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도시 여자들', '여고 추리반', '유미의 세포들' 등 오리지널 시리즈의 연속 성공을 발판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국내 대표 OTT 티빙. 최근 ‘나를 사랑하지 않는 X에게’(연출 고재홍, 극본 고재홍, 왕혜지, 제작 CJ ENM)로 ‘나’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공감을 선사하며 1529세대까지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X에게’는 자존감 제로, 자기애 제로인 대학생 작사가 지망생 서희수(한지효 분)가 누구라도 한 달간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신비한 작사 노트를 발견한 뒤 여러 남자들과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유통기한 주의 로맨스. 시한부 사랑이라도 절실한 희수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혀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정시호(도영 분)를 통해, 꿈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 더불어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서 찾으려 하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자중자애(自重自愛)'하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했다.
신인 캐스팅과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X에게’는 티빙 실시간 인기 프로그램 순위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타깃 시청자의 공감을 자극하는 스토리,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력과 케미, 섬세한 연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언어의 온도: 우리의 열아홉', '핸드메이드 러브', '연애 강요하는 사회' 등을 연출하며 꾸준하게 미드폼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고재홍 PD의 저력이 엿보였다. 고 PD는 미드폼의 수익 구조가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웹드라마 형식에 익숙한 세대들이 OTT로 유입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미드폼 시장을 희망적으로 내다봤다.
Q. 연출적으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고재홍 PD(이하 고) :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전작 같은 경우 예쁜 화면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연기적으로 놓친 게 많았다. 또 이번 작품 주연들이 신인들이다 보니까, 자기 생각이 맞을까 두려워하는 지점도 많았다. 하지만 가능한 통제를 하지 않았다. 대사가 잘 안 붙으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라고 했다. 리딩도 엄청 많이 했고, 현장에서도 배우들의 컨디션을 챙겨주려고 신경 썼다. 20대 초반 또래 배우들끼리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20대들의 고민을 담은 작품이라, 이 친구들이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해서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Q. 신인 배우 한지효 씨와 NCT 도영 씨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이유?
고 : 희수 역은 꼭 신인으로 하고 싶었다. 보는 분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캐스팅을 하고 싶었다. 연기력과 이미지를 중점으로 한 200명 정도 오디션을 본 거 같다. 그 당시 '술꾼 도시 여자들'을 봤는데, 교사인 정은지 씨를 짝사랑하는 여학생 박세진 역으로 나온 배우가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오디션장에 갔는데 그 배우를 딱 만난 거다. 오디션에서도 너무 잘해줘서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게 됐다. 시호 역은 중요하게 생각한 키워드가 '무해함'이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남들과 소통을 못했던 인물이라, 예민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찾았다. 기존 남자주인공과 좀 다른 이미지를 원했는데, 도영 씨를 처음 만난 순간 딱 제가 생각했던 시호의 이미지여서 너무 좋았고, 꼭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Q. 드라마에 나오는 곡들의 작사도 직접 한 것 같다 '고백해줘요' 작사에 이름이 올라가 있던데.
고 : 대학교 졸업하고 취미 삼아 작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근데 전문가 수준은 아니다 보니, 대본에는 주인공이 생각하는 감성과 드라마에 들어가야 하는 요소 정도만 말도 안 되는 가사로 적어 놨다. 그러면 전문 작사가분들이 아름답게 재배열해서 바꿔 주신 거다. '고백해줘요' 같은 경우 작사가 분이 '이건 내 이름만 올리면 안 될 거 같다'고 먼저 연락을 주셔서 같이 이름을 올리게 됐다. 모두 주인공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곡들이고, 애정이 있는 곡들이다.
Q. 극본을 직접 썼는데,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고 : 함께 대본을 작업한 왕혜지 작가와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대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2화에서 희수가 시호한테 '나 어때? 나 사랑받고 자란 애 같아?' 라고 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사랑받고 자란 것에 집착하는 것 같아서, 현장에서도 그렇고 편집할 때도 그 말이 계속 슬프게 느껴졌다. 시호 대사 중에는 짝사랑하던 희수를 향해 '너한테 차이더라도 나는 나대로 괜찮은 사람이어야 하니까'라는 게 있는데, 그게 시호의 성장을 보여준 거 같아 기억에 남는다. 한지효, 도영 두 배우 모두 담담히, 대사의 의미와 감정을 너무 잘 표현해 줬다.
