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안녕하십니까?
디자인 360의 모니타 라즈팔입니다.
저는 지금 유럽의 패션 수도, 파리, 그 중에서도 고급 상점이 즐비한 쇼핑가, 플라스 벤돔 (Place Vendome) 에 와 있습니다.
랑방(Lanvin)은 프랑스 최초의 디자이너 브랜드로, 전성기땐 코코 샤넬에 버금가는 명성을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빛이 퇴색했고,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젊은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한 명인 알베르 엘바즈 (Alber Elbaz)가 맥빠진 기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계 미국인인 엘바즈는 최근 두 번째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는데, 그의 옷은 이미 전세계 패션 매장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벌써부터 그의 차기 콜렉션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입니다. (원음 그대로)"
알베르 엘바즈의 재능을 높이 산 랑방은 2001년 말,그를 랑방 디자이너실의 최고 책임자로 전격 기용했습니다.
"랑방이 뭘 잘못했는 지를 찾아내는 것보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명성을 유지하게 한 장점을 찾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패션일을 그만두고 의대를 가려고 하다가 2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에 랑방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다시 패션일에 뛰어들면서 이번에는 내 방식을 고집하겠다는 의지를 굳혔습니다. 상업주의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자고 결심했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랑방의 맥을 되찾는 게 엘바즈에게 떨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쟌느 랑방(Jeanne Lanvin)이 1889년 창립한 랑방은 백 년간 개인소유 브랜드로 남아있다가 화장품업체 로레알이 인수한 후, 10년 뒤 민간 투자자들에게 팔렸습니다.
"이 쪽 업계에는 주인이 바뀌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것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지만, 저의 경우는 다릅니다. 저는 과거와 역사를 존중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사진에 잘 나오는 패션과 시장 반응이 좋은 패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으론 멋지만 실생활에서 쓸모없는 작품은 개인적으로 거부합니다."
랑방의 르네상스를 주도하기 전인 90년대 엘바즈는 한때 미국인 디자이너, 제프리 빈과 기라로쉬에서 일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이 98년 리브 고쉬 브랜드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자신의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엘바즈에게 맡겼지만, 이브 생 로랑 브랜드가 구찌 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엘바즈는 그만뒀고, 그 후 랑방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랑방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때, 엘바즈가 나타나 아름답고 클래식한 옷들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 옷들은 소화하기가 쉬운 편이었습니다. 케이트 모스 같은 몸매를 가지지 않아도, 누구나 아름답고 우아한 이 옷들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유행에도 너무 민감하지 않은 옷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새 디자이너를 영입하면, 추가로 이목을 끌 수 있습니다. 언론이나 사람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그 브랜드의 새로운 면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건 에르메스가 시도하는 전술이기도 합니다. 장 폴 고티에는 최근 파리에서 열린 기성복 콜렉션에 참가해, 이같은 추세에 동참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보수적인 브랜드와 이국적인 디자이너가 손을 잡은 것은 위험한 결합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비평가들은 고티에가 에르메즈의 현대화와 혁신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맞췄다는 데 동의합니다.
"기존의 브랜드를 재창조하는 데 있어, 새로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브랜드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이를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출 수 있는 현명한 디자이너가 필요합니다. 고티에와 에르메스의 경우, 에르메스는 굉장히 오래된 브랜드로, 딱딱하고 보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티에는 너무 빨리 현대화를 추진해 오히려 실패했던 마틴 마르젤로와는 달리, 오랜 시간 쌓아왔던 에르메스 고유의 무늬를 버리지 않고 이를 현대화했습니다."
에르메스의 장 폴 고티에와 랑방의 알베르 엘바즈 앞에 놓인 과제는 기존의 브랜드 안에서, 자신만의 특징을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 그림은 보티첼리의 것이고, 이 그림은 다 빈치가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화가의 필체를 보고, 자신의 짐작을 확인합니다. 패션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드레스를 보면, 이것이 베르사체인지, 구찌인지, 프라다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브랜드가 갖고 있는 각기 다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제가 만든 옷을 보면, 랑방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에겐, 너무나 기분좋은 말이지요."
[앵커멘트]
물론, 패션계에서 가장 놀랍게 부활한 브랜드는 구찌입니다. 디자이너 톰 포드가 90년 구찌에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회사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포드는 구찌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고, 파리 세느강의 왼편을 뜻하는 리브 고쉬에서 이름을 딴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쉬 브랜드를 통해, 패션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들 브랜드의 화려한 컴백을 주도한 포드의 능력과 비젼을 알아봅니다.
리브 고쉬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센강의 좌안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센강 동쪽 지역이 주택가와 고급 번화가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좌안은 젊은이들과 학생층의 주요 활동 무대이다. 패션의 중심지도 원래는 센강 동안이었으나, 최근들어 젊은층을 상대로 한 부띠끄 매장과 쁘레 타 포르테 등이 진출하면서 좌안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이다.
