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감각' 뛰어난 YS vs. '논리' 뛰어난 DJ

2015.11.24 오후 07:20
■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유언에 따라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힘을 모아 함께 장례식을 치르게 됐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서거하면서이제 '양 김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이렇다 보니 평생 협력하면서도 경쟁했던 두 사람의 관계도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먼저 YS와 DJ는 성격도 상극이었습니다.YS는 평소 좋아했던 '대도무문' 문구처럼거침없고 직선적이며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면 DJ는 신중하고 분석적이며숙고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죠.그런데 서로에 대한 평가도 비슷했습니다. 생전에 DJ는 YS에 대해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YS는 DJ에 대해"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평가했었죠.대통령 취임 이후 국정 운영 스타일도 달랐습니다. YS는 속도전을 선호했습니다. 초기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을 속전속결로 밀어붙였습니다.

반면 DJ는 'DJP, 즉 김대중·김종필 연대'를 통해 출범한 만큼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을 앞세웠죠.험난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YS와 DJ.

오늘의 시사멘토 한화갑 전 의원과 더 깊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앵커]
지금 류주현 앵커가 전해 드렸습니다마는 오늘도 이 문제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리에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신문 보니까 어제도 문상 갔다오시고.

[인터뷰]
그저께 갔었어요.

[앵커]
그저께인가요. 그런데 지금 민추협 주도로 장례가 치러진다고 하죠. 민추협 주도면 당연히 대표님도 들어가시고요. 장례위원으로.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도 고문에 이름이 오르셨다고 그러네요.

[인터뷰]
그거는 인간 전두환, 인간 노태우가 아니고 전직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그래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이니까 당연히 들어간 게 되겠죠.

[앵커]
민추협,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민추협의 주도로 장례를 치른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 민추협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합쳐서 만든 거죠. 전두환 정권 때. 그때 대표님도 물론 함께하셨을 텐데. [인터뷰] 제 기억으로는 그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23일간 단식을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민추협을 결성했는데 그 중간에 이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를 엮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은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YS대통령도 만나시고 또 그때 당시에 워싱턴에 망명 중이시던 김대중 대통령한테도 연락을 해 가지고 두 분이 민주화를 위해서 손을 잡아야 된다, 이렇게 해 가지고 민추협을 결성하게 됐고요.

저희들은 그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에서 연락을 받고 김영삼 대통령의 민추협 결성에 적극 도와라, 이런 지령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김상현 의원이라든지 예춘호 선생 이런 분들이 전부 상도동하고 상의해 가지고 결국 민추협을 공동으로 출범을 했고.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민추협 의장이 됐고 동교동을 대표해서 김상현 의원이 공동의장 대리, 이렇게 해서 양쪽에서 같이 끌고 가는 그런 민추협이 됐고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이 85년 2월달에 귀국하셔서 이제 공동의장으로 그러니까 동교동측의 의장으로 복귀가 돼서 김영삼, 김대중. 김대중, 김영삼 이렇게 공동의장 체제로 나갔죠.

[앵커]
어쨌든 그런 민추협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 자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에 2013년에 얘기를 했다는 통합과 화합, 이것과 취지도 맞는 것 같은데 민추협이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니까 어떠세요?

[인터뷰]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요. 민추협이 매년 공동행사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 형식적이지만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형식적인 리더격은 이제 상도동하고 동교동 공동으로 하든지 상도동이 맡았다가 동교동이 맡았다가 지금 그렇게 해 오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의 그런 협력관계와 상관없이 민추협은 지금 계속해서 공동으로 행사를 해 오고 있는 겁니다.

[앵커]
그러면 그 민추협 얘기가 나왔으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두 분의 관계를 한번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정치적인 관계보다도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고 하더라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대표님을 예전에 부를 때 한화갑, 화갑아! 이런 식으로 안 불렀잖아요.

[인터뷰]
그렇죠. 저희들이 비서지만요, 비서라는 표현도 안 쓰세요. 한화갑 동지 그러고 당직이 저희들한테 됐을 때는 그 당직으로 불렀어요, DJ 대통령은 늘 그러셨습니다.

[앵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에요.

[인터뷰]
그런 게 정이 가는 거죠.

