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화 '아노라' 포스터
연애 리얼리티쇼가 유행이다. 초반에는 20대 위주의 출연자들이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재혼을 꿈꾸는 돌싱들, 마지막 사랑을 찾는 50대 이상의 싱글들, 모든 걸 갖췄지만 인연은 만나지 못한 연예인들까지 출연진도 다양해졌다. 출연자들에 따라 프로그램의 구성은 물론, 화면까지 다르다는 부분도 흥미롭다. 외모가 출중한 20-30대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조명이나 앵글 자체가 화보 촬영 같은 느낌을 풍긴다. 아예 SNS에서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이나 배우지망생들이 출연하기도 해서 매 데이트 장면이 광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 정말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미모보다는 캐릭터를 강조한다. 악마의 편집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꽤 적나라하게 돌발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표정을 보여주다 보니 때로는 출연자들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출연자들의 미모와 아슬아슬 썸타기의 설렘을 앞세운 프로그램보다 야생동물들의 짝짓기처럼 서로를 탐색해가는 날 것 그대로의 묘미가 살아있는 프로그램들이 더 화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아노라’(감독 션 베이커)는 ‘귀여운 여인’(감독 게리 마샬, 1990)이라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현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 리얼리티쇼로 말하자면 보다 평범한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다. 배우들부터 그렇다.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리차드 기어 커플과는 달리,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과 마크 아이델슈테인은 인지도 면에서도, 비주얼 면에서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귀여운 여인’에서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이 호객 행위를 하다가 ‘에드워드’(리차드 기어)와 만나게 된 것처럼 ‘아노라’에서도 스트립걸 ‘애니’(마이키 매디슨)는 업소에서 러시아 부호의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과 처음 만난다. 이반의 으리으리한 집에 한 번 놀라고,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두 번 놀라고, 그의 블록버스터급 연말 파티에 세 번 놀란 애니는 거액을 받고 일주일 동안 그의 섹스 파트너이자 여자친구 노릇을 해주기로 한다. 술과 마약, 춤과 섹스가 뒤섞인 그들의 질펀한 유희는 갑작스런 라스베가스 행으로 이어지는데,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이반은 돌발적으로 애니에게 청혼을 한다. 애니는 응당,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반의 아내가 되어 브루클린으로 돌아온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두 작품은 공히 돈 많은 남자와 성적 매력을 가진 여성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귀여운 여인’이 비비안과 에드워드의 (재)결합으로 끝난다면, ‘아노라’는 사실 주인공들의 결혼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반의 부모들은 아들이 매춘부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고용한 아르메니아인, ‘토로스’를 심하게 질책한다. 토로스 일당이 결혼 무효화를 위해 이반의 집에 들이닥치고, 이반이 혼자 도망을 쳐 버리면서 애니의 환상은 무참히 깨져만 가는데 온갖 폭력과 욕설, 괴성을 동원해도 이반네 집안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술에 쪄들어 애니의 업소에서 발견된 이반이다. 그는 술이 깬 후에도 부모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며 애니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다. 애니는 돈도 사랑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에게 평범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만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는 허황된 꿈 때문에 자멸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넘어선다. 개차반인 이반과의 결혼이 지속되었다 해도 애니에게 더 큰 불행이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노라’는 성노동자의 실존적 고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에 보다 천착한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아노라’에게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대목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신이기도 한 마지막 장면을 언급할 수 있다. 이반네 하수인들 중 유일하게 애니를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이고르’는 애니를 집 앞에 데려다 준 후, 토로스가 빼앗았던 결혼반지를 애니에게 돌려준다. 애니는 반지를 받은 후,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고르와 섹스를 시도한다. 선물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는 늘 그렇듯 반지의 대가로 자신의 몸을 주기로 한 것이다. 영화의 씁쓸한 뒷맛은 현실에서 신데렐라는 없다는 결론이나 애니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이고르를 향한 애니의 일관된 공격성을 이해하는 데서 온다. 자기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목도한 이고르의 친절을 애니는 견딜 수가 없다. 그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가 지켜왔던 자존감이라는 성벽은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노라’는 끝까지 이들에게 교감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비정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면, ‘아노라’만큼 세련되게 표현한 작품도 드물다.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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