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뉴스라이브] "부모님이자 은인"·"인간계가 아니고 신계"...송해를 기억하는 목소리

2022.06.09 오전 10:42
■ 진행 : 호준석 앵커, 김선영 앵커
■ 출연 : 홍종선 / 대중문화기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이 땅에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을 품는 바다 같은 분이었고 떠난 뒤에도 깊은 울림을 남기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뿐만 아니라 대구 '송해 기념관'에도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고, 방송사들은 송해 뮤지컬, 다큐 등으로 추모방송을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영원히 잠든 고 송해 씨 영결식은 내일 엄수가 되는데요. 홍종선 대중문화기자와 함께 고인의 발자취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빨리, 갑자기 떠나실 줄은 몰랐는데 기자님도 놀라셨죠? [홍종선] 사실 저도 취재를 했었는데 항간에 알려진 것보다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런 얘기를 좀 들었었어요.

그래서 사실 모두가 마지막까지 전국노래자랑에서 보고 싶기도 했지만 또 이제 떠나가실 때가 됐다는 것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코로나 시국이 영향을 미쳤던 건가요?

[홍종선]
일단 올해만 보면 1월, 3월, 5월에 입원을 하셨어요. 1월에는 개인 지병이었고 3월에는 코로나19 확진이었고 또 그런데 다시 4월에 복귀한 뒤 한 달 만에 5월에 또 입원을 했었거든요. 워낙에 평상시에 건강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아프신 것과의 격차가 더 크게 느껴졌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앵커]
지금 모든 국민들이 추모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는데 금관문화훈장 추서된 건 그런 걸 반영한 것 아니겠습니까?

[홍종선]
그렇습니다. 일단 2001년에 5급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었고요. 또 2014년에 2급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생전에 받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1급, 가장 높은 금관문화훈장을 이번에 받게 됐는데 사실 1988년부터 34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전 연령대에게 문화적 심토를 제공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해 보면 받아도 너무나 합당한 대우입니다.

[앵커]
빈소 보니까 우리나라 연예계 선후배, 동료들 다 총출동한 것 같던데요. 유재석 씨가 장례위원을 맡았다고요?

[홍종선]
일단 코미디언장으로 치러지고요. 저는 영화인장뿐만 아니라 코미디언장, 이것 자체가 그분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엄영수 코미디언협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장례위원회 보면 이용식 씨, 최양락 씨, 석현 씨 이런 중견 코미디언, 또 눈에 띄는 것은 코미디언실을 운영하고 있는 지상파 3사가 방송사 구분할 것 없이 함께하고 있어요.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렸고 또 방금 말씀하신 유재석 씨, 또 강호동 씨, 김구라 씨 비롯해서 이런 지금 현재 인기를 얻고 있는 코미디언들도 장례위원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발인은 10일에 엄수될 예정인데 장지는 2018년에 먼저 떠나 보낸 아내 석옥이 씨가 있는 대구에 송해 공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 분들이 그곳에도 조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송해 공원에 안치될 예정입니다.

[앵커]
엄영수 씨입니다.

[홍종선]
이름을 엄영수 씨로 본인이 개명을 했습니다.

[앵커]
가수로 데뷔를 하셨었고 배우이시기도 하고 코미디언, 장르가 사실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그렇지만 고향은 코미디언이다. 그래서 협회장으로 치러지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문하면서 후배들이 가슴을 울리는 추모사를 했던데 잠깐 들어보고 오겠습니다.

[임백천 / 방송인 :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인간계가 아니고 신계에 계신 분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야외 공개녹화는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수십 년 하셨다는 건 대단한 업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심형래 / 영화감독·코미디언 : 선배님이 아니고 부모님이에요. 코미디언 입장에서는 진짜 큰 기둥이고 많이 의지하고 했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얘기 듣고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죠. 저도 힘들었잖아요. 저 따로 부르더니 봉투를 주시더라고요. 금액을 떠나서, 그런 따뜻함이 있으신 분이고….]
 
[이용식 / 방송인 : 제 인생을 바꿔주신 송해선생님…. 늘 저를 위해 걱정을 가장 많이 해주셨던 분, 저의 아버지시고 큰형님이시고 은인이시고, 감히 전국 노래자랑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크게 외치셨지만, 천국에서 수많은 선후배와 '천국노래자랑'을 외치시고 그 외침이 대한민국에 전해지길….]


