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콘텐츠에는 영화 '오디세이'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어쩌면 평행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
영화 '오디세이'를 감상하는 내내 머릿속을 나돌던 질문은 결국 하나의 사유로 모였다. 서구 사상의 두 거대한 축인 헬레니즘(그리스 신화)과 헤브라이즘(구약성경)이, 인간 삶의 가장 깊은 본질을 이야기할 때는 같은 도달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구약성경에는 엄청난 재산과 자녀, 정직함과 경건함을 모두 갖춘 '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고난이 찾아오기 전까지, 자신의 의로움과 고결함으로 스스로의 삶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영웅 오디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트로이 목마를 기획할 정도로 비범한 지혜와 지략을 가졌던 그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꾀로 누른 후 자신의 이름을 목높여 외치는 오만함(Hubris)을 보였다. 그리고 그 오만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는 장기간의 가혹한 고난으로 이어졌다.
두 주인공의 여정은 모두 '모든 것을 가진 자의 교만'에서 출발한다. 내가 가진 지혜로, 내가 쌓아 올린 의로움으로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나 두 서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모티프는 바로 '철저한 박탈과 비움', 즉 내려놓음이다.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배와 부하, 영웅으로서의 무구와 명예를 모두 잃고 칼립소의 섬을 떠날 때 오직 작은 뗏목 하나에 몸을 맡긴다. 그마저도 성난 파도에 부서져 맨몸으로 떠내려간다. 위대한 영웅이 아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단 하나의 취약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욥 역시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 건강을 모두 잃고 잿더미 위에서 기왓조각으로 몸을 긁는 처지가 된다. 인간으로서 누리던 모든 지위와 정체성이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자기 힘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려 했던 모든 노력이 완벽히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장수여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인도와 운명 앞에 자신을 낮췄기 때문이다. 고향에 도착해서도 왕의 모습이 아닌 '거지의 몰골'을 하고 들어감으로써, 그는 자신의 모든 권위와 오만을 완전히 내려놓았음을 증명했다.
욥 또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 지혜의 아득한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완전히 항복한다. 그리고 이 철저한 비움 끝에 욥은 이전보다 갑절의 회복을 얻게 된다.
두 이야기를 한 인간의 고난 극복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삶을 완전히 지배하려 할 때 고통이 찾아오며, 스스로를 완벽히 비워내고 겸손히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고향(구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깊은 진리.
오디세우스와 욥의 여정처럼, 두 영역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깨닫고 진실해지는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닮은 답을 내놓았다.
결국 철학이 이성의 끝에서 도달하는 '겸손'과, 종교가 신앙의 끝에서 도달하는 '자기부인'은 언어만 다를 뿐 같은 진리를 가리킨다.
결국 스스로를 완벽히 비워내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욥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열쇠였다.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닌, 진정한 삶으로의 귀향을 알리는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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