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파병 50주년, 우리 군의 발자취 [서경석·정해천·조영주·박윤정]①

2014.10.01 오전 10:20
[앵커]

지난 1964년 시작된 우리나라의 첫 해외 파병.

올해로 50년이 됐습니다.

베트남전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서 우리 장병들이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땀방울을 흘리고 있습니다.

[앵커]

오늘은 10월 1일 국군의 날입니다.

파병의 역사를 돌아보고 발전 방향을 짚어보는 시간 마련했는데요.

직접 해외파병을 다녀오신 네 분을 초대했습니다.

인사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먼저 저희들이 한 분 한 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오른쪽에 계신 분인데요.

정해천 예비역 대령님이시고요.

교수님이십니다.

정해천 대령님은 동티모르 부대장을 지내셨고 초기 자이툰 사단 참모장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이 조영주 해군 준장이십니다.

아덴만 여명작전, 유명한.

지금도 기억이 나는 아덴만 여명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셨고요.

리비아 교민철수작전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셨습니다.

[앵커]

다음에 제 왼쪽으로 박윤정 대위, 오늘 유일한 홍일점 여군 출연자네요.

남수단 한빛부대에 근무하셨는데 지금도 내전중인 남수단에서 재건을 힘쓰시는 분이고.

다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경석 예비역 육군 준장님이십니다.

우리나라에 첫 파병한 사례죠.

월남전 직접 다녀오셨습니다.

[앵커]

반갑습니다.

먼저 정 교수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이라크에 다녀오셨다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언제였죠, 그때가?

[인터뷰]

2004년 8월에 가서 2005년 9월에 귀국했습니다.

[앵커]

어떤 임무를 맡으셨습니까?

[인터뷰]

자이툰 부대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앵커]

지금도 그 당시 기억이 계속 살아계실텐데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

[인터뷰]

저희들이 국가의 자력으로 해상과 공중으로 쿠웨이트까지 전략적으로 이동을 실시했거든요.

쿠웨이트부터 이라크 북부 아르빌까지 차량들이 많기 때문에 그 차량을 지상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00여 대가 되는데 3개조로 나눠서 1150km 를 지상이동해야 됐거든요.

많은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차량이 정렬도 돼야 되고 또 고장났을 때 조치도 해야 되고 또 공격을 받았을 때 조치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 작전도 작전이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50도가 넘는 열, 그리고 모래바람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저희들은 일과를 아침 2시에 일어나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전 중에.

[앵커]

아침 맞나요, 새벽 2시?

[인터뷰]

그래서 오전 8시경까지 훈련을 하고 8시 이후에 오전 동안에 차량 정비하는 그런 일과를 지내게 됐습니다.

한 번은 제가 너무나 뜨겁고 더워서 저희가 가져간 온도계를 봤는데 온도계가 측정할 수 있는 온도가 50도까지였거든요.

그런데 꼭지점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 몇 도인지 저희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영주 준장님 청해부대 함장으로 아덴만 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셨는데.

지금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되셨죠?

[인터뷰]

2011년 돌아왔으니까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앵커]

3년 지나도 그 순간은 평생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공습이 시작되던 그 순간 잠시 설명을 해 시겠습니까?

그때 기억 나시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우리 상호 주얼리호의 선원분들이 이미 인질로 잡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덴만 여명작전은 어렵고 참으로 위험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해군 작전에서 치밀한 작전을 수립하고 그다음에 현장에서 작전하는 우리 부대원들에게 격려하고 책임은 상급부대에서, 공은 현장으로 돌리면서 이렇게 지휘해주신 덕택에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해군 작전 사령부에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는데 조금 부연해서 설명을 드리면요.

사실 삼호주얼리가 피랍되면 그 선박을 진압해서 구출하기 위해서는 내부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만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부산에 우리 삼호주얼리와 똑같은 선박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해서 그런 내부 도면부터 해서 우리 작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제공했고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선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무장이 과연 삼호주얼리호의 선체를 뚫을 수 있을지 없을지, 이게 아주 작전에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무장에 따른 관통여부를 잘 확인해서 제공했고.