[앵커]
후배들의 얘기를 들어봤는데 가슴이 좀 먹먹해집니다, 듣고 보니까요. 선배님이라기보다는 아버님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네요.

[홍종선]
그렇죠. 코미디언계의 집안의 큰 어른이신데 사실 연예인 누구라도, 코미디언 아니라도 영화배우나 가수나 누구나 걷고 싶은 길을, 연예인의 길을 걸으셨어요.

뭐냐 하면 한 프로그램을 34년, 35년째 장수 프로그램으로 진행을 하셨다. 거기다가 창공악극단, 1955년부터 생각해 보면 67년간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셨어요.

그리고 지금 95세이신데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셨고. 사실 모든 연예인들이 그렇게 그 길을 가고 싶을 텐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논란이 없고 늘 삶이 발라야 중간에 멈춤이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다 따르고 싶은 길을 간 그런 분으로, 어른으로 모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앵커]
특히 어려운 후배들을 알뜰하게 챙겨주셨다고 그러더라고요.

[홍종선]
그렇습니다. 본인은 4000원짜리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2000~3000원짜리 국밥을 먹으면서도 지금 심형래 씨도 나왔지만 이렇게 부침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 슬쩍 그냥 봉투 넣어주시고 그렇게 많이. 누구 병원에 입원했다 하면 꼭 찾아가보시고 그랬던 분이시고요. 또 분야 상관없이 누가 조문을 당했다. 그러면 꼭 그 빈소 찾아주시는 그런 분이셨죠.

[앵커]
전국노래자랑 녹화할 때 보면 꼭 전날 내려가셔서 그 마을에서 머무르면서 목욕탕도 한번 가보고 주민들 만나기도 하고 녹화장에는 3시간 일찍 가서 분위기 듣고 주민들 만나고 그러셨다고 하더군요. 그런 것에서 이런 것이 비롯된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일대기 영화가 나왔었죠?

[홍종선]
맞습니다. 송해1927. 1927년생이시고 본명이 송복희 씨죠. 송복희 씨로 시작해서 송해가 된 그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가 공개가 됐었습니다. 지난해 11월에 개봉을 했었고요.

여기는 방송인 송해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여동생을 그리워하고 또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고 아들을 그리워하는 그런 인간 송해의 모습도 담겨서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앵커]
제가 사실은 몇 년 전에 송해 선생님을 인터뷰했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제가 여쭤봤을 때 다른 모든 수식어, 호칭보다 제일 좋아하는 게 해 형 이렇게 불러달라, 이렇게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 형, 이렇게 더 이상 부를 수가 없다는 게 먹먹한데요.

[앵커]
저희가 이따 마지막으로 불러드리죠.

[앵커]
송해 선생님이 가슴 안에 한을 많이 품고 사셨으면서도 시청자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했던 분인데 특히 어머니는 가슴에 늘 한으로 남았다 이런 얘기를 인터뷰에서 했었는데 그때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송 해 / YTN 김선영 '공감토크' (2015년) :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얘기가 안 나올 거 같아요. 밤을 새워서 끌어안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세상에 계시겠습니다. 불효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어머님이 뭐라 그러실까 얘야 그게 무슨 네 잘못이냐 세월의 흐름이겠지 제가 하나 있던 아들 놈을 잃었을 때는 살고 싶지 않았죠. 제가 보답할 게 아이들 건강하게 낳아서 튼튼하게 키워서 잘 성장시켜서 어머님 아버님께 바쳐야 도리인데 그거 하나도 관리를 못했으니까 아들을 보내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가라 가 있겠죠.]

[앵커]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아드님이 가 계신 곳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계시고 이제는 송해 선생님도 같이 계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이 스튜디오거든요. 인터뷰한. 이곳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드님 얘기, 가슴 아픈 사연 얘기였는데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홍종선]
1986년이었습니다. 아드님이 한남대교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가 나서 유명을 달리했는데 사실 그 뒤로 한동안 한남대교 근처에도 못 가시고 건너지도 못하시고 했는데 말씀드렸던 다큐멘터리 송해1927을 제작할 당시에 따님이 있습니다.