"떠나게 되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 혼자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저에게 가장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톰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재능을 소유한 디자이너입니다. 여기에 날카로운 사업 통찰력까지 갖고 있는 훌륭한 디자이너이지요."
"구찌의 톰 포드입니다."
"현대적이면서도 균형잡힌 룩을 추구합니다."
"구찌에 새로운 변화를 덧입혔습니다."
"또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인물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성공할 겁니다."
"웃긴 일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앵커멘트]
80년 넘게, 찰스 쥬르당이란 이름은 멋진 구두와 동일시됐습니다. 최초의 국제적인 성공은 50년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사무실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쥬르당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재정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때, 패트릭 콕스가 회사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쥬르당 공장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엄청나게 큰 신발이 로마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디자이너 패트릭 콕스가 찰스 쥬르당 브랜드를 맡아,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구두 제조 공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런던과 프랑스 남부를 오가며 일합니다. 때로 그는 공장에 보관돼 있는 여러 디자이너들이 만든 수천 켤레의 구두에서 영감을 얻곤 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두 디자이너이자, 제가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앙드레 페루자입니다. 그는 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여기서 일했는데, 이 곳에 그가 만든 여러 구두들이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자, 발명가였습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디자이너에 관해 말하곤 하는데, 이처럼 기술적 노하우와 예술적 감성이 동시에 사용된 경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페루자는 장인일지 모르지만, 콕스는 수습생이 아닙니다. 그는 20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습니다. 콕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남성과 여성용 구두를 판매했고, 워너비(Patrick Cox Wannabe)라는 브랜드도 시작했습니다. 90년대, 워너비 로퍼로 패트릭 콕스는 본격적으로 구두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년 전 쥬르당이 콕스가 거둔 성공을 그대로 뒤쫓기 위해, 그를 영입하게 됩니다.
"오늘날 프라다의 명성과 비교하면, 지난 6,70년대 쥬르당은 프라다와 구찌, 루이뷔통을 전부 합친 것과 같은 명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패션 구두였지요. 지난 30년간 놀라운 구두를 선보여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신고 있었을까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꼬여 있습니다. 미스탱게가 1948년에 만든 겁니다. 중국인의 발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 구두를 신으면, 발이 굉장히 작아야 합니다."
쥬르당 공장은 1921년부터 프랑스 남부에 있으면서,디오르와 라거펠드 브랜드도 함께 취급해왔습니다. 지금도, 600명의 직원들이 이 공장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쥬르당이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재개를 위한 마지막 노력인가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모습이 될 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강한 개성을 갖고 계신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회사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까?"
"특히 일본이나 러시아에 가면, 쥬르당이 굉장히 보수적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 왜 저를 고용했냐고 묻곤 합니다. 그리고 구두가 왜 이렇게 변했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쥬르당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30년대 찰스 쥬르당은 첨단 유행의 구두를 많이 내놓았습니다."
"메탈 분위기가 강합니다. 찰스 쥬르당의 스타일입니다. 80년대 중반, 회사가 계속 커지면서,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구두에 더 많은 초점을 맞췄습니다."
"왜 본인을 고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브랜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요즘 추세에 맞는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기 전엔, 15명의 사람들이 디자인한 구두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랬구요.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길 원합니다."
이젠, 찰스 쥬르당의 콜렉션이 패트릭 콕스입니다. 그는 매달 일주일을 로마에서 보내면서, 종이 위의 디자인이 완벽한 구두로 만들어지는 지를 체크합니다.
"기본틀만 제대로 갖춰지면, 이를 토대로 어떤 모양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구두 전문가로, 관련된 기술을 모두 익혀야 합니다. 저는 우선 구두 앞부분과 힐 높이를 정하고, 옆 부분을 생각합니다.그러다가 뭔가가 떠오르면, 이들이 여기에 맞춰서 구두를 만듭니다. 이 구두는 미국 사이즈로 70입니다. 유럽 사이즈로는 37이지요. 이것이 기본 밑창이 됩니다."
패트릭 콕스는 앞으로 2년 더 찰스 쥬르당을 맡을 예정입니다. 쥬르당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게 될 지 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앵커멘트]
20년대 파리에 거주하는 부유한 여성들 사이에선,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미노디에르(Minaudiere)가 큰 인기였습니다. 보석 세공인 밴 클리프 앤드 아펠스가 만든 미노디에르는 이브닝 백 대신 소지품을 넣어다니는 또다른 방법이었습니다. 요즘 빈티지가 인기를 모으고, 오래된 것이 다시 시선을 끌면서, 미노디에르가 또다시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사용하는 멋쟁이 여성만큼이나 우아한 제품입니다. 멋을 아는 여성이라면, 소지품을 주머니에 넣어 옷선을 망가뜨릴 수 없기 때문에, 미노디에르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보석 세공의 장인으로 통하는 밴 클리프 앤드 아펠스가 디자인한 미노디에르는 패션감각이 있는 여성들 사이에서 필수품이었습니다.
