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영수 앵커, 박상연 앵커
■ 출연 : 안영화 선감학원 피해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N이슈]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일제부터 1980년대까지 40년 동안 아동 수천 명을 강제로 수용했던선감학원이라는 시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죽은 아이들을 암매장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최근 시굴 과정에서 일부 치아가 발견됐습니다.
[앵커]
시설이 문을 닫고도수십 년이 흘러서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설에 수용됐던 피해자,안영화 씨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나와 계시죠?
[안영화]
네, 나와 있습니다.
[앵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올해 칠순이 넘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시설에 들어갔던 건 언제쯤이십니까?
[안영화]
1965년도입니다.
[앵커]
그쯤이면 한 10대 정도이셨을까요?
[안영화]
제가 13살이었었죠.
[앵커]
어떻게 끌려가게 되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안영화]
저희가 인천 변두리 쪽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아버님은 지금의 동인천 쪽에서 일을 하셨어요. 거기 제가 자주 가는데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고 있었죠. 그런데 한 중간쯤 왔을까 , 정장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 둘이 와서 내 양쪽 팔을 잡아요. 거기가 한길이니까 으슥한 골목으로 데리고 가요. 가서 왜 그러느냐고. 나는 지금 아버지한테 간다고, 내가. 그러고 항의를 했죠. 내가 무슨 도둑질을 했냐, 사람을 때렸냐. 그래도 이유가 없어요. 그러더니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앵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가족이 있는데도 시설로 끌려가셨다는 말씀이신 거죠?
[안영화]
그렇죠. 저는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들, 가족도 다 있었어요.
[앵커]
처음에 이동을 하셨던 곳이 강당이었고 거기에서 며칠을 생활하신 뒤에 선감학원이라는 곳으로 이동을 하셨던 건가요?
[안영화]
그렇죠. 거기서 한 보름 있었어요. 가보니까 내 또래 친구들이 있었어요. 내가 간 지가 한 일주일 되고 그 후로 한 일주일 더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또 이렇게 모일 거 아니에요. 한 30명 됐어요. 그래서 지금 월미도 입구 있는 데, 그전에는 거기서 배가 출발을 했어요. 거기서 배를 탔죠.
[앵커]
그 시설에서 한 3년 정도 생활하셨다고 저희가 알고 있는데 그 생활, 당시 일과가 어땠습니까?
[안영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는 거예요. 뭐 노동이죠.
[앵커]
노동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나요?
[안영화]
거기에 농사 일이죠. 논, 밭, 산을 개간하든지 또 누에도 키우고. 염전이 또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데서 주로 노동을 하죠. 이것저것 일이 참 많았어요.
[앵커]
어린이 나이셨고요. 주변에 또래들이 있었을 텐데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을 아이들이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땠습니까?
[안영화]
힘들었죠. 매일 힘들었죠. 무슨 일을 하면 할당량을 줍니다. 그러면 일을 하는데 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는가 하면 개중에 또 약한 친구들도 있잖아요. 그 친구들이 좀 못하면 그 친구 혼자만 혼나는 것이 아니고 연대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서 사장이나, 지금의 말하자면 반장 같은 거죠. 불려가서 추궁을 받으니까 화풀이, 분풀이 이런 게 저희한테 돌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기합, 심지어 곡괭이 자루로 매. 하루 일과가 그렇게 됩니다, 그냥.
[앵커]
선생님, 그러면 먹는 거는 제대 제대로 주던가요?
[안영화]
먹는 건 그냥 보리밥 한 그릇에 새우젓, 짠지 이런 거 한 가지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배가 고프죠. 배가 고파서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이것저것 나무뿌리도 캐먹고 또 거기 뱀이 많았어요. 뱀도 잡아 먹고. 심지어 쥐도 잡아먹고. 단백질이 부족하니까 섭취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앵커]
2년 전에 경기도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고문도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목격하거나 당하신 거 있을까요?
[안영화]
고문이라고 하는 건 거의 매나 기합 수준이죠. 그걸 그러는데 고문이라는 건 다른 거 있습니까. 거짓말을 하든지 뭘 은폐하려고 할 때 고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자기들 화풀이하는 것 또 우리 일하는 거, 할당량 못 채우면 그런 기합. 또 매, 심지어. 그런 생활이었죠.
[앵커]
인권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고요. 심지어 성폭행까지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안영화]
거기는 어린 친구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그중에서도 나이 먹는 친구들이 있어요, 거기. 그러면 그 친구들이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앵커]
40년 동안 4600명이 넘게 이 시설을 거쳐갔고요. 기록으로 남은 사망자가 24명이지만 이것보다 훨씬 많다는 게 지금까지의 추측입니다. 제대로 된 장례도 없이 암매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고요. 선생님께서 직접 묻은 친구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이었습니까?
[안영화]
그렇죠. 보고된 걸로는, 지금 신고된 거로는 24명이라 그래요. 그런데 조사기관에서 조사한 게 있습니다. 거기 보면 159구라고 그래요. 그리고 묘역에서 제가 먼저 증언을 한번 했지만 제가 직접 묻은 친구도 있어요. 도망가다가 물을 건너가야 되는데, 바다를 건너 가야 되는데 그걸 견디지 못하고 떠밀려온 친구, 그 친구를 제가 묻은 적도 있습니다.
[앵커]
탈출을 하다가 그렇게 된 친구들인가요?
[안영화]
그렇죠.
[앵커]
지금 150명 정도가 추정되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어떤 이유로 사망을 하게 된 걸까요?
[안영화]
대개 보면 거기가 의료시설도 좀 약해요. 약해서 아프다 죽은 친구들, 또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도망가다 다시 떠밀려와서 죽은 친구들. 각종 질병, 후유증. 이런 거죠. 그리고 거기는 무슨 병이 들면 치료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서 자연 치유를 바라는 것밖에 없어요. 그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거기가.
[앵커]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곳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하셨던 거고요. 이 암매장 사실이 조금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 진실화해위원회가 시굴을 했고 치아와 단추를 발견했는데 발견했는데 결과 들으셨을 때 어떠셨습니까?
[안영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그 소식을 듣고 사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그 한 구뿐이 아니고 지금 발굴을 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계속 나올 겁니다. 하여튼 빨리 발굴을 해서 그 친구들이 영혼이라도 떠돌지 않고 좋은 데로 가서 편히 쉬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심정입니다.
[앵커]
아마도 대대적인 발굴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지금 생존해 계신 피해자분들도 꽤 많지 않습니까? 보상 같은 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안영화]
저기가 한 190명 정도 과거사위에 신고가 돼 있는데요. 저희는 보상을 생각하고 있지 않고요. 일단은 정부에서 책임 있는 관계자분이 일단 사과를 하시고 우리 명예회복이 우선입니다. 우리는 그걸 원하는 것이지, 보상이나 이런 문제는 그 뒤에 명예회복이 되거나 정부에서 사과를 한 다음에는 자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1차적으로는 정부의 사과입니다.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런 것도 사과를 받을 준비도 돼 있습니다.
[앵커]
사과와 명예회복이 중요하다 말씀을 해 주셨고요. 마지막으로 이제 선감학원이 문을 닫고도 40년이 흘러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 한말씀 해 주시죠.
[안영화]
지금 조사가 이번 달 중순 넘어서 과거사위에서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 그러면 일단 정부에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책임 있는 분이 나와서 사과하시고 저희 명예가 회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희 지금 190명 형제들이 다 지금 그런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부디 좀 좋은 결과가 나와서 하여튼 저희들이 명예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하루빨리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져서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려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안영화 선생님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안영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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