특별히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작전 시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작전 시간을 선정할 때 인체의 생체리듬과 우리 작전요원들의 그런 효율적인 작전수행을 고려가 됐었는데 특별히 생체리듬이 밤에 할 것이냐, 새벽에 할 것이냐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군의관에 문의 결과 새벽에 소극적이고 취약해진다는 것을 듣고 우리 요원들이 작전측면에서는 접근해서는 적이 잘 발견하지 못하고 선박에 등반 후 선박이 환해지는 이런 상황을 종합해서 그때 일출 1시간 전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앵커]

자세한 얘기는 잠시 후에 듣도록 하고요.

[앵커]

박윤정 대위는 남수단에 다녀오셨어요.

일단 남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이잖아요.

굉장히 멀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얼마나 걸리나요?

[인터뷰]

22시간 정도.

그리고 아프리카에 도착해서도 우간다를 경유해서 남수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앵커]

몇 시간 걸려요, 가는 데?

[인터뷰]

비행기 타고.

[앵커]

직항입니까, 그게? 22시간이라는 게.

[인터뷰]

남수단 아프리카대륙에, 그러니까 남수단에 가기 위해서 우간다를 그때 경유를 했습니다.

우간다까지 가는 데 그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앵커]

더 걸린다는 얘기잖아요.

[인터뷰]

그래서 거의.

[앵커]

부대 출발해서 부대 도착하는 데까지 얼마?

[인터뷰]

1박 2일에서 2박3일.

[앵커]

가는 것만도 굉장히 고생이셨겠네요.

주로 어떤 임무 맡으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간호장교로서 의무지원을 수행했었습니다.

[앵커]

남수단에 있는 재건을 하면서 많은 남수단 주민들이 굉장히 고마워했을 것 같아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감사 인사를 현지인들에게 들으면서 굉장히 뿌듯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다음은 서경석 준장님.

월남전을 참전하셨네요.

유일한 전투 부대였는데.

월남에서 돌아온 서 상사 맞습니까?

[앵커]

그당시 계급은?

[인터뷰]

소대장 준위, 그다음 중대장 나가서 대위.

중위, 대위 그러니까 68년도 2월에 가서 70년도 4월까지 한 2년 2개월동안 싸움박질만 하다가 왔어요.

[앵커]

전투 부대니까 감회가 더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다른 기억이 없어요.

악몽만 남아있지.

[앵커]

돌아오셔서는 어떠셨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뷰]

악몽이라는 게 힘들어요, 극복하기가.

저는 잘 극복했는데 그렇지 못한 전우들은 고생하는 전우들이 좀 있더라고요.

[앵커]

제일 기억에 나는 순간이?

방송국에서 말씀하시기 곤란스러운 부분도 있을 테지만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인터뷰]

전투할 때죠.

전투할 때 적이 나한테 오는 적을 다 사살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나나 내 부하가 죽으니까 그 순간이 굉장히 극복하기가 힘들고 그런데요.

그걸 극복하기 노력이 제 월남생활의 전부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그 순간을 극복하는 게 어렵습니까?

[인터뷰]

준비하는 과정이 더 어렵죠.

[앵커]

어떤 어려움이?

[인터뷰]

일단 딱 부딪치면 나도 몰라요, 어떻게 싸우는지.

[앵커]

누가 어디에서 총이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요?

[인터뷰]

적을 보고 쏘니까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는 알지.

[앵커]

게다가 게릴라전을 하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저격이 무섭고 여기저기 묻어놓은 지뢰가 아주 무섭죠.

[앵커]

혹시 지금도 주무시다가 꿈에 혹시 그런 악몽 같은 게 떠오르시나요?

[인터뷰]

대대장 할 때 전방에서 야간 순찰 돌다늦게 들어오면 침대에서 보면 그때 우리 중대원한테 죽은 마이라는 여자가 나타나서 괴로워서 막 허우적거리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소주 한 병을 마셔버리지.

저는 잘 극복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나요.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칠십이 넘어가니까 다 정리가 잘된 것 같습니다.

[앵커]

정말 다행입니다.

[앵커]

그때 맹호, 백마, 청룡 많이 갔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전투 부대 셋이잖아요.

[앵커]

그때 어느 부대셨죠?

[인터뷰]

맹호, 천하제일연대.

[앵커]

기억나십니까?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같이 갔던 분들이 몇 분 정도였습니까?

[인터뷰]

1개 제대가 3, 400.

훈련받고 갔죠.

[앵커]

그리고 오실 때는 그중에서 몇 분이나 돌아오셨는지요?

[인터뷰]

갈 때는 같이 가지만 돌아오는 건 다 제각각이니까요.

