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영섭 / 6·25 종군기자 동우회장
[앵커]
7월 27일, 오늘은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정전협정기념일입니다. 63년 전 이날 전쟁은 중단이 됐지만 남북의 대치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한국 최초 종군기자로 6.25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 보도한 한영섭 6.25 종군기자 동우회장을 모시고 당시의 참상을 들어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정전협정기념일 바로 그 날입니다. 정전협정 서명식, 그때도 취재를 하셨다고요?
[인터뷰]
네. 7월 27일이죠, 1953년. 그때 정전회담이 그동안에 한 500회 열렸었어요. 500회 열렸는데 그게 최종적으로 타결이 돼서 판문점 회담장에서 양측 대표들이 조인을 했죠. 그런데 조인 현장에는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전쟁을 하면서도 교전당사국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서 전국민들이 휴전을 반대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가 된 거죠, 한국 대표가.
[앵커]
우리가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아니었죠.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조인 현장에는 한국 기자도 2명밖에 못 들어가고 주로 사진기자가 들어가고 저는 회담장 밖에 유리창너머로... 말을 해야 하니까, 마이크에다 대고 말을 해야 되니까 녹음을 합니다마는 회담 조인장에서는 얘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유리창너머로 보면서 얘기를 하고 그렇게 조인을 했죠.
그런데 조인을 하는데 양쪽 대표가 UN측에서는 헤리슨 중장 그리고 북쪽에는 남일이 나와서 했는데. 출입구가 각각 달라요. 각각 다른 출입구로 들어와서 눈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반대쪽 책상에서 조인을 하고 그랬죠. 그러고서 조인 끝나고 나서도 쳐다만 보고 그냥 나가고 그랬죠.
그런데 최종 조인은 UN군 사령관이 해야 되고 저쪽은 김일성이 해야 되는데 UN군 사령관은 한 3시간 후에 문산에. 판문점에서 문산이 가까우니까 문산의 한 극장에서 최종 조인을 했어요. 그때는 UN 종군기자 포함해서 100여 명의 기자들이 조인장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기자회견도 하고 그랬죠. 그게 최종적으로 조인을 하는 거였죠.
[앵커]
그 현장을 직접 보셨는데요. 그런데 6.25 전쟁이 발발했었던 그 당시의 상황도 처음으로 뉴스를 전하셨다고요?
[인터뷰]
네. 25일 새벽이었어요. 방송국에서 긴급히 전화가 와서 빨리 좀 나오라고. 집에서, 그때 방송국은 정동에 있었으니까 집이 종로여서 뛰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데인데. 가보니까 국방부 장교가 가져왔다는 메모인데 휴가 중인 장병들은 빨리 귀대하라는 얘기였어요. 그런데 그 전날 농번기라고 해서 전군에서 장병들을 휴가를 보냈어요. 심지어 같은 지역에는 트럭까지 동원을 해서 귀향을 도와주고 있는데 전날 귀향을 시키고 다음 날 새벽에 귀대를 하라면 말이 안 되죠.
[앵커]
그러니까 전쟁이 났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귀대를 하라는 메모를 받으신 거군요?
[인터뷰]
38선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얘기하고 그 얘기예요. 그래서 38선에서는 충돌이 자주 있었어요. 그리고 또 그때마다 국군들이 격퇴를 하고 많은 노획물자를 전시도 하고 해서 전쟁만 있으면 항상 국군이 이기는 것으로 국민들이 알았어요. 그게 결국 나중에 28일에 서울을 인민군이 들어올 때 많은 시민들이 후퇴를 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마는.
[앵커]
전쟁이 일어날 쯤에는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자주 있어 왔고 이게 6.25으로, 큰 전쟁으로 이어질지는 사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알 수는 없었겠네요?
[인터뷰]
그렇죠. 알 수는 없었는데 그래도 심상치가 않아서 휴가 나간 장병들을 속히 귀대하라고 하는 거라면 보통일이 아니다 싶어서 바로 국방부 정훈국이 명동의 증권거래소 자리에 있었어요. 정동방송국에서 거기 10분 거리니까 바로 갔더니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계시더라고요. 그분이 나중에 문교부 장관도 한 사학자죠. 그런데 그분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전면전인 것 같아,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군에 대한 뉴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의논을 해서 기사를 쓰고 또 뛰어가서 방송국에 가서 뉴스 원고를 가지고 임시 뉴스로 방송을 6시 45분 정도에 했어요. 그런데 방송이 그때 7시에 정규방송이 시작을 해요.
그래서 30분 전에는 타령이라든가 음악방송을 내보내는데 그걸 끊고서 내고 7시에 좀더 자세한 뉴스를 내고 그랬죠. 6.25 전쟁이 일어난 것을 제일 먼저 보도한 건 요즘은 UPI입니다마는 나중에 INS로 합쳐서 그당시 UP 빌 제임스라고 하는 기자인데 미국대사관 앞에서 무초 대사를 만나서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붙잡아서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묻고 그 얘기를 듣고서 바로 타전을 했죠. 그래서 전세계에 타전을 가장 먼저 한 것은 UP고 그리고 국내에서 뉴스를 낸 것은 그때 KBS 하나뿐이었으니까 방송을 했죠.
[앵커]
국내에서 전해진 것은 외신에 나간 것보다는 늦었겠네요, 좀.
[인터뷰]
조금 늦었죠. 1시간쯤 늦었습니다.
[앵커]
지금 우리나라 최초의 종군기자이신데요. 종군기자, 어떻게 해서 하시게 된 겁니까?
[인터뷰]
제가 KBS에 입사한 게 1949년이에요. 그러니까 전쟁 나기 한 해 전이죠. 그때 기자로 들어가서 한 6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그리고 반민특위라고 해서 일제시대 때 친일한 사람들을 단죄하는 그런 특위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국방부 출입하던 기자가 신문사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제가 1949년 8월부터 국방부에 출입을 하기 시작했죠.
