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이 그린 한국 산의 매력 알릴 겁니다"…동양의 선과 여백에 알프스 담는 한인 화가

에메랄드빛 푸른 물결을 자랑하는 레만 호수.

호수 주변으로 드넓게 펼쳐진 산줄기가 감탄을 자아내는데요.

스위스 절경이 한 폭의 그림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 간결한 선과 은은한 색채.

스위스에서 '산을 그리는 100인'에 선정된 드몰 박지영 화가의 전시회입니다.

[드몰 박지영 / 화가 : 레만 호수 주위의 산들과 호수, 어떨 땐 호숫가에서 바라본 산들, 어떨 땐 산등성이 위에서 바라본 산들을 그린 풍경입니다.]

[로뮤알드 베지 / 스위스 제네바 : 산이나 산맥의 윤곽을 매우 정밀한 선으로 그리는데 우리가 여기서 쉽게 보지 못한 느낌을 줍니다.]

[박소영 /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스위스 통신원 : 평안하고 고요하고 또 묵상하는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그래서 유럽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지영 씨는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조형예술을 공부한 뒤 미술교사로 2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당시 예술학교에서 만난 프랑스 남편과 세 자녀를 낳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죠.

누구나 꿈꾸는, 평범하고 안정된 삶.

그런 지영 씨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 건 여행길에 마주한 알프스산맥이었습니다.

[드몰 박지영 / 화가 : 레만 호수 부근으로 여행할 때 보이는 산과 호수가, 호수는 바다 같고 산은 하늘에 떠 있는 섬 같기도 하고 너무 아름답잖아요. 어찌 제가 안 그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지영 씨는 든든한 지원군인 남편과 함께 알프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등산 강행군에 때론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광활한 대자연을 화폭에 담는 순간엔 다시 가슴이 뛰는 듯 설레죠.

지영 씨 작품의 특징은 명암과 원근을 강조하는 서양 화법과 선과 여백이 미덕인 동양 화법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크로키로 빠르게 윤곽을 그린 뒤 수묵담채를 기반으로 색을 입히는 거죠.

[드몰 박지영/ 화가 : 저는 많은 크로키를 하고 선으로 표현하고 수묵담채화 기법으로 간단한 색으로 많은 뉘앙스를 줘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서 많은 유럽 사람이 이런 여백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많은 상상을 유도한다고 하시고 제가 의도한 게, 호수를 그리지 않아도 다 호수인 줄 알고….]

동양의 시각으로 녹여낸 스위스 산은 유럽인들에겐 이색적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공간을 채워 넣는 서양 화법에 익숙했던 이들이 여백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 거죠.

스위스 공영방송에서도 지영 씨 작품을 집중 조명할 만큼, 현지에서 산을 그리는 화가로서 입지를 단단히 다졌습니다.

[마리아 모니카 / 스위스 제네바 : 박지영 화가의 작품들은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림 자체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죠.]

[드몰 로돌프 / 남편 : 아내는 화가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친숙한 풍경화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인 거죠. 이 부분이 그녀만의 강점입니다.]

지영 씨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자 조선의 대표 화가인 겸재 정선.

정선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어, 최근에는 한국 산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인왕산과 북한산, 설악산 등 알프스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간직한 고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고 있는데요.

[드몰 박지영 / 화가 : 중국의 문인화, 산수화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작가들이 많은데 겸재 정선은 정말 진경산수를 하면서 한국 산천을 그리신 분이에요. 그 발자취를 밟고 싶어서, (정선은) 철원의 삼부연 폭포를 그리셨는데 거기도 그래서 2월에 가게 됐어요. 특히 인왕산 그림 그릴 때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겸재 정선을 다시 공부하게 됐어요.]

지영 씨의 새로운 목표는 한국 산의 아름다움을 유럽 사회에 널리 알리는 것.

연말에는 한국과 스위스 수교 60주년을 맞아, 고국의 산과 겸재 정선을 소개하는 전시회도 열 예정입니다.

[드몰 박지영 / 화가 : 저의 알프스 진경산수화와 한국의 아름다운 산들을 소개하려고 해요. 3백 년이 지나고 (살아온) 대륙이 다르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느낀 점, 표현한 점, 그런 게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오마주가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