나는 거기 가서는 1년이 의무기간인데 저는 2년이 넘게 있어서 파월을 같이 한 전우들은 미리 다 왔고 제가 1년 늦게 오다 보니까 같이 간 전우들은 같이 안 왔죠.

[앵커]

지금도 혹시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베트남을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인터뷰]

한 세 번 갔어요.

[앵커]

어디를 가셨습니까?

[인터뷰]

사이공 후에 뭐이런 데 갔었습니다.

[앵커]

느낌이 어떠셨는지도?

[인터뷰]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별로 그래.

단지 거기 갈 때는 악몽이 다시 생각이 나니까.

[앵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베트남부터 남수단까지 우리 파병부대 부대원들이 다녀오신 곳을 지도로 살펴보도록 하기죠.

[앵커]

뒤에 세계지도가 나왔는데요.

가깝게는 베트남부터 이역만리 22시간 넘게 걸린다는 남수단까지.

우리 군이 해외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벌써 50년을 맞았다고 합니다.

[앵커]

벌써 50년.

반세기 동안에 해외파병의 역사, 잠시 되짚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황혜경 기자의 보도 함께 보고 이야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베트남으로 떠나는 우리 용사들, 65년 2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으로 떠났다."

[앵커]

국군 파병의 역사는 지난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4년 9월 22일, 국군의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단이 베트남에 파견된데 이어, 이듬해 2월에는 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 그리고 그해 10월 처음으로 전투부대가 베트남 전쟁에 보내졌습니다.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인 32만 5천여 명을 베트남전에 파병한 우리나라는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5천여 명의 목숨을 잃었고, 만 2천여 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인터뷰:서경석, 예비역 중장· 前 맹호부대 중대장]
"전투 현장에는 이기고 지는 것밖에 없어요. 무승부가 없습니다. 거기에 어린 나이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남은 것은 악몽이 많이 남았죠. 그러나 개인에 따라서 그걸 잘 극복한 사람도 있고..."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해외 파병은 중단됐지만, 1991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파병 논의는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유엔 결의로 다국적군이 구성되고 전후 복구사업을 위해 참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국군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 3백여 명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내졌습니다.

같은해 UN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199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으로서 한 몫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소말리아와 앙골라,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까지 모두 17차례에 걸쳐 연인원 36만여 명이 파병돼 인도적 지원이나 재난구호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선 파병지에서 한국의 문화와 위상을 알리는 홍보대사로서의 역할도 해내고 있습니다.

[인터뷰:조성룡, 중령·아프간 오쉬노 부대 마지막 부대장]
"좌절에 빠진 아프간 국민들에게 가슴에 와닿는 민사작전을 실시함으로써 한국군이 최고라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프간에 파병된 40개국 이상의 다른 동맹국으로부터 민사작전의 모범 부대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다국적군의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

이제는 세계 15개 나라에 1400여 명이 파견돼 가는 곳마다 환영과 호평을 받으며 인도적 활동과 재난 구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황혜경입니다.

[앵커]

파병 우리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인데요.

현지에 가신 분들은 말 못할 고민도 많고 조금전에 들은 것처럼 그 이후의 트라우마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솔직한 얘기를 좀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아덴만 여명작전, 소말리아 청해부대 말씀을 조 준장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좀더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이 작전을 과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논란이 많았습니다.

결국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제로 그 작전을 수행하시는 함장께서는 만에하나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부하직원이 희생을 당한다면 아마 그런 생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때 당시 상황을, 심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인터뷰]

그 당시 작전을 실시할 때 심정은 우리 앵커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런 참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를 함에 있어서 우리 대한민국 군처럼 평소에 전기전술이 연마된 그런 군은 세계에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해적보다 훨씬 그런 위험한 북한을 상대로 모든 영역에서의 전기전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작전수행에 대한 그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우리 대원들도 충분히 전비태세가 갖춰져 있었고 특별히 세계 최강의 우리 UDT 요원들은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저 노래에서 듣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얘기였는데 앞서 서경석 장군 이야기를 들었듯이 도전했던 파병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후유증은 남아있습니다.

계속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전장에서 베트공과 부딪쳤을 때 누가 먼저 발포를, 저쪽에서 쏘기를 기다리고 쏘는 겁니까?

아니면 맞닥뜨리면 무조건 쏘는 겁니까?

어떻습니까?