[앵커]
지금 사진으로 계속, 화면에서는 사진으로 계속 보여드리고 있는데요. 지금 한 회장님의 모습이죠, 이게?
[인터뷰]
네.
[앵커]
방송국에서 근무할 당시의 모습 것 같은데요?
[인터뷰]
네, 그렇습니다. 저게 전쟁 중에 1952년도인가요? 그때 남원 일대, 지리산 일대에서 공비 1000명이 준동을 했었어요. 토벌작전을 하고 남원에도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남원에 있는 어린이들한테 구호물자를 전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요청이 와서. 마침 그때는 미군사령부 심리전과에서 군인들이 와서 뉴스를 제작하는 것을 도와주고 했었어요. 그래서 미군 파견 장교한테 부탁을 해서 구호물자를 트럭에 싣고 남원으로 갔죠. 남원에 가서 전달하는 장면이었어요.
[앵커]
그렇군요. 종군기자로 활동을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고 또 정전협정을 맺는 것까지 다 보셨는데 그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아무래도 흥남철수 때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때 기억을 잠시 살려보면 그때 상황이 어땠습니까? 어떻게 그쪽에 가게 되셨고. 직접 목격을 하신 거죠?
[인터뷰]
물론이죠. 10월 1일부터 국군이 북침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가지고 10월 10일에 원산을 우리 손에 넣고 17일에 흥남, 함흥 그 지역을 우리 국군이 장악을 했죠. 그리고 또 아시다시피 평양은 그 이틀 후인 19일에 우리 국군이 들어가고 했는데. 아주 파죽지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청진까지 저는 올라갔죠. 청진에 올라가서 청진방송국에서 뉴스를 보내고 했었는데. 31일 밤을 자고 나서 11월 1일에 전 전선에서 철수명령이 난 거예요. 그래서 흥남에 집결해서 거기서 해상으로 철수를 해야 된다는 작전명령이 내려와서 그냥 바로 흥남으로 집결을 했죠. 집결을 했는데 철수작전이 그때 작전지휘권이 미10군단에 있었고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그런 10군단 예하에 있었습니다마는. 가서 상황을 보니까 그 당시에 1군단이 그쪽으로 갔는데 수도사단하고 3사단하고 북진을 한 부대가 거기입니다. 동부전선입니다.
[앵커]
중간에 그러니까 퇴로가 막히면서...
[인터뷰]
그런데 철수 작전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로 했어요. 그런데 이미 국군부대들은 다 흥남에 집결했으니까 철수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는데 문제는 장진호까지 올라간 미 해병 1사단하고 7사단이 거기에서 중공군 1개 사단이 3개 사단에 포위돼서 아주 악전고투를 하면서 후퇴를 해야 하는데 그 후퇴하는 시기를 기다려서 24일까지가 정해진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군대하고 장비만 철수하는 걸로 알몬드 소장이 정해 놓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작고했습니다마는 지금은 작고했습니다마는 김백일 1군단장이 수도사단장하고 함께 알몬드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그래요. 완강해요. 군대가 우선이라고. 그래서 김백일 장관이 거기에서 버텼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북에 들어갈 때 거기 있던 주민들이 몇 만 명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함흥에서도 그렇고 청진에서도 그랬는데 그 사람들을 버리고 갈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은 다 죽는 것 아니냐. 다 보복당해서 죽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차라리 그때는 중공군이 이미 원산까지 장악을 했어요, 낭림산맥을 통해서. 그러니까 육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상태죠. 그래서 해상후퇴로를 했던 겁니다마는 그 당시에 사단장들이 아주 비장하게 거기서 얘기를 했어요. 우리 군인들은 전투를 하면서 원산을 통해서 후퇴해서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육로를 통해서 후퇴를 할 테니까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라고. 그래서 알몬드 소장이 대답을 안 하고 좀 기다려 달라고. 한 3시간 후에 만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김백일 장관이랑. 그런데 그 사이에 알몬드 장군이 정찰기를 타고 흥남부두를 돌아봤나봐요. 돌아와서 좋다, 그러면 장비를 실을 여력이 있으면 거기에 태워주겠다.
[앵커]
장비들을 그러니까 싣지 않고.
[인터뷰]
장비는 방어선을 구축을 하려면 우리가 다시 삼척으로 내려왔습니다마는, 나중에. 그래서 방어선을 구축하려면 차량이나 장비들은 있어야죠. 그래서 필요한 장비만 갖추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고라도 피난민을 태우자. 알몬드 소장의 결정은 협조는 아주 적극 적이었어요. 그래서 우선 피난민들을 LST라고 하는 한 7000톤가량 되는 겁니다. 그 배가 한 190척이 흥남항에 들어와 있으니까 배는 빽빽하죠.
그런데 LST 이외의 함선에는 줄사다리가 있어서 그걸 타고 올라가야 돼요. 그러니까 바다면에서 흑수선이라고 합니다마는 그 배 위까지 올라가려면 한 20m는 올라가야 해요. 그래서 노인이나 노약자들은 LST에 태워서, 큰 배들은 부두가 없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해요. 흥남이 아시다시피 비료공장을 위해서 하역을 하기 위한 항구였거든요. 그러니까 부두가 없죠. 그래서 조그마한 배를 태워서 큰 배에 올라타게 하고 그런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아비규환이죠.
[앵커]
종군기자로 활동을 하셨으니까 전쟁의 참상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이제 벌써 전쟁이 끝난 지도, 정전협정이 있었던 것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에, 63년 전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 세대가 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좀 드리고 싶은데. 더 자세한 얘기는 오늘 여기서 듣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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