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내가 75년 6월 20일 그때 들어가서 뭐 재판 받고 그러느라고 한 얼마 좀 손해를 봐서 1977년 연말에 나와서 나오니까 또 뭐 성유보 씨하고 나하고 함께 이제 출옥 환영회 이런 걸 해서 재야 분들까지 다 모여 가지고 했어요. 나오니까 이제 그때 (동아)투위가 다시 이제 좀 활동을 하려고. 그 전까지만 해도 뭐 많이 탄압을 계속 받아왔는데 팀워크가 다시 짜졌다는 거지. 78년에 그때 한참 유신도 말기에 이러니까 유신 체제 말기에 이러니까 온갖 인권 탄압, 학원 탄압 이런 것 때문에 다시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하고 그럴 땐데, 그때 우리가 10월 24일 10.24. 76, 77, 78 그러니까 10.24 3주년이 됐을 거예요. 내가 이제 77년 연말에 나왔으니까 그때 투위에서 뭘 기획하고 있었냐면 언론에 아무 보도가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유신체제 하이고 막 탄압할 때니까. 그래서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 일지 사건이라는 걸 기획을 해서 그해 10.24에 그걸 우린 다 해직돼서 보도할 매체가 없잖아요. 우리가 발간하는 매달 3월 17일, 10월 24일 되면은 동아투위 사람들끼리 나눠보는 소식지가 있다고. 알림이라고 합니다. 10.24 3주년이 되는 78년 10월 24일에 명동 내 한일관이라는 점심 먹는 집에 꽤 넓은 냉면집인데 거기에 이제 천관우 선생, 송건호 선생, 이해동 목사 이런 그 종교인들 이런 분들까지 10.24 3주년이라고 그래서 기념식을 겸해서 한다 그러고. 거기서 보도되지 않은 민권, 민주인권일지라는 걸 이렇게 꽤 한 백 몇십 개 항목에 이르는 보도되지 않은 거지. 일반 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은 걸 모아서 발표를 했어요. 그게 이제 동아투위 안에만 머물지 않고 딴 데도 막 돌아다녔을 거 아니야. '이런 게 보도가 됐다 동아투위에서 이런 걸 이런 걸'. 자기들끼리 알림. 그냥 그때는 인쇄가 아니고 필경 있지, 필경. 이렇게 써서 거기다 이제 꽤 여러 장되는 등사물이지, 등사. 그걸 우리들이 직접 필경을 해서 10.24 민권일지라는 걸 냈는데 그것 때문에 1차 민권일지 사건에 이제 일곱 분이 구속이 됐어요. 위원장이었던 안종필 위원장, 홍종민 총무, 장윤환 자유언론 실천할 때 동아일보 기자협회 분회장, 안성열 선배라고 꽤 연조가 높은 분이었는데, 박종만 씨, 김종철, 정연주 씨 이 사람들이 일곱 분이 그때 1차로 구속이 됐어요. 근데 그걸로만 그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구속됐다는 걸 또 알리는 걸 또 냈다고. 왜 이런 이런 사람이 구속됐다는 걸 그 동아투위 알림지에다가. 그 다음에 11월인가에 그걸 또 냈더니 그때 우리들 안에서 제일 연세가 높은 윤활식 선배라고 그분이 동아투위 위원장 대리를 맡게 돼서 그분하고 성유보 씨, 나하고 같이 구속됐던 그 사람이 또 총무대리를 맡아서 하고 또 이기중 씨라고 우리 동기생 그 사람까지 해서 세 분이 또 구속이 됐어요. 그러니까 전부 다 합해서 열 분이 구속이 된 거예요. 동아투위원들이. 비록 우리가 해직 언론인이지만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기자들, PD, 이렇잖아요.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10명이 구속됐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언론 자유를 위해서 애쓰다가 해직된 사람들이지만 이 해직 언론인들이 10명이 한꺼번에 구속됐다는 사실이 국내에는 요만큼 보도도 안 되고 일본이니 미국이니 이런 데서 크게 보도가 된 거예요. 한꺼번에 10명이 구속됐다는 게. 그 재판에 나도 뒤에서 활동을 같이 했지만 난 2년 반을 징역을 살고 나와서 또 들어가는 게 좀 과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옥바라지 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감옥 안에 책 넣어주고 또 그 다음에 변호사들 하고 재판 준비를 해야 되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당 뭘 물어보고 뭘 어떻게 하고 이런. 그리고 언론에 그나마 외신 이런 데서 알리고 이래야 되는 일, 그것도 그 열 사람 옥바라지 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거든. 가족들도 같이 가서 그 안에서 성유보 씨 같은 사람은 건강이 안 좋아져 가지고 굉장히 고생을 하고 그랬을 때 의사가 어떻게 특별하게 들어가서 진료를 좀 하게 하고 이런 일도 해야 되고. 나는 감옥에 안 들어간 대신 그 사람들 옥바라지 하는 걸 또 맡으라고 해서 그 일을 주로 내가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10.26 사건이 난 거예요. 박정희 총 맞아서 죽은 사건이 일어났단 말이에요. 박정희가 세상을 떠났으니까 박정희가 만든 긴급조치 그런 것 때문에 구속이 됐던 열 사람은 곧 나올 거예요. 근데 안 나오는 거야. 금방 내놓지 않아요. 그래서 한 달 11월 10일쯤에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긴급조치 해제도 안 하고 계엄령 해제도 안 하고 이게 뭐야.
