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③ 국립현충원에 잠든 친일파 : 그 이율배반의 공간을 해부하다

2019.01.28 오후 12:37
한겨울의 현충원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방문객이 뚝 끊긴 묘역에는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고, 차디찬 냉기가 주변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멈춘 듯한 공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가 잠든 그곳에서 취재진은 묘역들을 하나하나 답사하면서 현대사의 어두운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국립묘지 현충탑을 지나면, 묘비가 빼곡히 들어선 장병 묘역이 펼쳐집니다. 그 너머로 한참을 가면 애국지사 묘역이 나오고, 다시 더 올라가면 장군봉이라고 불리는 야트막한 동산, 장군묘역에 들어섭니다. 군의 창설과 발전을 이끌었던 장성급 지휘관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현충원에서 만난 친일파 11인의 묘, 그들의 행적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의외의 인물들의 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표한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들의 묘입니다.

서울현충원에 7명, 대전현충원에서 4명, 합해서 11명의 친일 인사(정부 발표 기준)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보시겠습니다만,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보면 현충원의 친일파 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직접 찍은 묘비 사진과 관련 문헌을 토대로 인터랙티브 일람표를 제작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인터랙티브가 뜨지 않을 경우에는 인터넷 주소창에 bit.ly/친일파이력일람표 라고 입력하시면 됩니다.)




묘비 사진을 클릭하면, 자세한 보고서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을 조사한 내용을 구체적인 일지와 관련 문헌의 출처를 포함해 세부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들 보고서에서 유독 자주 출현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간도특설대'입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이 조선인을 토벌하던 악명 높은 부대였는데, 현충원에 안장된 김백일, 김홍준,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 5명이 이 부대의 간부로 복무했습니다. 1938년에 만들어진 만주국(일제가 만든 괴뢰 정부) 부대로, 만주 일대의 항일 무장 세력과 민간인을 탄압하고 살해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행적을 담은 정부 보고서 원문 일부를 보실까요?






신현준은 간도특설대 창설을 주도한 핵심 장교였으며, 중화기 무장 부대인 기박련에서 복무했습니다. 김백일 역시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김홍준, 송석하도 간도특설대 기박련 간부였고, 김석범은 간도특설대의 정보반 주임으로 일했습니다. 간도특설대 정보반은 포로가 되었거나 부상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과 지하공작원을 고문하거나 위협해 그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1명 중 나머지 6명 친일 인사들도 일본군 장교나 신문 편집인으로 일본제국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거나, 일제를 노골적으로 찬양한 이력이 확인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신태영과 신응균은 부자(父子) 사이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도 나란히 포함됐습니다.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가 해방 후에는 육군 중장과 국방부 장차관을 각각 지냈습니다.



현충원 11인의 친일파의 이력 살펴보니...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아래 인터랙티브 그래프를 보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11인의 생애 이력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인터랙티브 그래프가 뜨지 않을 경우에는, 인터넷 주소창에 http://bit.ly/친일파이력그래프 라고 직접 입력하세요.)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몸 바쳐 충성했고,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 국군과 정부 등에서 활약했습니다. 해방 전 친일 행적 (붉은 색 동그라미)가 한편에, 해방 후 이력 (노란색 동그라미)가 다른 한편에 눈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을 기준선으로 왼편과 오른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0년도 되지 않는 시차를 두고 독립군 탄압의 주역에서 우리군 창설의 주역으로 갈아타기도 했습니다.

간도특설대와 일본군 간부가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의 육군 중장.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해병대 사령관, 그리고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변신했습니다. 국군 창설기에 주도적 역할을 맡다 보니, 해병대의 아버지, 포병부대의 아버지 등 000의 아버지란 별명이 붙는 분들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주는 훈장을 받았고, 해방 뒤에는 다시 정부가 주는 영예로운 훈장을 받았습니다. 신현준은 1943년에 훈위경운장이라는 일제의 훈장을 받은 뒤 1952년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하영의 손자인 이종찬은 본인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공병 장교로서 중일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탁월한 무공’을 인정받고 일제의 금치 훈장을 받아 매월 연금까지 수령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우리 군의 지휘관으로 변신해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과 국회의원 (9대,10대, 유정회)까지 지냈습니다.



현충원, 항일 · 친일의 이상한 동거


친일 인사의 이력을 시간의 축을 따라 알아 보았으니, 이번에는 이들이 현충원 어디 어디에 안장되어 있는지 공간적 분포를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정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 인사 명단과 민간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 중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들의 묘를 현장에서 전수 조사했습니다. 수집한 GPS 데이터를 토대로 인터랙티브 지도를 제작해 친일 인사와 독립운동가 묘의 분포를 대조해 살펴봤습니다. ( 포털 사이트에서 인터랙티브 지도가 뜨지 않을 경우에는 인터넷 주소창에 bit.ly/서울현충원_친일파묘 bit.ly/대전현충원_친일파묘 라고 각각 입력하세요.)







