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윤성은의 영화이야기] 고(故) 안성기와 가장 멀었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26.01.13 오후 02:37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Nowhere to Hide)│1999
감독 : 이명세 │ 주연 : 박중훈, 안성기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포스터


‘국민배우’라는 수식어는 식상하다. 그러나 그만큼 고(故) 안성기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형용사도 없을 것이다. 그는 ‘황혼열차’(1957)에서 아역배우로 데뷔한 후 약 68년간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다섯 차례나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 유일한 배우다.

한국영화사 안에서 그의 출연작들이 가지는 의의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김기영의 (1960)는 한국영화 명작선에서 가장 먼저 언급될 만큼 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1980)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리얼리즘의 선봉에 선 작품이었다. (1981)는 불교를 통해 한국 영화의 주제를 존재론적 탐구의 영역으로 확장시켰고, (1982)은 빈곤의 일상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리얼리즘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1987)은 지고지순한 주인공을 통해 남성 멜로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꿈과 현실을 뒤섞어 놓은 (1989)은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영화로서 일찌감치 코리안 뉴웨이브를 예고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안성기가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등 거장들이 선택한 배우로서 동시대의 얼굴을 보여주는 페르소나였다는 것이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한편,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는 전세계로 이어진 작품의 인기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안성기를 말할 때 거의 언급되지 않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캐스팅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감독 시절 이미 6편을 안성기와 함께 했고, ‘개그맨’, ‘남자는 괴로워’(1995) 등 자신의 연출작에서도 호흡을 맞춰왔던 이명세 감독은 안성기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연쇄살인마 역을 제안했다. 안성기는 고심 끝에 출연을 고사했고, 낙담한 이명세 감독은 그에게 후배들에게 격려의 인사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 당일, 안성기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이 이 영화에 출연한다고 말했고, 이명세 감독은 너무 기뻐서 양복을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안성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장성민’처럼 본격적인 악역을 맡았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성민은 출연분량도 적고, 대사도 거의 없는 조연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안성기의 필모그래피에서 꼭 다뤄져야 할 작품이다. 존재감의 차원에서 그를 대체할 연기자가 없던 시절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성민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장성민은 오프닝 크레딧 이후 첫 신에 등장한다. 거리를 온통 뒤덮은 은행잎이 빗줄기에 젖기 시작하고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흐를 때, 장성민은 살인을 저지른다. 대사 없이 강렬한 미장센과 음악으로 처리한 이 신은 살인의 비정함과 살인마의 카리스마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다음 장면, 단골 고깃집에서 강력반 형사 ‘영구’(박중훈)는 장성민에게 라이터를 빌리지만 그가 범인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렇게 장성민은 얼굴 없는 범인이 되어 오랫동안 종적을 감춘다. 사실 감독은 이 두 개의 신에서 안성기의 얼굴을 몇 번이나 클로즈업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신비로움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유지된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결투신, 장성민과 영구가 빗속에서 주먹 싸움을 하는 장면은 잘 알려진 바대로 워쇼스키 자매가 ‘매트릭스’에서 오마주했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형사와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되는 살인범의 대결이 숨 막히게 펼쳐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어슴프레한 새벽의 장대비 속, 대칭적 구도 안에서 영구의 주먹 때문에 일그러진 장성민의 측면 얼굴이 확실하게 보이는 이 샷은 전에 없던 영화적 경험을 선사했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장성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감정이입도 허락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설득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절대악으로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다. 어쩌면 그 차가운 거리감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장성민이라는 캐릭터는 국민배우로서 안성기가 자신의 편안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해체하려 했던 과감한 시도이자 성공적 결과였다.

이제 고인이 된 대배우를 추모하기 위해 다소 의외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세기말에 등장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4050세대 뿐 아니라 2030세대에게도 생소하지 않고, 비교적 공감대가 넓은 영화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일생을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데 바쳤던 그가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도한다.



▲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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