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뉴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친나치' 추적 연구...그 후 12년

2019.01.22 오후 03:46
■ 진행 : 노종면 앵커
■ 출연 : 이경분 / 음악학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방금 보신 영상은 1955년 4월 18일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에서 안익태 선생이 해방된 조국에 귀국해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한 장면 등입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들으셨겠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공연으로 보입니다.

그가 숱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애국가 작곡가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왔는지를 짐작케 해 주는 영상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안익태 선생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는 연구가 있었고 최근에는 2차대전 시기 독일에서 음악생활을 하며 친나치 활동을 했다는 내용의 책이 출간돼 관심이 증폭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부각된 친나치 행적의 대부분은 이미 12년 전 한 학자에 의해 확인되고 책을 통해 공표됐던 내용들입니다. 2007년 안익태 선생의 친나치 행적을 세상에 알린 이경분 박사님 스튜디오로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7년에 발간하셨던 안익태 연구서, 제목이 뭐였죠?

[인터뷰]
잃어버린 시간 1938년에서 1944년입니다.

[앵커]
1938년부터 44년. 6년간의 안익태 선생의 행적을 추적한 연구서라고 볼 수 있죠. 이 시기 그러니까 독일에서 활동했던 그 시기에 안익태 선생의 대표작이 우리가 알고 있는 코리아 판타지가 아닙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곡명상으로는 가장 자주 연주된 곡은 에텐라쿠라는 일본 아악의 곡명입니다.

[앵커]
에텐라쿠요? 코리아 판타지가 그 시기에 독일이나 아니면 다른 유럽에서 연주됐다는 기록이 없나요?

[인터뷰]
연주된 기록은 있어요. 1938년에 아일랜드에서 그때는 안익태 선생이 아직 친일과 관련이 없었던 때인데 그때 하셨고 또 1940년에 두세 번 동유럽에서 했다는 기록이 최근에 또 연구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면 그 이후에 독일에 완전히 정착한 이후에는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하지 않았다?

[인터뷰]
그러니까 그 곡명으로는 하지 않았죠.

[앵커]
그런데 1940년 4월 24일자 조선일보 신문기사를 보면 교향악적 환상곡 조선을 로마에서 연주한다, 이런 예고 기사가 있더군요.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교향악적 환상곡 조선. 이게 코리아 판타지 맞죠?

[인터뷰]
그렇죠. 그런데 이건 이때의 레퍼토리는 확인이 안 되어 있고요. 이것이 3국 동맹 교류를 위한 그런 행사이기 때문에 교향환상곡 조선을 연주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앵커]
그러니까 1940년 4월 30일에 연주한다고 돼 있었고요. 장소가 로마고 말씀하신 3국은 그때 파시즘 국가인 독일, 이태리, 일본인 거죠.

[인터뷰]
그렇죠. 4월 29일이 일본 일왕의 생일인데 한국은 이미 4월 30일이고 유럽은 4월 29일이죠.

[앵커]
그러니까 일본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공연이었을 수 있겠군요.

[인터뷰]
그럴 수도 있죠.

[앵커]
거기서 조선을 연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터뷰]
아무래도 같은 곡이라도 타이틀은 다른 곡을 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앵커]
그러면 조선일보의 오보였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인터뷰]
당시에 신문들이 굉장히 오보가 많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 안익태 선생이 말씀하신 그 시기에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게 이승만 대통령한테 헌정한 악보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본인이 자필로 몇 년도에 어디서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는지 코리아 판타지 악보에다 적었다는 거죠.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습니다.

저기에 보면 각 연도별로 부쿠레슈티도 있고 빈, 바르셀로나, 베를린 필하모니, 취리히 등등 그러니까 베를린과 취리히 등에서도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를 했다, 이렇게 적어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일종의 선물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자료가 잘못된 겁니까?

[인터뷰]
안익태 연구를 하다 보면 연도하고 명칭하고 이게 굉장히 불명확합니다. 그래서 또 안익태 스스로 자필 문서들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까 여기 보면 1943년 8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연주한 것도 이때는 안익태 만주국축전곡하고 에텐라쿠가 연주되었지, 코리아판타지는 저기에 없습니다.

[앵커]
지금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것은 안익태 선생의 아주 대표적인 이력이잖아요. 그러면 저 당시에 팸플릿이라든가 베를린 연주하는 홍보 책자 이런 것이 있나요?