서울 현충원을 보면, 서편에 장군 2 묘역과 3 묘역이 있습니다. 이 곳에 정부 기준 (붉은색 점)으로 친일 인사 3명의 묘가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기준(주황색 점)으로 보면 더 많습니다. 장성 2, 3 묘역에서만 3기의 묘를 더해 모두 6기의 묘가 친일인사의 묘입니다.

지도 남서 방향의 장군 1 묘역은 친일파의 묘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부 기준으로 2명. 민족문제 연구소 기준으로 13명의 친일 인사 묘가 발견됩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독립운동가 묘역 분포는. 묘비의 개별 위치를 찍는 대신 해당 구역의 중심점을 잡아 동그라미의 크기로 숫자의 크기를 표시한 것입니다. 친일인사의 묘가 독립유공자 묘역에 바짝 붙어 있거나 심지어 같은 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도 봅니다.

대전현충원은 현충원 북서 방향의 장군 1 묘역에서 정부 발표 기준 4명의 친일 인사 묘가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기준 친일파 10명의 묘를 추가하면 모두 14명의 친일인사 묘가 몰려 있습니다.

특히 지도 남동 방향의 애국지사 묘역은 경찰 묘역과 인접해 있는데, 독립유공자와 친일 인사의 묘가 불과 몇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고등경찰 소속이었던 사람이 독립운동가와 나란히 안장된 것입니다.



친일파의 묘가 굽어보는 곳에는…


군인들이 대거 안장된 현충원은 안장자 사이의 생전 계급과 서열이 그대로 공간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지위나 계급이 높았던 사람은 더 높은 지대에 안장된 것입니다. 사병보다 영관 장교가, 일반 장교보다 장성급 장교의 묘가 조금 더 언덕 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장군묘역 부근에는 국가원수 묘역들이 있습니다. 대전현충원은 더 나아가 장성 묘역 안에서도 세분화해, 준장보다 소장이, 소장이 중장이 더 높은 곳에 계단식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생전의 계급이 사후에도 그대로 연장된 모양새입니다. 그렇다면 독립유공자가 잠든 애국지사의 묘역을 볼까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는 남자현 의사와 김상옥 의사 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항일 무장독립투사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독립운동가입나다.

이분들의 묘역의 10여 m 위 언덕에는 장군 2 묘역이 자리하고 있고, 그 근처의 더 높은 언덕에는 장군 3 묘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묘역 내에 섞여 있는 친일 인사들의 무덤이 항일투사의 묘를 근거리에서 굽어보고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대부분의 친일 인사들이 장군 묘역에, 많은 독립유공자가 애국지사묘역과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광경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5번 제출된 개정법안… 번번이 용두사미


사실 현충원 내의 친일파 묘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최근에는 강제 이장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도 심심찮게 올라올 정도입니다. 이들은 애초에 어떻게 들어왔고, 왜 아직도 이장되지 않고 있을까요?

국가보훈처는 친일 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당시 안장대상 심사위원회의 결정을 거쳤으므로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관련법은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입니다. 더 나아가 안장된 사람들을 이장을 강제하려면, 이 법이 개정되어 추가적인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국회가 관련 법안을 제정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설명인데, 국회는 그동안 무엇을 했고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요?



지난 10여 년 동안 친일 인사 관련 국립묘지 관련 법 개정안은 5번이나 발의됐습니다.

친일 인사들의 현충원 안장에 제동을 걸거나, 이미 안장된 친일 인사의 묘를 강제 이장하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친일 인사가 사망 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도록 하는 개정법안 (2007, 2013, 2015)와, 기존에 안장된 인물의 묘라도 강제 이장하도록 하는 법안 (2007, 2018), 강제 이장할 때 국가가 비용을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 (2018) 등입니다.


법안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제출됐지만 번번이 흐지부지됐습니다. 2007년과 2013년 개정 법안은 해당 회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처리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고, 2015년과 지난해 법안은 아직 논의도 되지 못한 채 계류 중입니다.



