 지속된 상태에서 15분 후 소방대원이 네 분 먼저 도착하였고 그로부터 15분 후 후발대원이 도착하였으며 뒤쪽인 T자 골목에서 구조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뒤쪽 사람들도 모두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자발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조 인원도 부족하여 사람들을 눕히는 공간도 협소하여 구조활동은 매우 더디었습니다. 초기 대원은 어떤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며 왜 소수 인원만 출동하였는지 의문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압박은 50분 이상 지속되다 구조되었습니다. 클럽 안 부상자는 너무 많았고 소방대원은 8명도 채 안 되어 보였습니다. 여자친구에게 CPR을 수행하던 소방대원은 다른 부상자를 보러 가야 한다고 저에게 직접 CPR을 수행하라 지시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소방대원 한 분께서 안 되면 지연 처리해, 지연이야, 지연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연이라는 말은 너무 늦어서 회복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지연이라는 말이 저에게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CPR을 수행하다 인공호흡을 크게 하니 구토를 하였습니다. 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소방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자동제세동기로 하였습니다. 힘들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특별한 응급구조 방법에 대해 설명조차 해 주지 않고 가셨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분들이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수행하였습니다. 클럽 안에는 소방대원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저와 시민분들은 응급조치 전문가가 아닙니다. 부상자 한 분 한 분마다 전문인력이 전담하였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클럽 안에서 계속해서 CPR을 수행하던 중 시민 한 분이 오셔서 큰 대로변으로 나가면 경찰과 소방대원이 많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를 들쳐업고 큰 대로변으로 나갔고 응급차는 많이 있었지만 환자의 응급 이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도로가 통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방대원에게 의사에게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병원으로 이동시켜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소방대원은 병원으로 못 가고 빈 상가 안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여자친구를 상가 안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상가 안에서도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였지만 경찰과 소방대원은 상가 밖으로 계속 나가야 한다며 내쫓았습니다.
여자친구 부모님이 도착하셨는데 경찰의 통제에 의해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었으며 그저 창문을 통해 여자친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나갈 수 없다며 여자친구 곁을 두 시간가량 지켰고 버티다 결국 경찰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왜 희생자 옆을 지킬 수 없었으며 그 상가에서 나가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두 시간가량 희생자들을 상가 안에서 안치시켰고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습니다.
소방과 경찰에게 이제 어떻게 되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으로 이동해서도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게 경찰과 소방은 계속 통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남동 주민센터에 실종자 신고를 하면 보다 빨리 찾을 수 있다고 하여 주민센터에 가 실종자 신고를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실종자 신고를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친구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저와 가족들이 직접 신원을 확인해 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안 된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신원을 확인하기까지 대기해 달라는 경찰의 지시에 집으로 돌아갔으며 여자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여자친구 오빠께서 직접 수소문하여 알아냈습니다. 경찰이나 구청 및 시청 직원이 저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연고지로 이동하는데 검사의 검시필증이 필요하며 경찰서에 직접 가서 신고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신고하러 경찰서로 갔는데 갑자기 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여자친구 오빠와 제가 진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질문에 답변하면 경찰이 타이핑하는 진술서였습니다. 이 또한 돌이켜보니 진술서를 왜 작성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여자친구 오빠께 희생자의 사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부검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하여 너무 놀랐습니다.
여기까지가 사고가 일어난 경위에 대해 말씀드렸으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59번째 희생자의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깝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지금도 그런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약혼자 가족분들 덕분입니다. 희생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하여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감이 없었더라면 저 역시 159번째의 희생자와 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정부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런 모임을 모임을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 또한 2차 가해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발 저희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우상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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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과 생존자분들을 모시고 의견을 들을 수 있게 의사일정을 합의해 주신 여야 간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어려운 용기를 내어 자리에 나와주신 유가족, 생존자분들과 지역 상인 여러분께도 진심을 다해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사회에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오늘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의사일정 제1항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제2차 공청회를 상정합니다. 오늘 공청회 진술인으로는 유가족 8분, 생존자 두 분, 지역상인 한 분 등 총 11분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진술인의 신분은 사전에 확인하였으므로 별도의 호명 절차는 거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진술인 중 유가족 1명과 생존자 1명은 신분 비공개를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여야 간사 간 합의가 있었기에 별도의 가림막을 설치하여 배석해 있습니다.
이에 위원님들께서는 질의 시 유가족 진술인, 또는 생존 진술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주시기 바라며 회의 운영을 지원하는 국회 공무원 여러분들과 국정조사 현장 내외부를 취재하는 언론인분들께서도 이 두 분에 대한 신변이 보호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참고로 오늘 회의에는 지난 공청회와 마찬가지로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서울특별시 등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기관의 부서장이 배석해 있습니다. 정부 측 배석자의 성명과 직위는 배부해 드린 자료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회의는 국회방송을 비롯하여 KBS, MBC, SBS, YTN, MBN 등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에서 생중계되며 발언하시는 진술인과 위원님들께서는 마스크 미착용이 가능함을 아울러 안내해 드립니다. 회의 순서는 먼저 진술인 11분의 진술을 차례로 들은 후 위원님들 간의 질의응답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위원님들은 질의응답 방식을 선택하셔도 좋고 자신의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의견을 차분히 진술하셔도 좋습니다. 진술 시간은 7분이오니 진술인들께서는 시간을 확인하시면서 발언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럼 먼저 김초롱 진술인 진술해 주십시오.