[인터뷰]
있습니다. 팸플릿이 있는데 거기에는 에텐라쿠하고 만주곡축전곡이 연주가 되었고 코리아 판타지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앵커]
안 들어 있어요, 아예? 지금 나오는 것이 그 당시에 레퍼토리를 정리해 놓은 과거 자료인 모양이죠? 그러니까 안익태 선생이 1942년부터 43년까지 연주했던 곡목들을 안익태 지휘자의 뭐라고 할까요? 기획사에서 만든 자료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거기에 판타지 에텐라쿠는 있어도 없네요, 코리아 판타지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럼 저 에텐라쿠는 어떤 노래입니까?

[인터뷰]
에텐라쿠는 원래 일본의 전통 아악에서 온 겁니다. 그러니까 2600년이나 지속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그런 음악이거든요. 에텐라쿠를 한자로 하면 월천악이 돼요.

[앵커]
하늘을 넘어서 왔다?

[인터뷰]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에텐라쿠라는 그 선녀를 안익태 선생은 차용해서 자신의 작품을 쓰고 일본 작곡가도 고노에라는 사람도 에텐라쿠를 작곡하였습니다.

[앵커]
고노에는 안익태 선생보다 앞선 분인가요, 시대적으로?

[인터뷰]
그렇죠. 조금 연세가 높은데 1898년에 출생하신 걸로 알고 있고 일본 총리의 고노에 후미마로의 막내 동생입니다.

[앵커]
그래요? 그리고 조금 전 앞에서 봤던 팸플릿에 보면 기획사에서 만든 안익태 선생의 연주곡들 거기 보면 일본 축전곡이라는 곡목이 나오고요. 거기 작곡자가 슈트라우스라고 돼 있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얘기하는 거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분은 안익태 선생의 스승 아닙니까?

[인터뷰]
스승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앵커]
그런데 그분이 일본 축전곡을 작곡을 했어요. 그러면 일본과 가까웠던 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인터뷰]
그건 황기 2600년이라고 해서 일본에서 세계적인 작곡가들에게 위촉을 했습니다. 거기에 그 곡이 일본 축전곡이라는 작품을 쓰셨는데 슈트라우스는 저 곡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쓰기 싫은 곡을 썼고 그리고 곡도 별로라고 생각을 하셨죠.

[앵커]
지금 슈트라우스가 독일 일본대사에게 그 곡을 만들어서 악보채로 전달하는 장면인 거죠?

[인터뷰]
네.

[앵커]
그리고 안익태 선생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고 제가 알고 있는 강천성악이라는 곡이 있어요. 강천성악, 이건 어떤 노래입니까?

[인터뷰]
이것도 한자로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곡인데 그것이 바로 에텐라쿠의 한국 이름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러니까 전쟁 시기까지 45년 이전에는 에텐라쿠만 나오고요. 45년이 되면 에텐라쿠는 사라지고 강천성악만 나옵니다.

그리고 선율도 일본의 에텐라쿠 선율, 주 선율이 똑같기 때문에 아마도 해방 이후에 에텐라쿠를 한국말로 번역해서 강천성악으로 하신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악보는 에텐라쿠 악보가 없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앵커]
그렇게 자주 연주한, 그러니까 1940년 이후 독일에서 여러 차례 연주가 됐고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기록이 돼 있는 에텐라쿠가 악보가 존재하지 않아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래요? 그런데 강천성악 악보는 존재한다는 거죠?

[인터뷰]
있습니다.

[앵커]
지금 박사님 생각은 강천성악이 에텐라쿠일 가능성이 있다?

[인터뷰]
네. 그건 우리 음악학계에서 대체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면 강천성악에 대해서 일본 아악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곡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그러니까 선율만 그렇고 다른 것은 서양음악적인 문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선율을 차용해 온 거죠.

[앵커]
그럼 문제가 없는데 굳이 이름을 바꿀 이유가 있었을까요?

[인터뷰]
에텐라쿠라는 그 이름이 일본적이기 때문에 조금 조심을 하신 거겠죠.

[앵커]
그러면 강천성악은 일본 아악을 딴 노래다, 곡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던가요?

[인터뷰]
해방 이후에는 안익태 선생께서는 세종대왕 시기에 음악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강천성악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앵커]
만약에 에텐라쿠가 강천성악이라면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그 근거 자체를 왜곡한 게 될 수 있겠네요?

[인터뷰]
그래서 에텐라쿠 악보가 있으면 비교를 해서 어느 정도 뭐가 달라졌는지 확신할 수 있는데 현재 상태로는 그냥 가설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앵커]
그런데 신빙성이 굉장히 큰 가설 같네요. 그러니까 에텐라쿠는 다시 설명을 드리면 일본의 전통음악 아악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었고 1942년, 43년 집중적으로 연주를 하셨고.

