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이병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끊임없이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느 작품이든, 캐릭터든 소화해내는 연기력 덕분이다. 느와르부터 액션, 사극까지 이병헌은 모든 캐릭터와 작품에 완벽하게 젖어든다.
오는 17일 개봉을 앞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현석, 제작 JK필름)으로 이병헌은 그 저력을 또 한번 입증했다. '남한산성' 속 묵직한 도포자락 만큼 카리스마 가득했던 조선의 이조판서는, 어느새 대학로를 거니는 추리닝 차림의 복서가 됐다. 전작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데뷔 26년 차 배우는 익숙한 듯 낯설게 새로운 얼굴을 꺼내 보였다.
극중 이병헌이 맡은 역할은 전직 복싱 챔피언 조하. 거친 행동과 말투 뒤엔 17년 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간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트라우마가 있다. 이병헌은 코믹한 모습부터 조하의 쓸쓸한 내면까지 섬세하게 연기해내며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Q. 전작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의도적인 전략인가?
이병헌(이하 이): 그렇지 않다. 작품을 선택할 때 깨끗하게 비운 상태로 시나리오를 읽는다. 전작에서 맡았던 캐릭터 혹은 앞으로 할 장르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야 이야기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진다.
설사 다음 작품을 느와르를 하고 싶다고 마음 속에 그 장르 생각만 가득하다면 아무리 좋은 휴먼 드라마가 다가와도 놓쳐버리기 쉽다.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비워두려 한다.
Q. 사실 헤어진 엄마와의 재회, 그 덕에 생긴 배다른 동생과의 갈등과 화해로 이어지는 서사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그럼에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무엇이 달랐나?
이: 내가 작품을 고르는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가 날 움직이느냐'는 것. 크기나 장르에 관계없이 좋은 이야기에 끌린다.
이 작품도 시나리오가 좋았다. 특히 마음에 든 점은 이야기가 선을 넘지 않더라. 캐릭터의 상황,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들이 과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이 작품이 선을 넘었을 수도, 또 유치할 수도 있다. 다만 내게 '그것만이 내 세상'은 재밌고 또 읽으면서 눈물도 났다.
Q. 진부하게 비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병헌의 연기만큼은 뻔하지 않았다. 기시감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나?
이: 조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그는 부모에게 버려져 17년을 고아처럼 쓸쓸히 지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싶진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 상처가 있지만 겉으론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상처와 트라우마가 쾌쾌히 묵혀 마친 일상이 돼버린 것처럼 건조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들이 그동안 상처를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Q. 극중 애드리브가 화제를 모았는데 현장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부분은 뭐였나?
이: 예고편에도 나오는 '안 잤어, 저 XX'?(웃음)와 극중 윤여정 선생님과 춤추는 장면도 계속 회자되던데 이 역시 애드리브다. 그 신(Scene)은 원래 '조하가 일어나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는 지문 한 줄이었다.
춤을 추고 앉았는데 최성현 감독이 컷을 안하더라. 하릴없이 윤여정 선생님과 계속 연기했다. 한번 더 일어나 브레이크 댄스를 춘 이유도 윤여정 선생님이 '한번 더 해봐, 조하야'하는 애드리브 때문이었다.
Q. 극중 조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동생 진태다. 두 인물은 같은 영화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다.
이: 처음에는 정말 혼자 연기하는 것 같았다. 굉장히 어색했다. 진태에게 '밥 먹었니?'라 물으면 '밥 먹었습니다'가 아니라 다른 톤과 옥타브로 '네!'라고 대답한다. 마치 서로 다른 영화에 있는 것처럼.
물과 기름 같던 두 형제도 한집에서 동거동락하면서 변한다. 처음에는 진태가 나한테 대답한 건지 다른 질문에 한 건지 모르다가 어느새 그에게 익숙해졌다. 실제로 연기할 때도 편해지더라. 호흡을 맞춰가는 재미 역시 이 영화를 하면서 느낀 매력이었다.
Q. 상대역인 박정민을 극찬했는데?
이: (박)정민이는 세련되고 영리한 배우다.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인상 찌푸려지는 코미디를 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디어를 내는 걸 보면 색다르고 참 재밌더라.
작품에 들어가기 전부터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알고 있었다. 2015년 나는 영화 '내부자들'로 정민이는 '동주'로 시상식에서 계속 마주쳤다. 어떤 작품을 했는지 궁금해 '동주' '파수꾼' '아티스트'를 찾아봤는데 놀랐다. '저 친구, 정말 물건이구나' 싶었다.
Q. 윤여정과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아들로 만났는데 어땠나?
이: 선생님만의 특징이 있다. 순간 몰입하는 능력이 엄청나시다. 또 여전히 모두가 선생님을 찾고 원하는 이유는 뭔가 안에서 들끓고 계시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느끼고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열정이 느껴진다.
사실 배우 생활을 오래하며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 타성에 젖어 연기하는 거다. 이게 직업이고 일이라서 하게 되면 그때는 (연기가) 멈춘다. 선생님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반성을 많이 한다.
Q. '연기신'이라 평가 받는 이병헌도 그런 고민을 하나?
이: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늘 한다. 사실 어렸을 때 선생님들 보면 너무 부러웠다. 화날 때 화내고 슬플 때 울고, 물 흘러가듯 연기가 나오니까. 나는 정말 하루하루 괴로웠거든. 실제 PD들한테 욕도 많이 먹었고.
그런데 막상 내가 선배들 자리에 있어 보니까, 연기할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이 예전과 다를 게 없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쉬운 게 하나 없듯, 연기도 늘 내게 어렵다.(웃음)
YTN Star 반서연 기자 (uiopkl22@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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