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등 번호 22' 이란 유니폼이 사라지는 이유 [와이파일]

2022.11.26 오후 08:08
'22번'과 '아미니' 이름이 새겨진 이란 대표팀 유니폼 / AP연합뉴스
이란과 웨일스의 2022 카타르월드컵 B조 조별리그 경기가 열린 지난 25일 아흐마드 빈 알리 경기장.

얼굴에 검붉은 눈물을 그린 이란 여성 팬이 관중석에서 이란 대표팀의 유니폼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순간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빠르게 반응했습니다. 유니폼엔 등 번호 22번, '마흐사 아미니'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난 9월 이란에서 히잡 사이로 머리카락이 보이는 등 복장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이후 의문사한 이란 여성의 이름과 나이(22살)입니다.

잠시 후 경기장 보안 요원이 그녀에게 다가와 유니폼을 압수해갔습니다. 이란의 경기가 열리는 월드컵 경기장에선 이런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경기장 입장을 위한 보안 검색에서 팬들이 가져온 유니폼이나 응원 깃발에 '아미니' 이름이 새겨져 있으면 바로 압수 조치가 이뤄집니다.

이 뿐만 아니라 '여성, 자유' 같은 문구 역시 압수 대상입니다. 정치적 문구라는 이유인데 카타르 정부의 지시인지, 아니면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지시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란계 미국 여성은 영국 과 인터뷰에서 "'여성(Woman)'이라고 쓰인 깃발을 경기장 보안 요원에게 압수당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여성의 자유'를 촉구하는 이란 팬들 / AP연합뉴스

아미니의 죽음 이후 이란에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여성과 어린이, 변호사, 언론인 등 평화롭게 시위하던 이들 수천 명이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최근 어린이를 포함해 사망자가 더 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일부 인권 단체들은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이란 정부의 강경 진압을 이유로 피파가 이란의 월드컵 출전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피파는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카타르의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에 대한 인권 문제에 대한 대응과 마찬가지로 이란 문제 역시 "정치에 휘말리지 말고 축구에 집중하자"는 잔니 인판티노 회장의 성명으로 일축했습니다.


21일 잉글랜드전에 출전한 이란 대표팀 / AP연합뉴스

이란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이란 팬들은 '친정부' 대 '반정부' 진영으로 양분됩니다. 긴장감은 국가 연주 시간 정점을 찍습니다. 지난 21일 잉글랜드와 경기에서 이란 선수들은 국가 연주 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자국 내 반정부 시위에 대한 연대 의사로 해석됐습니다. 이란 관중석에선 환호와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친정부 성향의 팬들은 야유를, 반정부 성향의 팬들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경기장 밖 풍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반정부 성향 이란 팬들이 외국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면 친정부 성향의 팬들이 방해하거나 욕설을 퍼붓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인터뷰하는 사람의 모습을 촬영하는 경우도 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습니다.

이란이 웨일스를 상대로 조별리그 2차전을 치른 25일엔 경기장 밖에서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팬과 정부를 지지하는 팬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25일 웨일스전에 출전한 이란 대표팀 / AP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던 이란의 유명 축구 선수 부리아 가푸리가 정권을 비판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가디언 등 유럽 언론은 가푸리가 카타르 월드컵 이란 대표팀을 모욕하고 반체제 선전을 한 혐의를 받는다고 전했습니다.

가푸리는 이번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지는 않았지만, 과거 국가대표로 활약한 이란의 간판 수비수입니다. 가푸리의 체포 소식은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한 이란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국가를 제창하지 않아 논란이 된 가운데 알려졌습니다.이란 선수들에 대한 이란 당국의 경고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해석에 힘이 실리는 건 이란 선수들의 미묘한 변화 때문입니다. 25일 열린 이란과 웨일스의 조별리그 2차전, 이란의 국가 연주 시간에 이란 선수들은 침묵을 지켰던 21일 잉글랜드전과 달리 일부 선수는 국가를 따라 불렀고 다른 선수는 입 모양을 맞추며 읊조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관중석에선 다시 환호와 야유가 뒤섞여 쏟아졌습니다.


웨일스전 승리 후 환호하는 이란 선수단 / AP연합뉴스

축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란은 웨일스를 2대 0으로 물리치며 조별리그 첫 승을 올렸습니다.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대표팀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무엇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안 바꿨다. 수정한 것은 선수들"이라면서 "선수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축구 생각만 했다. (축구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게 먹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모든 주목과 존중은 우리 선수들에게 향해야 한다"면서 "이제 우리 선수들이 축구를 사랑한다는 걸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미니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들었던 이란 팬 / AP연합뉴스

월드컵은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입니다. 그런 만큼 이란의 반정부 성향 팬들은 월드컵을 통해 이란의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합니다. 반대로 이란 당국은 그런 부분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란 월드컵 대표팀 중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선수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월드컵 개막 전 일부 전문가는 이란 당국이 반정부 세력이 카타르 월드컵을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회 참가를 스스로 포기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측은 빗나갔고, 이란 대표팀은 카타르 월드컵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자국 관중의 환호와 야유가 뒤섞인 혼돈의 한 복판, 이란의 축구는 자국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이란 대표팀은 오는 30일(한국 기준) 미국과 B조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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