▷(한동오 기자)
바뀐 게 없네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당사자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안 하는 거예요. 계엄령도 안 풀고 긴급조치 해제도 안 하고 또 감옥에 있는 긴급조치 자들 석방도 안 하고. 그리고 더더구나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 복교도 안 시키고 언론인, 교수, 해직된 사람들, 우리 같은 사람들 그것도 해직 풀지도 않고 박정희가 죽었어도 민주화된 세상이 온다는 걸 우리가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동아투위, 조선투위 해직 언론인들 거기다가 해직교수협의회 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문화예술인들이 뭉쳐 있었던 거, 거기 또 학교에서 쫓겨난 대학생들 모임인 민주청년협의회 이 다섯 개 지식인 단체가 모여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을. 근데 어디 집회를 할 수가 없잖아, 계엄령 하니까 어떻게 사람들 모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윤보선 대통령 집이 안국동에 있거든. 그 집이 넓어요. 굉장히 넓어서 그 집에서 내 외신 기자들을 모아서 그 성명서를 발표한 거예요. 내가 또 쓰고 내가 또 하고 교수 뭐 이런 사람들 다 모이게 하고 그래서 그때 다 잡혀 들어갔어. 당연히 계엄령 위반이지. 계엄포고령 위반. 종로서에서 조사를 받는데 교수, 문인, 우리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람들, 민청련, 제적 학생들 다 풀려나고 나 하나만 딱 구속이 됐다고.
▷(한동오 기자)
왜 위원장님만...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전두환이가 12.12 아직 일으키기 전이거든. 그땐 정승화라는 사람이 계엄사령관이었어요. 이 사람은 사람을 잡아 넣자는 쪽이 아니야. 될 수 있으면 수습을 해가자는 쪽이에요. 유신체제, 박정희 죽고 그랬으니까 수습을 하자는 쪽이야. 그러니까 이 18명을 다 구속시키고 이것도 엄청나게 큰 일이란 말이야. 뭐 백낙청 씨 이런 사람들이니까. 뭐 홍성우 변호사 뭐 아주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다 거기에 끼어 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근데 그 굉장히 외신에도 크게 나가고 최초의 10.26 사건 이후의 최초의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기자들을 모으고 글을 쓰고. 이부영이 하나만 딱 빼서 구속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운이 좋았더라고요.
▷(한동오 기자)
왜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 뒤에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든지 그것도 계엄 풀고 민주화를 하라 이런 걸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YWCA라고 명동성당 맞은편에 그때 YWCA 회관이 거기 있었거든. 거기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모여가지고 전두환 12.12 쿠데타 비판하고 정치범 다 풀고 민주화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 걸 했는데 이부영이가 민주화를 위하여 사건을 일으킨 거가 확대돼 가지고 몇백 배 크게 된 거지. 그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전두환 치하에서 일어난 거니까 혹독하게 막 고문 가하고 그랬어요. 내가 그걸 피하는 꼴이 됐지.