"루이 아펠스는 유명한 미국 여성인 플로랑스 제이굴트와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아펠스가 플로랑스가 파티에 필요한 물건들을 굉장히 더러운 금속 상자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왜 이걸 갖고 다니냐며, 이걸 어떻게 파티에 들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노디에르를 발명한 겁니다."
보석 상자로도 쓸 수 있는 이 가방은 칵테일 파티에 빠질 수 없는 악세사리가 됐는데,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습니다.
"미노디에르는 사전에서 한 단어로 찾아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관심을 끌다라는 뜻의 미노디에르는 이걸 들고 다니는 사람의 성격도 보여줍니다. 미노디에르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건 1937년에 만들어진 미노디에르입니다. 당시엔, 파티가 열리는 동안,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굉장히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미노디에르는 립스틱을 바르는 척하면서, 조심스럽게 시계를 볼 수 있도록 고안됐습니다. 조그만 악세사리도 넣을 수 있습니다."
이건 현대 여성을 위한 미노디에르입니다. 새로 나온 한여름밤의 꿈 콜렉션입니다.
"시계와 일정표, 펜, 휴대폰 등을 넣을 수 있습니다."
"2004년에 사는 현대 여성이 들고 다니기에 적합한 제품입니다."
정교한 제품인만큼 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97,000 달러 정도입니다.
"굉장히 감각적이고, 갖고 놀 수도 있습니다. 요술 상자 같은 거지요."
[앵커멘트]
여기는 몽마르뜨입니다. 파리에서도 예술의 거리로 통하는 이 곳은, 프랑스 전통 엔터테인먼트와 함께,너무나 유명한 물랑루즈 클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랑루즈의 자매 클럽인 리도에선, 1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쇼가 선보이고 있습니다. 리도의 재기를 노리고,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웅장한 쇼입니다. 과연 리도 클럽이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프랑스 카바레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역사적으론, 19세기 말에 처음으로 대형 리뷰(review)가 등장했습니다. 그 후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멋진 쇼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라스베가스에선, 리도 쇼가 1958년에 처음 등장해 프랑스의 묘미를 전해줬습니다.
원류는 프랑스 중세의 소극(笑劇)을 모체로 하여 19세기 말에 파리의 카바레 등에서 많이 상연되었던 풍자적인 쇼에 있다고 하나, 같은 때에 영국에서도 뮤직홀이나 소극장에서 비슷한 것이 상연되었다.
그 후 프랑스에서는 카지노 드 파리와 같은 큰 뮤직홀에서 채택되어 발전,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국제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또 군무(群舞)에 의한 무희의 섹스어필에 주안점을 둔 연출이 성행하여, 현란(絢爛)한 대(大)리뷰의 유행기를 맞이하였다.
가수 모리스 슈발리에, 조세핀 베이커 등을 배출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1930년대를 고비로 점차 쇠퇴, 카바레나 나이트클럽 등에서 소규모로 상연되는 일이 많아졌다.
"우아함과 화려함, 출연진의 재능이 어우러진 이런 프랑스 뮤지컬 쇼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항상 새로운 것을 제공했습니다."
파리 리도 클럽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바로 행복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쇼입니다. 리도 클럽은 지난 60년간 프랑스 카바레를 선보여왔습니다. 최근 무대에 올린 쇼에는, 리도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11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됐습니다.
이번 쇼를 보고 느낀 것은, 고객들이 무대 공연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쇼에서부터 동성애와 새디즘이나 매조키즘에 관한 쇼 등 다양한 개개인의 성적 취향을 다룬 쇼가 선보였는데, 사람들은 물론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지만, 이는 분명 문화의 일부입니다.
이 쇼의 정수는 소프트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관능성이지요. 일반적인 무용이나, 공연, 극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아니지만,여기선 무엇보다 관능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합니다.보기에도 즐겁고, 흥미를 자아내니까요.
리도는 1946년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그 후 당대 유명 인사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6년간 리도 클럽의 소유주는 변하지 않았지만, 고객들은 바뀌었습니다. 유명 인사들의 자리를 관광객들이 체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3대째 이어져 온 리도의 현재 소유주들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쇼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힘든 시기를 벗어났기 때문에, 부담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최대한 훌륭한 쇼를 선보이고,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관객들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장 파리적이면서도 특수 효과를 갖춘 현대적인 쇼를 찾는 외국인들의 요구도 충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자본의 투자와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히 조화시킨 노력이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웰컴 투 월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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