[인터뷰]

이제 수색이나 정찰 나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먼저 쏘는 겁니다.

먼저 보고 먼저 쏘는 것.

그런데 그게 적을 먼저 보지 못하면 적이 먼저 쏘면 우리가 당하는 거죠.

먼저 보고 먼저 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앵커]

그리고 이게 비정규적으로 교전이, 그러니까 어느 지역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정말 게릴라전이라서 가다가 지뢰에 밟히고 가다가 트랩에 걸리고 굉장히 처참하게 죽는 이런 걸 저희들이 영상으로는 많이 봤거든요.

그런 것도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실제 총을 쏘는 것뿐만 아니라.

[인터뷰]

그런데 우리도 다 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고 활동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는 적이 어디에 있다는 걸 알고 적의 규모를 다 알고 투입이 돼요.

그래서 주로 정규군하고 부딪치거나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되고 평상시에는 매복 나가거나 그럴 때는 지방 게릴라들한테 부딪치고 그렇죠.

[앵커]

어려운 전투를 함께했기 때문에 전우애가 남다르실것 같아요.

지금도 같이 만나시나요?

[인터뷰]

그렇죠, 월남에서 같이 싸웠던 중대원들하고 지금도 만나요, 1년에 서너 번.

[앵커]

다들 건강하신가요?

[인터뷰]

불편한 사람이 많죠.

고엽제 때문에 고생하고.

그다음에 부상 당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앵커]

당시 베트남에 가실 때 결혼은 하셨었나요?

[인터뷰]

아니, 싱글이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앵커]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데 부모님이 제가 파월한다고 그러니까 걱정 안 하시고 잘하고 돌아와라,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이 파병 66주년이기도 합니다마는 66주년.

국군의 날이기도 합니다.

지금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요.

[앵커]

충남 계룡대 연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관련해서 화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열병식이 열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화면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모습도 보이고요.

[앵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열병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장군님들 많이 계시니까 열병에 관해서 교수님께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열병이라는 게 어떤 뜻이 있습니까?

[인터뷰]

열병이라는 건 중부대를 검열할 때 하는 의전행사가 되겠습니다.

의전이나 검열을 목적으로.

그래서 보시는 화면처럼 지휘관이나 귀빈께서 차량이나 도보로 또는 이렇게 열병을 실시하게 되겠습니다.

하면서 사기장비, 교육부 상태 등부대의 그런 상태를 외부로 보여드리고 하는 그런 행사가 되겠습니다.

[앵커]

열병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저렇게 줄을 맞춰 서 있는 것도 있겠습니다마는 사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를 하나요?

[인터뷰]

외모적으로는 단정한 용모, 그다음에 군기 있으면서 사기 넘치는 외부 표정, 그다음에 복장에서 나오는 자세 그다음에 평소 강인한 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레 나오는 외적 풍모에서 나오는 그런 위엄, 군인으로서의 위엄이라든지 내부에서 나오는 전투 의지, 이런 것들이 한번 차를 타고 돌면 그 부대의 상태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한민구 국방장관의 모습도 보이네요.

박윤정 대위께서도 열병식 참여해 보신 적 있죠?

[인터뷰]

저도 국군의 날 행사 때 열병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앵커]

열병하는 분 입장도 있습니다마는 또 이제 군인의 입장이지 않습니까?

준비도 많이 하고 그러죠, 어떻습니까?

[인터뷰]

일단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서 혈액순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앵커]

어떻게요?

[인터뷰]

보이지 않는 근육운동을 시행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몸의 순환을 위해서 크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세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자신만의 노하우,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요즘 안 그래도 진짜 사나이인가요, 거기서 보니까 여군들 활약도 많이 하시던데.

[인터뷰]

주로 이제 혈액이 아래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하지에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여준다거나 그렇게 다리에 힘을 줬다 풀었다 하는 그런 게.

[앵커]

발가락 정도는 움직여도 되네요.

[앵커]

저렇게 안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움직이고 있었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다 요령이 있었습니다.

국군의 날 열병 행사 함께 보셨습니다.

[앵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 자랑스럽습니다.

[앵커]

그러면 소말리아 얘기를 잠시 들었고, 베트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대위님 말씀하셨으니까 남수단 한빛부대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죠.

[앵커]

관련영상이 있습니다.

준비했거든요.