▷(한동오 기자)
그때 생각하면 위원장님만 딱 구속되신 게 되게 억울하셨을 만도 한데 또 그다음에는 더 그다음에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더 무지막지한 일이 또 벌어진 거예요. 그러고 그게 5공정권이 되고 결국 광주에서 일을 저지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박정희 시대가 더 연장이 된 거라고 봐야 된다고. 동아투위가 그 전두환 시대가 왔는데도 더 심한 그런 군사 독재가 계속된다는 걸 알고 그때 내가 또 다시 난 감옥에 들어가서 재판을 받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동아투위가 다시 우리가 정말 더 큰 그 마음을 더 담대하게 먹어야 되겠다는 거라고 세미나를 하고 이러다가 5.18이 일어나기 전에 동아투위가 저쪽 크리스찬 아카데미라는 게 저 수유리에 있었거든. 거기서 2박 3일인가 그 세미나를 하는데 그때 그 뭐 저 대학도 전부 다 이 군인들이 살피고 있다 막 덮친다고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5월 17일 날 이대에서 전국의 총학생회장들 모여서 회의를 하고 동아투위는 아카데미, 수유리 아카데미에서 세미나 하고 있는데 5.18이 일어나면서 그걸 덮친 거예요. 근데 동아투위 사람들은 이대에서 전국총학생회장단들이 회의하는 걸 덮쳤다는 얘기를 전화로 듣고 수유리에서 미리 도피를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뭐 나는 그때 감옥 안에 있을 때니까 그걸 바깥에 사정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때 동아투위 사람들 중에 이제 그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박정희가 죽으면서 다 풀려났잖아요, 그 뒤에. 그 중에 홍종민 총무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다들 집으로 피했는데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냐, 난 감옥 갔다 나와서 뭐 그냥 세미나 갔다 집에 들어간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집에 들어갔다고. 가지 말았어야 되는데 집에 들어간 거야. 방금 거기다 기다리고 있던 남영동 대공수사단 경찰관한테 잡혀서 거기 들어가서 이 사람은 자기가 한 게 없으니까 감옥 갔다 나와서 뭐 내가 한 게 있냐. 뭐 대라고 그냥 전기고문하고. 이 사람이 거기서 완전히 죽다시피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고. 그런데 보니까 없거든. 그냥 풀어놨어요. 고문을 그렇게 하고. 사람 몸을 완전히 걸레를 만들어 놓고. 이 사람이 그거 후유증으로 죽었어요. 감옥은 안 갔지만 이미 죽도록 고문을 했단 말이죠. 그리고 이제 동아투위 사람들이 군사독재가 끝나지 않으면 우리는 동아일보에 갈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새언론 준비를 그때부터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1983년에. 5.18이 이제 80년 아니에요? 1980년이고 한 3년쯤 뒤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라는 걸, 언협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이제 조금씩 해가지고 85년에 말지라는 걸 내기 시작하지. 그것도 나는 그때 말지가 나오도록 만드는 것만 뒤에서 하고 나는 그때 민통련이라는 운동단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라는 걸 해서 진짜 그때 군사독재를 끝내질 않으면은 언론 자유도 없고 새 언론도 만들 수가 없다라는 생각 때문에 민통련 거기에 사무처장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언론인들이 그때 되니까 우리가 근 40이 됐더라고. 75년에 내쫓길 때 서른한두 살이었잖아요. 85년, 6년 되니까 40대에 들어간 거야. 그 위에 문익환 목사나 함석헌 선생 또 계훈제, 백기완 이런 분들은 훨씬 나이가 더 많고 청년 학생 출신들은 기껏 해봐야 30도 아직 안 된 젊은이들이고 이 나이 든 분들하고 그 중간에 끼인 우리가 꼭 핵심 중간 노릇을 할 수밖에 없어. 사무처장, 무슨 위원장 뭐 이런 거. 그래서 우리가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니까 우리들 자신이 핵심이 안 될 수가 없는 그런 나이가 됐다고.