그런데 그 악보는 사라졌고 해방 이후에 강천성악이라는 곡을 대표곡으로 연주를 하셨는데 그 강천성악은 세종대왕 때 음악을 따온 것이다라고 안익태 선생이 직접 주장을 하시고. 그런데 에텐라쿠에서 차용하고 있는 일본 아악의 그 주 선율이 강천성악에 그대로 있다?

[인터뷰]
네.

[앵커]
그리고 앞서 본 레퍼토리에 보면 만주국 축전곡이라는 곡이 나옵니다. 이거는 안 선생이 직접 작곡한 거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건 이미 공개돼 있는 것이고요.

[인터뷰]
네, 공개돼 있습니다.

[앵커]
일본국을 우리는 괴뢰국으로 보고 있잖아요. 만주국을 위해서 노래를 만든 거네요.

[인터뷰]
그렇죠. 거기에 합창이 들어가는데요. 거기에 만주국 공사의 창사인 에하라 고이치라는 사람이 독일어로 가사를 만드는데 그 내용은 만주국과 일본이 서로 탯줄처럼 이어져 있고 또 삼국동맹 그래서 우리 모두가 삼국동맹으로 연대하고 있다, 연결돼 있다. 이런 삼국동맹을 위한 선전적인 그런 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일본, 이태리, 독일이 삼국동맹이고.

[인터뷰]
만주국은 일본과 심장이 서로 연결돼 있고 그러니.

[앵커]
그런 가사의 곡을 쓰셨다고요?

[인터뷰]
네.

[앵커]
안익태 선생이. 만주국축전곡을 작곡을 했다던가 아니면 공연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인터뷰]
남아 있습니다. 7분짜리 영상이 있어서 거기에 합창 일부가 들어 있고요. 분위기도 잘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성공한 연주회인 것 같아요.

[앵커]
만주국축전곡이라는 게 안 선생의 대표적인 공연이라고 하는 아까 말씀드렸던 43년에 베를린 필하모니...

[인터뷰]
그것이 아니고 이거는 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회로 지휘를 하셨고 43년은 따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를 하신 거예요.

[앵커]
거기서도 만주국 축전곡을 했나요?

[인터뷰]
또 했죠.

[앵커]
여러 차례 공연을 한 거네요.

[인터뷰]
빈에서도 했고요.

[앵커]
슈트라우스처럼 요청이 와서 억지로 곡을 만들어서 일본에 준 게 아니라 안익태 선생은 본인의 주된 활동의 일환으로 만주국축전곡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이렇게 볼 수 있네요?

[인터뷰]
그럴 수 있죠.

[앵커]
조금 전에 에하라라는 사람을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니까 독일에 주재하던 만주국의 공무원이었던 겁니까?

[인터뷰]
공사관의 참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앵커]
2인자였던 셈이네요.

[인터뷰]
그렇죠, 2인자고 일본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최근에 독일 한국학자 프랑코프만이라는 사람이 책을 썼는데 거기에 에하라가 재독 일본의 정보원 총책이라는 그런 비밀문서를 발견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앵커]
그러면 에하라와 안익태 선생과의 연결고리도 나옵니까?

[인터뷰]
그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데요. 아직 안익태 선생이 에하라의 정보원인지는 알 수 없는데 이해영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안익태가 에하라 집에 2년 동안 기거했기 때문에 이건 틀림없이 안익태가 무언가 정보 관련 있을 것이다라고 추정을 하시는데요.

확실히 두 사람의 기브 앤 테이크가 있긴 했던 것 같아요. 그건 맞는데. 저는 오히려 안익태가 에하라에게 제시할 큰 카드가 있었지 않았을까.

[앵커]
뭐가 있겠습니까?

[인터뷰]
그건 바로 만주국 10주년 건국 행사를 굉장히 도와주는 데 안익태가 적극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뭐냐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거기다가 관여를 시키는 건데 안액태 선생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관계가 있으니까 여기 에하라에게 소개를 해 주고 또 전체 곡도 안익태 선생이 만든 곡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께서 손봐주시고 지휘 모든 것에서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이게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 이것이 안익태 선생이 에하라에게 줄 수 있었고 에하라가 또 안익태 선생을 도울 수 있는.

[앵커]
연결고리였다.

[인터뷰]
그런데 안익태 선생을 첩보원이라고 보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데 첩보원이 둘이 같은 집에 사는 건 사실 좀 그렇거든요.

왜냐하면 첩보원일 경우에 서로가 몰라야 되고 다른 첩보원도 한 300명이 유럽에 있었는데 독일에서 박영인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걸 보면 정체가 서로 알게 되면 곤란할 것이고. 제 생각에는 오히려 이것은 또 친나치라고 보기도 힘들고.

