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한 미국인 교수님이 수업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축구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과학적인 스포츠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이 90분 내내 쉴 틈도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는데, 정작 골은 단 한 골도 나오지 않은 채 경기가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보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스포츠라면 적어도 점수가 시원하게 터져야 보는 맛이 있는 것 아니냐는 취지였죠.
당시 축구를 사랑하던 저로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끊김 없이 흐르는 90분, 그 안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균형이야말로 축구의 본질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2년 만에 미국 땅으로 돌아온 이번 월드컵을 지켜보면서, 저는 문득 그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축구를 바라보는 미국식 실용주의 시선이, 마침내 그라운드 한복판까지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수분 보충 휴식'은 무엇인가
FIFA가 이번 대회에 도입한 '수분 보충 휴식(hydration break)'은 전·후반 경기 중반, 즉 대략 22분과 67분 무렵에 3분씩 경기를 멈추는 제도입니다. 104개 전 경기에 의무 적용되며, 경기장의 지붕 유무나 기온, 경기 시간대와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시행됩니다.
FIFA 미국 대회 운영 총책임자 마놀로 수비리아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중계방송사 회의에서 이 제도를 발표하며, 경기 장소나 날씨와 상관없이 모든 경기에서 전·후반 각각 휘슬에서 휘슬까지 정확히 3분간 휴식을 둔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차적인 명분은 선수 보호입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열린 클럽월드컵 당시 한낮 무더위와 높은 습도 속에서 선수 건강 문제가 불거진 경험, 그리고 갈수록 비대해지는 토너먼트 일정 속에서 선수 혹사를 막아야 한다는 축구계 내부의 목소리를 반영했다는 것이 FIFA의 설명입니다. 종전에는 심판이 그날의 기온과 습도를 따져 휴식 여부를 판단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이를 일률적·의무적으로 못 박아 모든 팀이 동일한 조건에서 뛰도록 했다는 취지입니다.
운영 방식도 정교합니다. 휴식 동안에도 경기 시계는 계속 흐르고, 멈춘 3분은 전·후반이 끝날 때 추가시간으로 고스란히 더해집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90분의 경기가 사실상 '4쿼터제'로 나뉘는 셈입니다.
제도의 뿌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처음 도입된 '쿨링 브레이크(cooling break)'는 습구흑구온도(WBGT)가 섭씨 32도를 넘는 극단적인 경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시행됐습니다. 습구흑구온도란 단순히 기온만 재는 것이 아니라 습도, 햇빛(복사열), 바람 등을 종합해 '인간이 실제로 느끼는 열 스트레스'를 계산한 지표입니다. 기온이 아주 높지 않더라도 습도가 높으면 땀이 마르지 않아 체온 조절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스포츠계에서는 일반 온도보다 이 지수를 선수 보호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습니다. 보통 WBGT가 32°C를 넘어가면 열사병 위험이 극도로 높아지는 단계로 봅니다. 지난해 클럽월드컵에서는 그 기준이 30도 안팎으로 낮아졌고, 이번 대회에서는 아예 기온과 무관하게 모든 경기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FIFA는 이를 기존 방식의 '간소화·표준화 버전'이라고 포장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선수도, 감독도, 팬도 등을 돌리다
문제는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간극입니다. 방송사 입장에서 3분짜리 휴식은 사실상 거대한 광고를 한 번 더 끼워 넣을 절호의 기회가 됐습니다. 중계 화면을 잠시 끊고 맥주 회사나 스포츠 베팅 업체의 자극적인 광고를 내보내는 식입니다.
현장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프랑스에 월드컵 우승컵을 안긴 디디에 데샹 감독은 대회 개막을 앞두고, "그 3분이 경기의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다"며 "결국 즐거운 쪽은 방송사들뿐이지 않겠느냐"고 꼬집었습니다. 개최국 미국을 이끄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 역시 이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기상 조건이 정말 극단적일 때라면 모를까, 날씨가 쾌적한 날까지 의무적으로 경기를 끊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대표팀의 첫 경기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기온이 섭씨 22도 안팎에 불과했는데도 전반전 도중 경기가 멈춰 섰다고 전했습니다. 더위로부터 선수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무색해진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돈'이라는 합리적 의심
그래서 축구계 안팎에서는 선수 안전이라는 방패 뒤에 막대한 광고 수익이라는 셈법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이번 대회 104경기에서 전·후반마다 3분씩 휴식이 주어지면, 대회 전체로는 10시간이 넘는 프리미엄 광고 시간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WSJ에 따르면, 전직 ESPN 임원 출신의 한 컨설턴트는 "축구 경기를 사실상 4쿼터로 쪼개 막대한 가치를 지닌 광고 구간을 창출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가격표를 보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합니다. WSJ가 전한 한 광고 구매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조별리그 초반 경기의 30초짜리 광고 단가는 브랜드에 따라 약 20만 달러 수준이지만, 미국 대표팀 경기가 되면 그 값이 75만 달러 안팎까지 치솟습니다.
미국 내 중계권을 쥔 폭스 스포츠는 경기 중단 때 짧은 광고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개막전 전반 휴식 때는 '파워에이드 수분 보충 휴식'이라는 타이틀 스폰서 안내 화면이 뜬 뒤 무려 다섯 편의 광고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후반전에는 광고가 너무 길어진 탓에, 화면이 그라운드로 돌아왔을 때 시청자들이 이미 재개된 경기의 첫 몇 초간을 놓치는 주객전도의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아름다운 경기'에 칼집을 내다
축구를 흔히 '아름다운 경기(The Beautiful Game)'라 부릅니다. 포르투갈어 '조구 보니투(jogo bonito)'에서 비롯된 이 표현은 브라질의 전설 펠레가 1977년 자서전 제목으로 쓰면서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그 기원을 두고는 펠레가 브라질 대표팀 선배 '디디'에게서 따왔다는 설, 1950년대 영국 해설가가 먼저 썼다는 설 등이 엇갈리지만, 이 표현이 축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름다움'의 핵심이 바로 끊김 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경기 운영에 있다는 점입니다. 작전타임도, 이닝 교대도, 공수 전환의 멈춤도 없이 45분이 통째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선수의 즉흥적인 창의성과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가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미식축구와 농구, 야구에는 작전타임과 공수 교대, 이닝 종료처럼 상업 광고를 넣을 자연스러운 틈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반면 축구는 그 '끊김 없음' 자체가 정체성이자 매력인 스포츠입니다. 미국식 스포츠 중계 시스템이 오랫동안 축구라는 종목을 어색해하고 까다로워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축구의 매끄러웠던 90분의 시간에 마침내 자본의 광고가 칼집을 냈습니다. 어쩌면 점수가 시원하게 나야 재밌다던 대학 시절 미국인 교수님의 실용주의적 시선이, 30여 년 만에 미국 땅에서 판정승을 거둔 풍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반론도 가능합니다. 갈수록 빡빡해지는 일정 속에서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지켜낼 수 있다면, 3분의 멈춤은 충분히 치를 만한 대가일 수 있습니다. 더위가 실제로 선수들을 쓰러뜨려 온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선수 안전을 위한 합리적 진화인지, 아니면 그 명분을 빌린 자본의 침투인지. 어쩌면 이 둘은 처음부터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팬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광고를 보느라 어렵게 터진 한 골의 순간을 놓치는 일. 90분의 긴 침묵을 기꺼이 견디게 하는 보상마저 자본의 시간표에 내주는 순간, 우리는 과연 이 경기를 여전히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이번 월드컵이, 그리고 그라운드를 지켜보는 우리 모두가 함께 써 내려갈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기사: 월스트리트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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