민통련 사무처장이니까 똘똘 뭉쳐서 이쪽에서 뒤집어 쓰고 구속이 또 됐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하는 거지만 그때 구속이 돼 가지고 감옥에 들어가서 내가 또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다고. 내가 그때 영등포 구치소, 영등포 교도소에 구속이 돼서 따로 이렇게 가둬놓느라고. 여자 사동, 여성들이 갇혀 있는 그 여성들을 의정부 교도소로 보내고 나를 거기다 집어넣어 놨었다고. 87년도 때 1월 17일인데 밤에 어떤 놈들이 들어와, 둘이. 그러니까 박종철을 고문한, 고문해서 죽인 경찰관들이더라고. 남영동 대공수사단 거기서 이 친구들이 들어오더니 막 찬송가를 한 사람은 부르고 한 놈은 막 울고. 왜 저러나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박종철을 고문해서 죽인 사람들이라며. 이 사람들은 남들 고문해서 뭐 감옥 보내는 일만 했지, 자기가 그런 데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못 한 거 아니에요? 더 못 참는 거야 그냥. 더 못 참는 거야. 뭐 기독교인이니까 잔송가 부르고 자기가 한 놈은 막 울고. 거기 근데 간부 중에 안유라고 그 보안계장 하는 친구가 내가 70년대 서울시도 다닐 때 들어갔을 때부터 잘 알고 서로 이해하고 그랬던 나를 형이라고 부른 간부가 있었는데 이 친구 더러 좀 나 좀 특별히 만나자고 해서 물어봤더니 별별 소리를 다 아는 거예요. 그때 박처원이라고 대공수사단장 했던 남영동 단장이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이 사람들한테 와서 '너희들 곧 감옥에서 나오게 해줄 테니까 이쪽에서 방침 세운 대로만 해라. 그리고 1억 원짜리 통장 두 개를 해서 이거 가지고 니들 옥바라지하고 가족들 다 생활할 수 있게 할 테니까 우리 방침대로만 하라고'. 이 사람들이 저항을 하는 거예요. '아니 범인이 따로 있지 않냐고. 우리 말고 세 명이 더 있지 않냐고. 왜 그 사람들이 들어와야지 우리가 대신 들어와야 되냐'. 그러니까 조작된 거예요, 이것도. 그 이름들을 다 얘기를 해버리는 거예요. 이러 이런 사람들이. '자기들은 지켜본 사람인데 왜 우릴 집어넣고 진짜 한 사람도 안 집어넣느냐'. '야 너희들 그렇게 방침 세운 대로 안 하면 나와도 너 못 살아'. 이런 식으로 박처원이가 얘기를 하고.
▷(한동오 기자)
그러면 고문하고 물고문하고 했던 사람들은 그 3명인데 찬송가 부르고 했던 분들은 그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들이었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 조한경이라는 경위는 지휘자였던 건 틀림없어. 그런데 실제로 고문해서 죽인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한 친구는 그 안에서 소리 지르고 막 비명이 나오고 이러는 걸 안 들리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는 거야 옆에서. 노래 부른 친구도 구속이 됐고. 그 사람들은 그 나중에 박처원이라는 사람이 그 이 사람들한테 괴로워하고 '자기들은 주범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뭘 빨갱이 하나 죽인 걸 가지고 뭘 그러냐'. '지나가면 그럼 아무것도 아니야, 다 꺼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이 사람들이 저항을 한 거예요. 그 얘기를 자세히 나한테 다 해주더라고. 그걸 내 기억한 걸로만 이렇게 해서 바깥으로 편지를 내보내 가지고 그걸 비둘기라고 그러는데 내보내서 내 친구 나중에 이제 청와대 YS 정부 때 교육문화수석 했던 김정남이란 친구가 그때 중간에 일을 해 가지고 그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 이쪽에 정의구현 사제단 쪽으로 그걸 전해서 5.18 광주항쟁 7주년, 87년 7주년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하는데 김승훈 신부가 그걸 터뜨려 버렸다고. 그게 6월 항쟁에 막 불길을 지펴가지고. 6월 항쟁이 성공을 하는데 꽤 기여를 한 셈이지.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때 감옥에 잘 들어가 있었다, 이런 말도 해요. 이한열 죽고 뭐 이러면서 크게 불이 번지고 그게 이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생기게 된 거지. 그러고도 6월 항쟁의 6.29 선언, 노태우가 6.29 선언, 민주화 한다고 발표한 거. 