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에서,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자릅니다.
그리고 딱 엿새 뒤, 이번엔 군 총사령관까지 갈아치웁니다.
그다음 날엔 총참모장까지…
러시아와 4년 넘게 전쟁을 하고 있는 위중한 시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군 지휘부의 정점 세 자리를 일주일 새 연달아 갈아엎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중 총사령관 교체가 대통령의 뜻이 아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손에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전시 대통령의 인사가 시위대에 의해 뒤집힌 초유의 장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광장의 함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7월 15일 시작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하일로 페도로우 국방장관을 전격 해임합니다.
장관 취임 6개월 만이었습니다.
페도로우는 원래 디지털전환부 장관 출신입니다.
나이는 서른다섯, 우크라이나 전장의 판도를 바꾼 '드론전'을 밀어붙인 상징적 인물입니다.
값비싼 포탄 대신 저렴한 드론으로 러시아 전차를 잡고, 오래 복무한 병사들은 전역시켜 병력 손실을 줄였습니다.
이른바 '기술로 싸우는 전쟁', 젊고 개혁적인 노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잘렸을까요?
공식적으로는 개각의 일환이라고 했지만, 핵심은 하나였습니다.
"총사령관과의 극심한 갈등"
젤렌스키 대통령 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없이는 두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전시 군 수뇌부의 내분이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갈등의 반대편엔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이 있습니다.
예순을 넘긴 시르스키는 옛 소련군 전통을 물려받은 지휘관입니다.
보병과 포병을 앞세워, 병력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는 스타일.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도살자'입니다.
물론 시르스키에게도 뚜렷한 공은 있습니다.
2022년 키이우 방어, 하르키우 대반격, 그리고 쿠르스크 작전까지,
우크라이나가 자랑하는 굵직한 승부처를 이끈 지휘관이라는 사실은 젤렌스키 대통령도 인정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내분 사태의 진짜 본질이 나옵니다.
단순한 자리싸움이 아니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둘러싼 두 철학의 정면충돌입니다.
드론과 기술 중심의 비대칭전을 강조하는 '젊은 피' 페도로우와 재래식 전력을 통한 소모전을 강조하는 백전 노장 시르스키.
문제는 이 두 노선이 도저히 공존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젤렌스키의 첫 번째 선택은 시르스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개혁파 페도로우를 내치면서 말입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엿새의 저항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페도로우 해임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겁니다.
7월 16일부터 키이우를 비롯해 최소 16개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그것도 참전용사와 현역 군인들이 앞장서서 말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로 명확했습니다.
"페도로우를 복직시켜라" 그리고 "시르스키를 물러나게 하라"
시민들 눈에 페도로우는 군 현대화의 상징이었고, 시르스키는 청산해야 할 낡은 소련식 지휘 문화의 화신이었던 겁니다.
여기에 시르스키가 러시아 블라디미르 지역 출신에 모스크바 군사학교를 나왔다는 이력까지 겹치면서, 반발은 더 거세졌습니다.
그런데 분노의 밑바닥에는 훨씬 더 절박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페도로우가 밀어붙인 드론 중심 전술, 이건 결국 '사람 대신 기계로 싸우자'는 겁니다.
"값비싼 고지를 포탄과 보병 돌격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드론으로 러시아 전차와 진지를 무력화한다"
그러면 그만큼 우리 병사의 전사자와 병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전쟁이 4년을 넘기며 장기화하는 동안, 국민들은 동원과 희생에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그런 시민들에게 이건 단순한 전술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들이, 내 남편이 덜 죽는 길이냐 아니냐" 바로 그 문제였던 겁니다.
페도로우가 오래 복무한 병사들의 전역 방안까지 함께 추진했다는 점이 지친 민심과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반대로 '병력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를 상징하던 시르스키가, 왜 그토록 거센 퇴진 압박을 받았는지도 여기서 설명이 됩니다.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발 물러섰습니다.
시위 엿새째인 7월 21일 밤, 텔레그램을 통해 시르스키 총사령관 해임 그리고 후임은 미하일로 드라파티 합동전력사령관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불과 엿새 전 시르스키의 손을 들어줬던 대통령이 여론의 압력 앞에서 정반대 결정을 내린 겁니다.
다음 날엔 흐나토우 총참모장까지 물러나고 공수부대 사령관 출신 스키비우크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국방장관, 총사령관, 총참모장.
군 지휘부의 세 정점이 일주일 새 모두 바뀐 겁니다.
