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근하고 정감 가는 미소 뒤에 이토록 서늘하고 지독한 얼굴이 숨어있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대중에게 친숙한 '국민 엄마'의 모습을 기꺼이 벗어던진 배우 이정은이 영화 '경주기행'을 통해 낯설고도 압도적인 에너지를 스크린에서 폭발시킨다. 8년 전 경주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막내딸 '경주'를 잃고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살다, 기어코 가해자를 향한 복수를 다짐하는 엄마 '옥실'.
20일 오후,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정은은 이 험난했던 여정을 돌아보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기에 두려웠지만, 마침내 저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묘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경주기행'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이정은은 묵묵히 1년의 시간을 기다렸다. 처음엔 소규모 독립영화로 시작될 줄 알았지만, 배우 공효진, 박소담, 이연 등 쟁쟁한 '세 딸'이 합류하며 작품의 스케일이 점차 커졌다.
이정은은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는 그저 감사하고 행운 같았다고. 하지만 "김미조 감독님이 저를 선택한 만큼 '내가 과연 옥실로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숙제를 받은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간 안정적인 작품을 주로 선택해 왔다면, 이 영화는 감정의 파고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영화 '경주기행'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는 "안 가본 길이라 솔직히 두려웠지만, 김미조 감독님의 들끓는 열정과 집념을 믿고 과감하게 뛰어들었다"라고 작품 참여 이유를 밝혔다.
극 중 옥실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넘어 가해자를 직접 단죄하기 위해 거침없이 몸을 던진다. 이정은은 대역을 최소화하고 산을 구르고 달리는 고강도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이정은은 "액션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얼굴이 온전히 담겨야 하는 씬들이라 '필사의 정신' 하나로 매달렸다. 어느 순간 제 모습을 모니터로 보는데, 저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괴하고 집요한 얼굴이 나오더라. 내가 알던 나의 익숙한 얼굴이 깨지는 순간, 배우로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김혜자 등 대선배들의 연기를 언급하며 "어떻게 저렇게 타협 없이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늘 존경스러웠다. 저 역시 제 안의 뭉툭한 부분을 깨고 더 날카롭게 파고들고 싶었다. '경주기행'이 그 치열한 시도의 시작점이 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이정은은 함께 호흡을 맞춘 후배 배우들을 향한 극찬을 멈추지 않았다.
배우 이정은 ⓒ롯데엔터테인먼트
특히 첫째 딸 장주 역의 공효진을 향해 "시나리오를 꿰뚫어 보는 눈과 현장에서 에너지를 켜고 끄는 능력이 탁월한 똑똑한 배우"라며 "스크린에서 그녀의 얼굴을 더 자주, 더 많이 보고 싶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펄떡이는 에너지를 보여준 박소담과 이연에 대해서도 "신인의 시기를 훌쩍 넘어 활개 치고 날아다니는 열정에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만족했다"고 미소 지었다.
네 모녀의 대척점에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한 변요한에 대해서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신인이라면 도덕성 때문에 다소 불편해할 수 있는 끔찍한 역할인데, 요한 씨는 자유자재로 놀며 변주를 주더라. 장면마다 다른 감정을 뽑아내려 다시 찍자고 매달리는 열정을 보며, '변요한이기에 이처럼 절대적인 밀도가 가능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변요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년 중반까지 쉴 틈 없는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정은은 "나이가 들수록 도덕적으로 닫혀있던 이야기, 나의 한계를 깨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대중적인 드라마도 좋지만, 이제는 안정적인 틀을 깨고 돈이 안 되더라도 의미 있는 영화들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라며 더욱 활발하게 활약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정은이 주연을 맡은 영화 '경주기행'은 오는 2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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