[김초롱]
바로 하면 되나요?
[우상호]
바로 하시면 됩니다.
[김초롱]
저는 이태원 참사 당시 사고 현장에서 이태원 상인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 살아남은 김초롱입니다. 나는 왜 살았는가? 살았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매년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참사 당일 이태원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전보다 특별히 많지 않았습니다. 핼로윈에 이태원은 늘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저녁 9시 30분 세계문화음식거리에 도착했고 사고 현장 근처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이태원에 왔으면 한 번쯤은 가보자 하는 유명한 식당과 술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10시, 사고 현장 근처 와이키키 술집 앞에 도착했고 압박이 점점 심해져 발이 동동 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조금 버티고 기다리다 보면 풀리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친구를 잃어버렸고 주변에 키 큰 성인 남성들로만 둘러싸여서 시야 확보도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상황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와이키키 술집에서 1층 문을 열어주셔서 그 공간으로 들어가 대피한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뒤로 뒤로 하는 외침이 있었고 한 번 큰 흐름이 바뀌면서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옆 가게에서 잃어버렸던 친구가 대피하고 있기에 함께 그 술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사고가 발생했지만 보지 못했고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대피하던 술집에서 그냥 기다리지 말고 놀아보자 하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시각이 오후 10시 40분부터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때 혼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경찰관이 앞에 사람이 깔려 죽었어요. 제발 통제에 협조해 주세요 외치는 것을 보았고 이내 곧 1초에 4~5명씩 들것으로 실려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꼈지만 실려가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있던 술집의 상인들과 아르바이트생 모두 가게를 내팽겨치고 경찰을 도와 거리를 통제하고 새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막았습니다.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화가 나 상인분들의 얼굴을 가격하는 외국인도 있었지만 그렇게 맞으면서도 통제를 열심히 도운 상인들이었습니다.
참사 당시 왜 음악을 끄지 않았나라는 댓글에 대답합니다. 가게를 버려두고 모두 거리에 나가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끌 사람이 없었고 12시가 넘어서야 잠깐 들어오셔서 음악을 껐습니다. 밤 12시 30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태원역 큰 거리로 나왔을 때 거리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순간이 이어졌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 사람들이 거리에 다 누워 있는 장면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뉴스속보가 들 때마다 사망자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현장에 있었던 것인지 피부로 느꼈고 죄책감과 후회로 서서히 제 일상은 모든 것이 망가졌습니다.
저는 300명 사상자 안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무원이나 행안부 등에는 별도로 연락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살고 싶었기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심리지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전화상담을 시작한 국가트라우마센터와 민간단체인 심리학회 전화상담을 처음으로 시작했지만 국가트라우마센터보다 심리학회의 전화상담으로 많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말하는 제게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딜 가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인 것이 맞다.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다라는 가슴 울리는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상담은 전문가들의 상담이라고 느낄 수 없었지만 거주하고 있는 구청의 정신상담 프로그램을 연계해 주었고 구와 연결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게 됐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느낀 바로는 우리나라의 복지 시스템이 잘되어 있었다고 느꼈지만 참사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에 이런 사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센터 내의 전문가 배치가 아쉬웠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원했던 저에게는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더 큰 슬픔을 겪는 유족분들이나 중증치료를 받고 있는 생존자들에게는 전혀 알 수 없고 도움받을 수 없는 체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입니다. 심리상담도 자발적으로 잘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성 댓글이나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2차 가해는 장관, 총리, 국회의원들의 말이었습니다. 참사 후 행안부 장관의 첫 브리핑을 보며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전에 비해 특별히 우려할 정도의 인파는 아니었고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저는 이 말을 놀러 갔다가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몇 주 전 고등학생 생존자가 스스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을 때 저는 스스로 잡고 있던 끈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했을 그 마음을 너무 알 것 같기에 슬펐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선생님을 찾았고 약의 용량을 늘렸습니다. 그때 국무총리가 했던 발언이 생각납니다. 스스로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습니다. 치료와 상담을 이렇게 열심히 받는 저는 매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합니다. 참사와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극복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만큼 큰 치유는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 찾아서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극복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치료와 상담으로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결국 바뀌지 않는 사회와 매번 쏟아지는 망언들이 제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듭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고 아직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함과 비열함에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저는 올해도 이태원에 갈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원과 핼로윈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이태원과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핼러윈이 왜 아직도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은 가는 것이 아니야라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사람들은 혐오 문화를 생성해내는지를 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그렇게 후지지 않았습니다. 재난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참사 현장에서 본 모두는 삼류가 아닌 일류였습니다. 삼류는 그 위에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지휘를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참사의 원인은 유흥과 밤 문화, 외국 귀신 파티 문화가 아닙니다. 참사의 유일한 원인은 군중 밀집 관리의 실패입니다.