Q. 전작들도 연애 장르가 많다.
고 : 웹드라마에서 최적화된 장르기도 하고, 영화 '벨벳 골드마인', 넷플릭스 시리즈 '더 겟 다운' 등을 재미있게 봐서 이번엔 음악 요소가 들어있는 로맨스를 해보고 싶었다. 예산적인 한계가 있어서 생각한 것을 다 구현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나중에 다시 해보고 싶다. 또 미스터리 추리물, 액션물도 해보고 싶다. 장르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게 많다.
Q. 미드폼 연출을 꾸준히 하고 있는 이유?
고 :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복수 전공 해 영화 쪽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방송사에 들어가 드라마 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한창 웹드라마 시장이 커질 때였고, 미니시리즈의 긴 호흡도 괜찮지만 미드폼이나 숏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됐다. 마침 CJ ENM에서 디지털 PD를 신설해서 1기로 들어갔는데, 기회를 얻어 5부작 유튜브 드라마를 했다. 그때 이후 매년 한 작품 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X에게'는 유튜브가 아닌 OTT 플랫폼에서 선보인 첫 작품이다.
Q. 미드폼·숏폼의 어떤 매력에 끌렸는지?
고 : 개인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반복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관료화 된 시스템이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니까, 작가나 연출이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다고 본다. 더 많은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또 제작 기간이 짧다 보니까 시의성 있는 소재를 다루기 좋은 형식인 거 같다.
Q. PPL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 같다.
고 : 웹드라마는 10분 짜리에 1분 PPL이 들어가면 전체적인 스토리에 영향을 미친다. 불가능하진 않다. 전에 한 작품 중에 '핸드메이드 러브'라는 브랜디드 웹드라마가 있었다. 패션 브랜드에서 제작비를 대면서 브랜드 명의 노출은 원치 않았다. 광고가 아닌 스토리적으로 접근하길 바랐다. 연출자로서는 감사한 기회다. 덕분에 당시 이수혁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었고, 여러 면에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Q. 장편 드라마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나?
고 :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 하는 일이 그것을 위해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조연출이 연출이 되는 과정처럼, 이걸 하다가 장편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숏폼과 미드폼에 대한 애정이 확실히 있다. 이것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오기도 했고,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많이 다르다. 미니 시리즈로만 구현 가능한 이야기라면 당연히 하고 싶겠지만, 지금은 미드폼이나 숏폼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더 많다.
Q. 극본과 연출 작업을 모두 하는데, 기획은 평소에 계속 하는 편인가?
고 : 기획안을 엄청 쓰는 편이다. 지금도 많이 쌓여 있다. 생각나면 무조건 한페이지 써 놓는다. 기회가 오면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 기획은 막연한 행위지만, 언젠가 시각화 될 때 감동이 있는 거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X에게'도 누가 시킨다고 기획한 게 아니라, 그냥 선배들 작품을 하다가 내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했다. 그렇게 왕혜지 작가와 함께 쓴 대본이 3년이 지나 드라마화 된 거다.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데, 그럼에도 상상하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이 좋다.
Q. 고충도 있을 거 같은데?
고 : 수익 구조가 불명확하다는 점인 거 같다. 이번 작품은 다행히 목표로 한 수익을 초과 달성하고 해외 판매도 꽤 된 걸로 알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런 미드폼이나 숏폼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면 좋을 거 같다. 예전에 미드폼과 숏폼이 갖고 있던 실험성이 있었다. 지원이나 투자가 있으면 더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Q. 현재 쓰고 있는 대본이 있나?
고 : 미스터리 장르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라는 것은 안 팔리면 그냥 시나리오로 끝이다. 그럼에도 글 쓰는 자체가 재미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을 쓰는 작업이라면 시나리오는 영상화 되는 것을 고민하고 쓰는 거니까. 써 놓으면 언젠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
Q.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고 : 이번 작품이다. 일하는 게 무척 힘든 시기였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다시 이 일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 어느 때보다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한 작품이다. 예전에는 영상미에 집착했던 거 같다. 저예산이지만 멋진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는 데 스트레스를 받았다. 20대 배우들이 하는 20대 이야기니까, 배우들과 많이 대화했고, 그래서인지 애착도 더 간다.
Q. 같이 작업 해보고 싶은 배우?
고 : 다음번에는 선배님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신인 배우분들과 함께 하면서 열정과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면, 선배님들과 함께 일할 때면 작품 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분들과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
Q. 연출자로서 바라보는 목표가 있다면?
고 : 결핍이 있는 인물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고 싶다. 또 요즘은 만들어지는 콘텐츠의 수도, 재능 있는 창작자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색깔, 나만의 개성을 찾는 것. '이 드라마는 얘가 해야 돼'라는 말을 듣는 게 목표라면 목표인 듯하다.
[사진 = 전용호 PD (yhjeon95@ytn.co.kr), 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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