따님이 남동생이 사실 유명을 달리한 나이가 22살이었어요.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본인의 연예인 길이 너무 가시밭길이다 보니까 만류했던, 그러나 혼자 작사하고 작곡했던 녹음했던 노래 테이프를 제작진에게 공개를 해서 이 노래가 영화에 실리기도 하고 송해 씨도 듣게 됐었거든요.

그렇게 또 어떻게 보면 아들을 먼저 보내기도 했고 내가 가수의 길을 막았던 이런 부분들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계시지만 또 저는 아들 보라고 이렇게 오랫동안 현역으로 잘 활동하셨다 싶고 지금은 또 만나게 되셨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생전에 많은 걸 이루셨지만 그때 기억에 남는 얘기가 마지막 꿈이 고향에 가서 전국노래자랑 외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건 또 못다 이룬 꿈이 됐어요.

[홍종선]
황해도가 고향이신데 사실 평양 공연까지는 했었죠. 2003년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고향에 가볼까 했는데 그때 안내하던 그런 당직자가 지금 다 강제이주로 제 고향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물론 그러면 이름 함자가 누구누구다.

어머니는 살아계시지 않아도 여자 동생은 살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밝히지 않았다 그래요. 왜냐하면 네가 송해의 동생이야? 이런 것 때문에 정치적인 핍박을 혹시 받을까 봐 아예 찾지 않고 그냥 그리움만 안고 돌아오셨었다, 이렇게 배려가 하나하나 깊고 마음 씀이 큰 분이었습니다. [앵커] 진짜 바다 같은 분이다. 본인이 피난하시면서 바다 보면서 이름을 바다 해 자로 바꾸셨다는데 황해도 전국노래자랑은 송해 선생님이 못 이루셨지만 남은 우리가 이루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후배들이 또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주영 명예회장께서도 실향민이시고 송해 선생님을 보고 당신이 세계 최고 부자다라고 하셨었다면서요?

[홍종선]
생전에 두 분이 한 행사장에서 만났는데 정주영 회장이 저기 최고 부자 오시네 했다는 겁니다. 송해 씨가 아니, 진짜 부자가 나한테 왜 그러나? 기분이 상하려는데 아, 오해하지 마셔라, 정 회장이. 사람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진짜 부자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래요. 그 진심을 듣고 당시 송해 씨도 정말 이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진짜 부자구나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34년간 전국노래자랑만 봐도 그 무대 무대에서 방청객으로 만난 분들이, 현장에서 만난 분들이 1000만 명에 이르고요.

그리고 무대에 올라서 어디 사십니까, 준비하신 노래가 뭐예요? 이런 얘기를 나눈 분만 해도 2만 명이라고 합니다. 어떤 위정자가 이렇게 많은 국민을, 그것도 남녀노소 다 만났을까. 정말 대단한. 고생도 있었지만 정말 큰 복을 누리셨다 그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빈소를 찾은 동료 선후배 연예인들이 가족같이 생각했던 우리 송해 선생님. 우리 대중문화 역사에는 어떤 분으로 기억될지 그 부분도 짚어주시죠.

[홍종선]
저는 처음과 끝이 같았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창공악극단에 들어갔을 때도 물론 배고픔에, 거기 가서 내가 노래도 배우고 연기도 배우고 사회, 진행도 배워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리고 애초에 또 해주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분이시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수십년간 한 현장에 가서도 눈을 감고 늘 리허설을 하는. 그런 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 그런데 그 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인데 이 진행자로서의 재주, 재능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논란 한 번 없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다, 이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던, 그리고 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서 사람들을, 대중과 가까이 계셨던 그 초심을 모두가 기억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는 마음으로 산다면 조금 더 세상이, 우리 모두가 더 선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앵커]
오늘 얘기 나누면서 저는 막 가슴이 아프고 이런 것보다는 따뜻해지고 굉장히 흐뭇해지고 이런 느낌 많이 받고요. 아까 송해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호칭이 해 형, 이렇게 부르는 거라고 하시니까 저희가 시청자 여러분, 호해하지 마시고. 한마디씩 해 형님한테. 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해 형님. 정말 고생 많으셨고요. 많이 배웠습니다. 또 지금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앵커]
저도 할까요? 해 형님. 제가 또 별세 속보를 전하게 돼서 참 가슴이 아팠던 하루였었는데요.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 지금 하늘에서 꼭 만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앵커]
만나셨을 겁니다. 우리 홍종선 기자님, 따뜻하고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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