[우상호]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익명을 요청한 생존 진술인 진술해 주십시오.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올해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자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로 인해 저는 저의 예비신부를 잃었습니다. 10월 29일도 결혼 준비를 위해 웨딩 플래너와 상담이 있었고 이를 마치고 귀가 전 이태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이태원 도착 시간은 10시 2분이었고 도착 후 15분 만에 참사를 당했습니다.
세계음식거리를 걷던 중 해밀톤 호텔 앞 T자 골목에서 인파가 갑자기 몰렸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태원역으로 내려가던 중 파도처럼 인파에 휩쓸렸습니다. 세계음식거리에는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만 그곳에 경찰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태원역으로 골목을 내려가던 중 108힙합클럽 앞에서 인파에 막혀 벽을 느꼈습니다. 앞에서는 내려가지 못하고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인파에 휩싸여 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 순간 제 여자친구를 놓쳤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여자친구를 찾으니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으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싶었지만 인파로 인해 도저히 공간이 나오지 않았고 인공호흡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발목이 뒤로 꺾인 상태였는데 이를 원위치시키는 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압박이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압박이 지속된 상태에서 15분 후 소방대원이 네 분 먼저 도착하였고 그로부터 15분 후 후발대원이 도착하였으며 뒤쪽인 T자 골목에서 구조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뒤쪽 사람들도 모두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자발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조 인원도 부족하여 사람들을 눕히는 공간도 협소하여 구조활동은 매우 더디었습니다. 초기 대원은 어떤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며 왜 소수 인원만 출동하였는지 의문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압박은 50분 이상 지속되다 구조되었습니다. 클럽 안 부상자는 너무 많았고 소방대원은 8명도 채 안 되어 보였습니다. 여자친구에게 CPR을 수행하던 소방대원은 다른 부상자를 보러 가야 한다고 저에게 직접 CPR을 수행하라 지시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소방대원 한 분께서 안 되면 지연 처리해, 지연이야, 지연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연이라는 말은 너무 늦어서 회복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지연이라는 말이 저에게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CPR을 수행하다 인공호흡을 크게 하니 구토를 하였습니다. 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소방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자동제세동기로 하였습니다. 힘들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특별한 응급구조 방법에 대해 설명조차 해 주지 않고 가셨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분들이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수행하였습니다. 클럽 안에는 소방대원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저와 시민분들은 응급조치 전문가가 아닙니다. 부상자 한 분 한 분마다 전문인력이 전담하였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클럽 안에서 계속해서 CPR을 수행하던 중 시민 한 분이 오셔서 큰 대로변으로 나가면 경찰과 소방대원이 많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를 들쳐업고 큰 대로변으로 나갔고 응급차는 많이 있었지만 환자의 응급 이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도로가 통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방대원에게 의사에게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병원으로 이동시켜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소방대원은 병원으로 못 가고 빈 상가 안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여자친구를 상가 안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상가 안에서도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였지만 경찰과 소방대원은 상가 밖으로 계속 나가야 한다며 내쫓았습니다.
여자친구 부모님이 도착하셨는데 경찰의 통제에 의해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었으며 그저 창문을 통해 여자친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나갈 수 없다며 여자친구 곁을 두 시간가량 지켰고 버티다 결국 경찰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왜 희생자 옆을 지킬 수 없었으며 그 상가에서 나가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두 시간가량 희생자들을 상가 안에서 안치시켰고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습니다.
소방과 경찰에게 이제 어떻게 되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으로 이동해서도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게 경찰과 소방은 계속 통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남동 주민센터에 실종자 신고를 하면 보다 빨리 찾을 수 있다고 하여 주민센터에 가 실종자 신고를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실종자 신고를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친구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저와 가족들이 직접 신원을 확인해 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안 된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신원을 확인하기까지 대기해 달라는 경찰의 지시에 집으로 돌아갔으며 여자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여자친구 오빠께서 직접 수소문하여 알아냈습니다. 경찰이나 구청 및 시청 직원이 저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연고지로 이동하는데 검사의 검시필증이 필요하며 경찰서에 직접 가서 신고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신고하러 경찰서로 갔는데 갑자기 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여자친구 오빠와 제가 진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질문에 답변하면 경찰이 타이핑하는 진술서였습니다. 이 또한 돌이켜보니 진술서를 왜 작성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여자친구 오빠께 희생자의 사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부검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하여 너무 놀랐습니다.
여기까지가 사고가 일어난 경위에 대해 말씀드렸으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59번째 희생자의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깝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지금도 그런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약혼자 가족분들 덕분입니다. 희생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하여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감이 없었더라면 저 역시 159번째의 희생자와 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정부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런 모임을 모임을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 또한 2차 가해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발 저희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우상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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