남수단은 어떨지 한번 남수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앵커]

비행기로 22시간을 날아가서 이역만리에 있는 남수단을 다녀오셔서 다녀오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은데.

일단 울지 마 톤즈로 저희에게는 잘 알려진 나라인데 어떻습니까?

[앵커]

가보면 어때요?

[인터뷰]

굉장히 오래된 나라의 느낌.

그러니까 옛날에 온 것 같은.

[앵커]

시간로 과거로 돌린 것 같은.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봤고 남수단이라는 나라가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서 저희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는데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하고 이렇게 위생적으로 많이 갖춰져 있지 않고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봐왔던 것 같습니다.

[앵커]

간호병으로 활약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남수단 주민들이 실제로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우리 한빛부대를 그렇게 부를 정도로 굉장히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전한다고 들었습니다.

[인터뷰]

간호장교로 다녀왔습니다.

제가 남수단에 있을 때 부족 간에 무력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에 150여 명 정도가 저희가 있는 항공후송을 왔습니다.

그래서 주립병원이라는 곳에 항공후송된 환자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임무를 주말에 갑자기 쉬고 있는데 하달돼서 저희가 임무를 수행했고요.

말이 주립병원이지 거기주립병원이 엑스레이 촬영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일부 총상환자랑 중상환자를 치료했습니다.

한 청년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주는 의술도 모자라 작은 관심도 놓치지 않는 한빛부대는 진정 하늘이 내리신 선물이다, 이런 감사인사를 진심으로 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통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큰 뿌듯함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앵커]

혹시 아주 안타까운 순간도 많이 있었을 텐데 이때 약이 더 있었으면, 이때 더 뭐가 있었으면, 지원 더 있었으면, 그런 실제로 환자들을 지켜보는 장교의 입장은 얼마나 더 안타깝겠습니까?

그런 상황도 있었죠?

[인터뷰]

저희 때 1살도 되지 않은 아기가 폐에 문제가 있어서 발달이 굉장히 늦어져서 10kg도 안 되는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부대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저희가 의무지원이 열리는 곳까지 5시간 정도를 걸어서 저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아기 이름이 덴 마우트 덴이었는데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의료를 했습니다.

어른 마스크를 쪼아가면서 약을 주입했는데 그래서 사실상 더 이상 사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저희가 이렇게 조금씩 더 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2진 때 내전이 일어나는 통에, 그 통에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안타까운.

[앵커]

지금도 눈물이 글썽이시는 것 같아요.

[앵커]

다 먹지도 못해서 정말 어린 아이를 5시간을 데리고 온 아이, 그 아이를 어머니가, 열심히 살려줬는데 또 내전이 이어지면서 나중에 그 아이가 숨졌다는 소식을.

그 엄마는 어떻게?

[인터뷰]

어머니 소식은 못 듣고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2진까지 전해 줬던 단장님께서 아버지를 통해서 들었다고.

[앵커]

그 아이를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인터뷰]

덴 마우트 덴이라고.

저희 부대에서 아이콘 같은.

저희가 너무나 많은 애정과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크게 기억이 납니다.

[앵커]

여기 나머지 세 분들은 듬직한 남자분들이신데 여군으로서 멀리까지 갔다와서 더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인터뷰]

사실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여자니까 씻기 불편하고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시는데 파병지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그것이 불편하기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런 것보다는 남수단에 출발하기 전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사우나에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사전교육을 받았음에도 너무나도 더운 기온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상황에서 장병들이 많게는 10리터의 물을 하루에 마셔도 그것이 땀으로 다 배출돼서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앵커]

물을 하루에 10리터씩 마셔도 땀으로 다 나가서.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건강하게 임무수행했던 것은 꾸준히 건강관리, 체력관리를 부대 차원에서 굉장히 노력했고요.

[앵커]

또 만약에 가라고 한다면?

[인터뷰]

저는 100% 다시 갈 수 있습니다.

[앵커]

박수 한번 드리고 싶네요.

[앵커]

믿음직하네요.

정해천 교수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저렇게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 가면 문화도 굉장히 다른데 가기 전에 우리 장병들 많은 교육을 받고 간다고 들었습니다.

[인터뷰]

파병지역은 대체로 중동이나 아프리카와 같이 우리하고 문화적 배경이 매우 다른 곳이거든요.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파병 장병들은 이제 부대에 따라서 6 내지 8주간 파병 전 사전교육을 받습니다.