[앵커]
물론 그렇죠. 이게 두 사람이 있어서의 성격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은데. DJ하고 YS 이렇게 했을 때 DJ는 YS가 어려운 일을 대단히 쉽게 생각한다. YS는 DJ한테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을 한다. 이게 두 사람의 성격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걸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인터뷰]
저희들은요, 논리적인 면이나 또는 깊숙이 사고하고 또 평소에도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저희들한테요. 무슨 일을 처리할 때는 가볍게 생각을 말고 몇 번 이렇게 되집어보고 저렇게 뒤집어보고 그리고 이제 두 번 생각했을 때는 세 번째 대책까지 세워서 결행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늘 하셨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신중하냔 말이죠. 그렇게 한 건데 사실 저희들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협력관계도 있었지만 YS대통령을 평가할 때는 그쪽분들이 늘 그러거든요. DJ처럼 공부도 하고 메모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YS는 공부도 안 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 얘기를 한 것을 보면 우리가 실력면에서 훨씬 출중하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데 이번에 돌아가시고 어록을 보니까요. 촌철살인 그런 지혜가 번뜩이는 표현이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때 그때 풀이해서 무슨 지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더라도 평소에 그런 생각이 있고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김영삼 대통령이실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앵커]
1987년 전두환 정권 당시에 마지막에 직선제 개헌운동을 할 때 서명 받자고 그랬을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100만명 정도로 서명을 받자.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1000만명 서명운동을 하자.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랬다면서요. 1000만명을 어떻게 다 서명을 받느냐 그랬더니 그걸 누가 세어보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랬다고 하는데.

[인터뷰]
두 분이 그런 얘기를 나눈 거는 저는 모르겠는데 다만 그때요, DJ대통령께서 1000만명 서명운동을 하자고 하는데 그것은 시작에 놓고 말이야, 실현도 어려운 게 아니냐. 그러니까 실현가능한 100만명 서명운동을 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앵커]
어쨌든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관계에서 굉장히 승부욕이 강하셨고 카메라가 그쪽으로 많이 가면 본인한테 어떻게든 끌어오려고 이랬던 적도 많았던 모양이더라고요.

[인터뷰]
그런 표현들이 있죠. 김영삼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신다니까 급조해서 먼저 하고 그런 것은 있는데 그거는 정치인이면 말입니다. 그런 지도자 입장에서는 그런 표현을 하기가 어렵죠. 그러니까 속된 말로 얌전빼고 말이에요, 알아도 모른 척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걸 직설적으로 그때 그때 표현을 하고 나타나니까 YS대통령의 성격은 말이죠.

그러나 DJ 대통령은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재깍재깍 그때 당시에 반응을 안 하시죠.

[앵커]
그런데 두 분은 진짜 화해한 것이 맞습니까?

[인터뷰]
저는요, 화해한 것도 없지만 화해 안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요. 특히 김대중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요, 정치 일선에서 야당 때도 유신 때도 김영삼 대통령이 싸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소외되어 있었잖아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의 그러한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서 민주화를 이룩하자, DJ대통령은 거기에 못 나가니까.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속된 말로 경쟁해서 승리자가 되고 출세를 한다고 그러더라도 결국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연금당하고 탄압받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그거예요.

그러니까 밀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알기로는 맨 처음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대표가 됐을 때 그때가 74년이에요. 저희들은 우리가 대통령 후보도 먼저 했고 말이죠. 납치사건으로 수난도 많이 받고 세계적인 지도자로 부각이 됐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대표가 돼가지고 말이에요, 먼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어쩌냐, 솔직히 우리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왜 우리가 밀어줘야 되냐고. 참 속이 좁고 못난 생각이죠. 그러면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이 시대에서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은 김영삼 대표를 밀어야 된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앞장서서 못 싸우지만 싸우게끔 여건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게 아니냐, 이 얘기를 하셨고. 그리고 79년 YH사건이 나고 말이죠. 신민당 전당대회 때 조윤형 의원하고 이기택 의원이 김영삼 대통령하고 경합을 했어요.

그런데 동교동은 그때 연금돼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이기택, 조윤형 두 의원한테 얘기해 가지고 경합하지 말고 사퇴하라고 해서 그때 사퇴했어요. 그때 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었는데 신문을 봤어요, 그 기사를요.

그리고 그때 아서원에서인가 김영삼 대표가 당원들 모아서 모임 연설을 하는데 말이죠. 김대주의 대통령이 거기에 나타나서 찬조연설을 했잖아요.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은 도와야 될 때 적극적으로 도왔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왔냐, 이런 생각에서는 조금 섭섭한 생각도 있었죠.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김영삼 대통령쪽 얘기를 들어보면 잘됐지, DJ가 된 거 잘됐지? 서로 애증관계고 라이벌관계지만 내가 먼저 대통령을 했으니까, 선배가 말이야. 그러니 DJ도 대통령되는 게 좋지 않냐. 이 생각을 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은 두 분이 라이벌관계에서 대결을 하고 경쟁하고 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뒀고, 개인적으로는 정치목적을 위해서요.

그리고 이 두분들이 경쟁하고 대립하고 이럴 때는 결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전부 민주화, 온 국민에게 자유를 주고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협력하고 경쟁했다. 저는 그렇게 보죠.

[앵커]
그때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정치를 한 것 같아요.

[인터뷰]
물론이죠. 그때 그랬죠.

[앵커]
잘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HOT 연예 스포츠
지금 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