만약에 안익태 선생이 만약에 에하라의 첩보원이었다면 독일사람들 정보를 얻어서 에하라에게 줬기 때문에 친나치가 아니라 이거는 친일인 거죠. 친일 확실한 거죠, 만약에 첩보원이었다면.

[앵커]
그러니까 그 부분은 모호한 부분이니까 더 연구가 있어야 되는 거고요. 문제는 에하라라는 재독 만주국 참사가 안익태 선생과 관계가 있었고 관계라는 건 구체적으로 팩트만 말씀을 드리자면 만주국 10주년의 기념하는 축전곡을 만드는 데 안익태 선생이 작곡을 했고요.

작사는 에하라가 했고 그리고 또 그 당시 거물 음악가였던 슈트라우스가 그 일을 도와주는 데 안익태 선생이 역할을 했다, 이 정도까지 확인이 되는 거죠. 안익태 선생이 독일의 제국음악협회 회원이었다고 해요. 그것도 확인된 사실입니까?

[인터뷰]
그것도 제가 발굴을 했는데 거기에 출생이 평양이 아니고 동경으로 돼 있습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것이 회원증입니다. 에키타이 안. 그러니까 안익태 선생 일본 이름이죠? 이름이 선명하고 또 동경 일본 출생으로 돼 있고요.

그리고 지금 붉은색 박스를 쳐놓은 것은 게슈타포의 비밀 경찰조직, 게슈타포의 관인이 찍힌 부분인데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보고가 없다, 이렇게 돼 있는 내용이네요.

[인터뷰]
정치적 하자가 없다, 이렇게 돼 있는데요. 우리가 여권 발부를 할 때 절차가 있고 관의 도장이 필요하듯이 이것도 제국음악협회 회원이 되려면 도장이 필요한데요.

제 생각에는 이 도장을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만약에 게슈타포가 이것을 제대로 안익태 뒷조사를 하고 정치적으로 신문을 했다면 게슈타포는 굉장히 허술한 정보기관이죠. 도쿄 출신이 아닌데 그것도 그냥 두고.

그래서 오히려 이거는 그다음에 있을 8월에 있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그것을 위해서 등록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독일에서 공적인 기관을 연주를 하려면 반드시 등록이 돼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아닌 경우이니까 일본 대사관에서 오히려 안익태 선생의 모든 것을 보조해 주고 게슈타포 제국음악협회에서는 그냥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닐까.

[앵커]
거기 초대 총재가 슈트라우스였기 때문에 도움을 줬을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
그때는 서로 몰랐고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1933년부터 35년까지만 해요. 그리고 최근에 밝혀진 문서에 따라서 괴벨스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임명을 했다라는 그런 문서가 발견이 됐어요.

[앵커]
슈트라우스 입장에서는 친나치 이게 억울할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
좀 그런 측면이 있죠.

[앵커]
알겠습니다. 일단 독일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면서 코리아 판타지가 아니라 만주축전곡이라든가 에텐라쿠, 일본 아악에 기조한, 그런 음악을 연주했다까지가 안익태 선생과 관련된 독일 활동의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한국에 돌아오잖아요.

1955년에 처음 한국에 왔을 텐데 그때부터 이른바 안익태의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였습니까?

[인터뷰]
그 관계는 이번에 이해영 선생님께서 편지 교환을 잘 발굴하셔서 잘하셨는데요.

[앵커]
이해영 교수님이 최근에 관련 책을 내신 분이에요.

[인터뷰]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이승만에게 안익태 선생이 편지를 썼다는 것, 80년 생신에 지휘를 했다는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편지가 소개되어서 굉장히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될 것 같은데 안익태가 이렇게 애국자가 된 건 꼭 이승만 대통령 때문만 아니라 제가 볼 때는 세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실 때는 분명히 애국자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때 안익태 선생을 아는 모든 사람은 애국자로 알고 있었다는 것.

두 번째로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이 한국에 돌아오실 때 그 전에 1945년 11월에 애국가 수첩 같은 비슷한 걸 만드는데 거기에도 안익태 작곡이라고 해서 상해 정부가 안익태를 보증하는 그런 느낌이 들고 또 41년에 이미 상해 임시정부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것도 있죠.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김경래 선생이 쓰신 1960년대에 안익태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라는 책이 1966년에 나옵니다. 거기에 안익태 선생이 미화되는. 그래서 그 신화가 굳어지는 그런 결과가 됐다고 봅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고요. 다양한 얘기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진행돼야 될 부분이라는 점을 오늘 짧은 인터뷰였지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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