그러고도 대부분의 정치범이 나오는데 난 못 나왔어, 김근태, 장기표랑 함께. 왜냐면 그때 양김이 분열을 해서 뭐 선거가 진다는 게 거의 분명하게 드러났잖아요. 우리들이 미리 나가면은 또 뭐 일을 만들 거라고 보니까 내보내질 않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돼서 노태우가 특별사면으로 내보내서 나왔다고. 그러니까 88년에 나왔어. 88년에 4월 4일날 나왔나. 대통령 선거 지난 다음에. 그러니까 뭐 나오니까 이미 그 한겨레신문은 다 거기 말지 편집진 했던 거기서 해서. 나는 감옥에 87년에 있는 동안에 말지를 만들 신용은 다 만들어지고 내가 87년 4월 4일날 인가 석방돼서 나왔는데. 5월 5일날 그 한겨레신문이 나온 거예요. 그니까 한겨레신문이 만들어지는, 나도 참 신문으로 다시 가고 싶었는데 이미 그땐 뭐 다 진용이 짜여져 가지고 그 내가 나오니깐 이미 준비가 다 돼 있는 거야. 근데 내가 뭐 뚫고 들어가서 나도 하자고 하면 조금 좀 균열도 생기고 그럴 것 같아서 난 그냥 거기서 빠졌지. 그리고 저 그때 제일 가슴 아팠던 게 안종필 선배라고 동아투위 위원장 하다가 10.24 민권일지 사건으로 들어갔던 분이 내가 구속돼서, 79년에 구속이 돼서 다시 감옥에 갔다고 그랬잖아요. 그 직후에 그 12월 달에 석방이 돼 가지고 나와서 암으로 돌아갔어요. 그 분 내가 돌아가는 것도 못 보고 80년에 돌아갔어요, 80년 초에. 그분이 우리보다 한 5, 6년 선배인데 투위위원장, 동아투위 위원장 하시다가 거기서 감옥에서 얻은 병 때문에 돌아간 거지. 감옥에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예요. 옥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오자마자 돌아갔어요. 그때 10.24 민권일지 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분들 중에 상당수가 거의 다 돌아갔고 이제 뭐 그때 열 분들 중에 성유보 씨도 세상 떠났고 안성열 몇 명 안 남아있어요. 감옥에 갔던 사람들 중에도 내가 감옥엔 제일 오래 살았는데도 내가 지금 질긴 모양이잖아요.
동아투위는 사실은 한겨레 신문이 나오면서 한겨레신문이 동아조선 투위, 양 투위의 주력 부대들이 들어가서 만들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만 신문을 만드는 거 아니잖아요. 새로 기자들도 많이 뽑고 경력자들도 뽑고 이러니까 실제로 동아조선 투위에서 거기 들어가서 일한 사람들은 한 열댓 명 남짓밖에 안 돼요. 이미 그때 나이들이 다 많으니까. 그리고 주력부대 다른 많은 사람은 동아투위, 조선투위 따로 이렇게 유지를 하면서 동아조선일보의 복직투쟁, 동아조선일보의 사과 이런 걸 받아내는 운동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아직도 동아조선은 자신들이 사과를 하거나 복직을 시키겠다는 거, 이런 걸 말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이제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그건 뭐냐면 저 동아조선이라는 게 일제시대부터 1920년에 창간된 신문 아니에요? 그 다음에 1945년까지 존속을 하는 동안에 일제에 엄청나게 친일을 했단 말이죠. 뭐 어쩔 수 없이 일제치하에 그 엄혹한 시절에 신문을 낼려니까 일본 천왕 탄생한 날이면 1면 머릿기사에다 ‘천왕 폐하 만수무강 빕니다’ 이런 걸 하면서 신문을 낸 거예요. 그리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불령선인(일제가 독립운동한 조선인들을 낮춰부르는 용어)이라고 그랬고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비적이라고 그랬고. 그런 신문들을 내면서 한 가지 공로가 있다면 이런 거죠. 한글 신문을 냈다는 거. 한글을 그래도 신문을 내서 그걸 읽는 사람들은 다 우리말을 계속 쓴 거 아니냐고. 그런 공로는 있다고 봐야 되겠지. 그러나 우리들 정신을 완전히 친일적으로 설득을 하고 친일 사고방식, 일본을 우러러보는 이런 걸 조장했다는 죄는 또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동아투위, 조선투위를 유지해오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죄상을 끝까지 이렇게 밝히고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 역사에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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