그때 이제 제가 속해 있는 PKO센터의 전문 교수들이 있습니다.

그 전문 교수들이 파병지에 관한 각 나라별로 전문가들입니다.

저 같은 경우 남수단 담당하는 교육관입니다.

같이, 저한테 교육도 받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문교수들이 해당되는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관습 이러한 제반사항을 미리 교육시켜서 지식을 갖게 하고 또 해당 파병지에 다녀온 장병, 또 해당 파병지에서 활동경험이 있는 NGO 요원 이런 분들을 초빙 해서 현지 적응 교육도 실시하고 또 해당되는 국가의 언어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회화정도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앵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를 받고 그런 사례들도 좀 있을 것 같고요.

특히 동티모르를 다녀오셨지 않습니까?

동티모르 같은 경우에는 정말 지금은 한국 하면 너무나 우호적인데 그때만 해도, 처음 가실 때만 해도 그러지 않으셨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처음에 다국적군에, 그때는 다국적 군이었는데 다국적군의 일환으로 전개됐을 때 처음에는 주민들이 로스팔로스에 있었던 주민들이 피했습니다.

그 앞에 여러 다른 사람들, 군대와 접촉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피해를 당했던 아픔을 가진 나라 아닙니까?

그런 입장에서 정성스럽게 노력하니까 서서히 저희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앵커]

역시 사람의 마음은 언어가 다르고 복장이 다르고 여러 가지 달라도 통하는군요.

[앵커]

서 중장님께 질문드려볼게요.

베트남전 월남전에는 우리나라 군인뿐 아니라 미군도 참여했고 다른 나라 군인도 있었는데 잘 어우러지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제가 거기 있을 때는 한국군만 봤지, 다른 나라 군대를 보지 못했어요.

전투지역에서만 활동을 하니까요.

보지 못했어요.

[앵커]

지금 벌써 한 40여년이 지났지 않습니까?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파병 가서 전투를 하신 것에 대해서 나는 그 결정을 잘했다라고 손주나 다른 후손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어떻습니까?

[인터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제가 월남에 파병을 해서 집안의 어려운 문제들도 다 해결되고 내가 받는 전투상대를 가지고 동생들이 대학을 다니는 데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지금 몸도 멀쩡하고 다친 데도 없고 그리고 3성 장군까지 되고 대학 교수도 하고 대사도 하는 이런 영광을 가졌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월남전투가 저한테 가르쳐준 게 있어요.

소대장, 중대장을 할 때 저는 전투만 했는데 전쟁이라고 하는 건 대통령과 정치가 하는 거고 거기는 휴전이라고 하는 무승부가 있어요.

그러나 군인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하는 거는 전쟁이 아니고 캄베트, 전투라고.

전투는 서로 죽이려고 하는 두 개 집단이 꽉 부딪쳐서 죽이기 시합을 하는 게 전투더라고요.

그래서 거기는 부모, 형제도, 친구도, 애인도 일가친척도 아무도 없고 오직 전우밖에 없어요.

그래서 평소에 전우를 하느님 이상으로 잘 모시고 서로 정성을 들이고 신뢰가 오고 갔을 때 그 전우들과 함께 나타나는 전투력이 최상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요근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들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평소 구박하고 업신여기고 가혹행위를 하는 전우는 적이 몰려왔을 때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도망간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신뢰가 오고 가고 정성이 오고 간 전우애가 최고의 전투력인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가혹행위, 구타 이런 것들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암적인 존재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후배들이 그런 부분 잘 정리해 줬으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앵커]

사실 그거는 문제의 일각이죠, 사실 대부분의 군대에서는 가혹행위라기보다는 정말 그런 전우애를 가지고 있는 군대가 훨씬 더 많고 뉴스가 되다 보니 그런 게.

하지만 선배로서 많은 지금의 뉴스에 대해서 많이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얘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방송 보는 우리 후배 군인들이 잘 새겨 들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월남전이 그때 파병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고 파병에 대한 어떤 전환점, 이런 것들이 됐었죠?

[인터뷰]

파병시마다 논란이 있었습니다.

월남전 때도 그랬는데 제가 보기에는 2004년도에 이라크에 자이툰부대를 보낼 때 그때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지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에 우리 정부로서는 아무래도 파병에 대해서 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게 됐죠.

그런데 지난 2010년에 UN평화유지활동 참여에 관한 법률이 생겼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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