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100년전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제병합하는 과정에서 한국측 서류가 흠결투성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절차상 결함으로 말하면 일본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일본 추밀원 의결과 일본 국왕 재가 없이 테라우치 한국 통감이 자의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정황은 새롭게 조명돼야 할 부분이라는 지적입니다.
왕선택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호시탐탐 한국 병합을 노려오던 일본이 병합을 위해 행동에 착수한 시점은 1910년 8월 16일.
병합을 진두지휘한 테라우치 한국 통감은 병합 이후 본국에 제출한 상황보고서에서 한국의 이완용 총리대신을 불러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한 8월 16일을 결정적 순간으로 지목했습니다.
[인터뷰: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완용을 강제병탄과 관련해서 직접 만난 이후에 병합조약이 체결이 되는 22일까지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급속하게 철저하게 조율된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8월 22일 오전 11시, 한국 대신 2명이 테라우치 통감의 요구에 따라 순종황제를 만나 30분 동안 병합 조약 체결에 협력할 것을 설득했습니다.
문제는 일본 추밀원에서 병합에 대한 안건 논의가 11시 45분에야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의회에 해당하는 추밀원 의결에 이어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은 문서가 3, 4시간 이내에 서울로 전달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조약체결은 오후 4시에 강행됐습니다.
일본 외무성 당일 전통문을 분석하면 추밀원 의결 결과가 서울로 전해진 것은 조약 체결 이후인 저녁 6시쯤으로 추정되고 일본 국왕의 전권 위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습니다.
[인터뷰: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추밀원 회의를 거쳐서 천황의 재가를 받기도 전에 이미 국내에서는 테라우치가 사전에 만들어진 조약안을 갖고 오후 4시에 임의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절차상 문제도 분명하게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순종황제의 전권위임장을 합법성의 증거로 제시해온 것과 비교하면 정면으로 모순되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일본은 당시 기준으로는 성공적으로 한국 병합에 성공했지만 갖가지 모순점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결국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불법 병합 때문에 이웃나라로부터 비난과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불법 부당한 강제병합은 한국민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겨줬지만 일본인에게도 영원히 풀기 어려운 치욕의 굴레를 씌운 셈이 됐다는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YTN 왕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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