먼저 2007년 4월 6일에 정무위원회 소위원회 회의록에서 개정법안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국회 전문위원은 강제 이장의 취지가 타당하지만, 국가 사회에 크게 기여한 공적이 있으면 함께 살펴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뒤 정무 소위의 내용을 보면, 국가보훈처 측의 입장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당시 김정복 국가보훈처 차장은 신중론을 제기하고, 당시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은 강제 이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2013년에 제출된 개정안에 대해서도 국회 소위의 회의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친일 행적이 확인된 인물은 안장심사위원회 심사를 통해 국립묘지 안장을 배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칙을 통해 법 시행 후 새롭게 안장하는 사람에게만 개정법안을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기존 안장자에 대한 소급 적용은 못하도록 선을 그은 셈입니다. 또한 독립유공자로서 안장된 경우, 서훈이 취소되면 강제 이장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이는 군인으로서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국회 전문위원이었던 박창현 위원은 국회 소위의 법안 설명에서 이미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 인사와의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관련 문구가 추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강제 이장 조항이 들어가도록 법안을 손질할 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의견에 대해 당시 이경근 국가보훈처 선양국장과 이성국 국가보훈처 기획조정관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김기식 당시 민주당 의원이 외국의 경우 나치 부역자가 국립묘지가 안장된 경우가 있느냐면서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잠시나마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관련 녹취록은 다음 인터넷 링크를 클릭하시면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국회 회의록 바로 가기' (링크가 활성화되지 않을 경우 'bit.ly/국회회의록보기'를 인터넷 주소창에 입력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논의도 그때뿐, 이후 해당 법안은 더 논의되지 못하고 소리 소문도 없이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2016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인물은 새롭게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안장 요건을 강화하는 개정 법안이 제출됐습니다. 이 역시 부칙을 통해 법 시행 후 새로 안장하는 인물에 대해서만 적용하도록 하고 기존의 안장자에 대한 강제 이장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때도 국회 정운경 전문위원이 법안 설명을 통해 기존에 안장된 친일 인사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 김한표 의원이 나서서 신중론을 제기했습니다.





여기서 11만 명의 피난민들의 생명을 살린 행위란 김백일 중장이 한국전 당시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미군이 철수하면서 현지민간인들도 함께 수송하도록 건의했다는 내용입니다.


김백일 장군 외에 다른 국군 지휘관들, 그리고 미 제10군단 민사부 담당 고문관이었던 현봉학 박사가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현준 장군은 한국전 당시 해병대 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시가지의 전투를 지휘하는 등 각종 전투를 이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친일 인사 가운데는 일제하에는 민족을 배반한 이력이, 해방 후에는 국가에 공헌한 공적이 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이런 공적도 종합적으로 역사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공과 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인데, 명백한 사실은 국립묘지 안장 시에는 그 한쪽 면만 들여다봤다는 점입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조선대학교 노영기 교수는 이는 일제 36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덮어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합니다.



노 교수는 "과거에 어쨌든 일본을 위해 충성을 하고 침략전쟁을 했던 사람들인데 반대로 총을 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셨던 분들은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들도 없는 사람들도 있으며,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해방 후의 다른 행적으로 인해 독립 유공자 중에서도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형평성의 문제부터 생기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도 3.1 절과 현충일이면,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이 다시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고, 국가를 위해 공헌한 분들의 삶을 기릴 것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묘비 하나하나에 본받아야 할 애국 정신이 서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여전히 친일 인사들이 현충원에서 국가 유공자로 예우받고 있고, 독립 유공자 8천 2백 명은 어디에 묘가 있는지도 모른 채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현충원이 친일과 항일이 동거하는 이율배반의 공간이 된 현실. 그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다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획, 취재 : 함형건 hkhahm@ytn.co.kr
데이터 분석 : 신수민 최혜윤


(기자 註 ) YTN데이터저널리즘팀은 잊혀 독립유공자의 묘소와 숨겨져 있는 친일 관련 잔재물을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독립유공자 묘소 제보하기 ' 사이트(http://doklib.kr)에서 독립유공자의 묘소와 친일 잔재물의 위치와 정보를 제보해주시면 소중하게 확인하고 뉴스에 반영해 시민사회와 공유해가겠습니다. '독립유공자 묘소 제보하기 사이트 바로 가기'





YTN 데이터저널리즘팀 '감춰진 친일, 잊혀진 역사' 관련 디지털 기사

①"소재 불명", "확인 불능"..독립유공자 8,000여 명 묘소는 어디에?
http://www.ytn.co.kr/_ln/0103_201901161000064807

②"김명수(金明守) 씨를 찾습니다"...잊혀진 독립운동가 묘소 찾기
http://www.ytn.co.kr/_ln/0103_201901240700068247


YTN 데이터저널리즘팀 '감춰진 친일, 잊혀진 역사' 관련 방송 리포트

① 국립현충원, 친일과 항일의 불편한 동거


② 잊혀진 항일의 흔적...국립묘지 밖 유공자 묘소


③ "김명수 씨를 찾습니다"...시민 제보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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