새 총사령관 드라파티는 어떤 인물일까요?
마흔셋, 이번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신세대 지휘관입니다.
시르스키의 중앙집권식 지휘와는 정반대로, 예하 지휘관의 자율성과 빠른 의사결정 그리고 책임성을 강조해 온 인물입니다.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 마리우폴에서 장갑차로 러시아군 검문소를 그대로 돌파한 영상으로 이름을 알렸고 페도로우가 해임되자 곧바로 그를 공개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시위대가 원했던 바로 그 후보였던 셈입니다.
페도로우 본인도 드라파티의 임명을 두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싸움에 새 공기, 새 희망"이라며 반겼습니다.
"절반의 승리" 계속되는 대치
그렇게 사태는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부터가 지금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시위대는 시르스키 해임 발표 다음 날, 다시 광장에 모였습니다.
구호는 하나였습니다.
"절반의 승리로는 끝낼 수 없다" 두 가지 요구 중 하나, 페도로우 복직이 남았다는 겁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손을 내밀긴 했습니다.
페도로우를 만나 '군사혁신 담당 부총리'라는 새 자리를 제안한 겁니다.
그런데 페도로우가 이걸 거절합니다.
"돌아간다면 국방장관으로만 돌아가겠다" 명분이 아니라 권한의 문제라는 겁니다.
드론 전력과 병력 정책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는 국방장관이지 이름뿐인 부총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게, 7월 29일 페도로우의 인터뷰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임 배경에 "방산 조달을 투명하게 만들려던 작업이 있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군수 이권'을 건드렸다가 밀려났다는 뉘앙스입니다.
이 인터뷰가 나오자 잦아들던 시위가 다시 불붙었고, 8월 들어서도 키이우에선 수천 명 규모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 쪽 구도도 어정쩡합니다.
국방장관 자리는 현재 보안국(SBU) 수장 흐마라가 권한대행을 맡고 있고, 젤렌스키는 클리멘코 내무장관을 새 국방장관으로 밀고 있습니다.
시위대의 '페도로우 복직' 요구와 대통령의 '클리멘코 임명' 카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형국, 의회 표결이 다가올수록 이 대치는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냉정하게 짚어야 할 것들
여기서 냉정하게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드론으로 병력을 아끼자"는 서사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전쟁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드론은 적을 타격하고 소모시키는 데는 강력합니다.
하지만 땅을 '지키거나', '되찾는' 건 결국 사람이 해야 합니다.
참호에 들어가 진지를 점령하고 전선을 유지하는 건 여전히 보병의 몫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르스키식 접근, 즉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는 방식이 무조건 낡은 유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지상전의 냉혹한 속성이 그렇습니다.
전시에 군 최고 지휘부를, 그것도 여론에 떠밀려 연달아 교체하는 게 과연 안전하냐는 물음도 있습니다.
지휘관의 성패는 인기가 아니라 전장의 결과로 판가름 나는 법인데 "이번 인사가 군사적 판단보다 거리의 함성에 더 크게 좌우된 것 아니냐"는 우려입니다.
정리하면 페도로우 노선이 옳으냐 시르스키 노선이 옳으냐는, 사실 어느 한쪽의 완승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드론과 보병, 기술과 병력은 결국 함께 굴러가야 하는 두 바퀴에 가깝습니다.
이번 사태에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 전쟁하는 방식을 둘러싼 세대교체.
드론과 분권형 지휘를 앞세운 젊은 노선이 소련식 소모전 문화를 밀어냈습니다.
둘째, 전시 리더십의 균열.
대통령의 인사가 처음으로 시민의 힘에 뒤집혔다는 건, 젤렌스키의 장악력에 분명한 금이 갔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리스크입니다.
전쟁이 지금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최고 지휘부를 연달아 갈아엎은 대가로 당장의 지휘 공백과 전선 안정이라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새 지휘부가 단기간에 성과를 못 내면 지금의 위기는 언제든 다시 불붙을 수 있습니다.
전쟁 한복판에서 민심이 군 총사령관을 갈아치운 초유의 선택.
하지만 시르스키는 물러났는데, 페도로우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광장의 함성은 지금도 꺼지지 않았고, 대통령과 시민의 줄다리기는 여전히 팽팽합니다.
지금의 대치가 우크라이나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선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군의 혼란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기획·구성 : 김재형(jhkim03@ytn.co.kr)
제작 : 이형근(yihan3054@ytn.co.kr)
참고 기사 : 키이우 인디펜던트, 키이우 포스트,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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