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교문이 하나둘 닫히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쓰레기통을 끌어와 학교 입구를 막았습니다.
파리 근교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마르세유와 리옹, 낭트, 스트라스부르로 번졌습니다.
고등학생이 시작한 시위에 대학생이 합류했고, 교원노조가 뒤따랐습니다.
농민단체는 트랙터를 몰고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습니다.
거리로 나온 10대들의 요구는 단순합니다.
교육 예산을 늘려 교사를 보내 달라는 것, 무너지는 학교를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의 답은 조금 다릅니다.
"교육 예산은 오히려 늘었다"는 겁니다.
늘어난 예산과 텅 빈 교실.
이상한 간극 속에 지금 프랑스가 처한 선택의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1.불붙은 교실 : 생드니에서 전국으로]
불씨는 9월 중순, 파리 북쪽 근교 생드니의 한 고등학교에서 붙었습니다.
10월 6일 하루에만 프랑스 전역에서 고등학교 약 2,000곳이 봉쇄되거나 휴교했습니다.
대학생과 교원노조, 농민단체까지 시위에 합류했습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교사를 충원하고, 한 반 학생 수를 줄이고, 낡은 학교 건물을 긴급 보수해 달라는 겁니다.
파리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은 한 과목을 반년 동안 교사 없이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 과목으로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치러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학생들은 냉방이 없는 교실 온도가 35도를 넘는다고 증언합니다.
천장에서 잔해가 떨어져 그물을 쳐놓은 교실도 있다고 말합니다.
[프랑스 낭트 고등학생 : 어떤 건물들은 무너져 내리는 지붕을 옷장 같은 수납장들이 간신히 받치고 있고, 안에는 곰팡이가 너무 슬어서 판정을 받은 교실들도 수두룩해요. 특히 직업반 건물이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죠.]
정부의 대응은 강경했습니다.
9월 28일 이후 지금까지 체포된 사람은 6천여 명.
경찰에 구금된 5,000여 명 대부분은 미성년자입니다.
렌스에서는 15세 학생이 진압용 섬광 수류탄에 손을 잃었고, 투르에서는 16세 학생이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섬광 수류탄 사용을 일시 중단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 프랑스 대통령 :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어떠한 폭력도 용인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 중에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면서 상황을 이용해 방화나 기물 파손, 폭력을 일삼는 이들까지 목격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2. 늘어난 예산, 사라진 교사]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는 정말 교육 예산을 줄였을까요.
숫자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년 프랑스 교육 예산은 약 655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00조 원에 이릅니다.
올해보다 약 11억 유로 늘어난 규모입니다.
하지만 늘어난 예산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예산 증가율은 2% 남짓.
정부가 예상한 내년 물가상승률이 1.8%이고, 지난 9월 실제 물가상승률은 3%였습니다.
물가를 빼고 나면 사실상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입니다.
더구나 예산안에서 정규 교사 1,588명이 줄어듭니다.
정부의 논리는 학생 수입니다.
내년 신학기 학생은 올해보다 약 18만 명 줄어듭니다.
정부는 인구 감소만 따지면 교사 9,600명을 줄일 수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적게 줄였다고 설명합니다.
프랑스 신임 교사 월급은 2,000유로 안팎으로, 경력 교사 급여는 OECD 평균에 못 미칩니다.
교사가 되려는 사람은 줄고,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반년 동안 교사가 없었던 교실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3. 돈은 어디로 갔나]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의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난 7월 프랑스 정부가 공개한 2027년 지출 상한에 답의 일부가 있습니다.
내년 프랑스 국방 예산은 64억 유로 늘어납니다.
반면 국방을 뺀 나머지 부처의 증가분은 모두 합쳐도 15억 유로에 그칩니다.
고용정책 예산은 오히려 28억 유로 줄어듭니다.
국방 한 부처의 증가분이 나머지 부처를 모두 합친 것의 4배를 넘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국방비 증액 계획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017년 320억 유로였던 국방비를 2027년까지 640억 유로로 늘리겠다는 겁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 프랑스 대통령 : 미국이 유럽 안보에서 발을 빼려 하거나 동맹국들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이제는 우리가 직접 유럽의 안보를 책임지고 나토의 진정한 유럽 축을 구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랑스 학생단체들은 군 예산이 두 배가 되는 사이 교실은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현실이고, 유럽은 미국의 안보 우산이 얇아지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목할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프랑스가 국가부채 이자로 내는 돈은 올해 648억 유로에서 내년 742억 유로로 불어납니다.
빚을 갚는 데 드는 돈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드는 돈을 넘어섰습니다.
프랑스 재정적자는 올해 말 GDP의 5.4%로 예상되고, 국가부채는 GDP의 115%를 넘었습니다.
국방은 늘려야 하고, 이자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남은 몫을 나누다 보니 교실에 돌아간 것은 물가를 겨우 따라가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4. 왜 교실이 먼저인가]
재정이 빠듯할 때 정부는 반발이 가장 적은 곳부터 손을 댑니다.
학생 수 감소는 실질 교육 예산을 줄이기에 더없이 좋은 명분입니다.
청년의 반대쪽 지출은 사정이 다릅니다.
프랑스가 연금에 쓰는 돈은 GDP의 14%가 넘습니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준입니다.
정부는 지난해 정년을 64세로 올리는 연금 개혁마저 대선 이후로 미뤘습니다.
이 유예에만 내년 18억 유로가 들어갑니다. 교육 예산 증가분보다 많은 돈입니다.
물론 정부는 연금 수급자에게도 55억 유로를 더 부담하게 하는 안을 예산에 담았습니다.
고령층도 고통을 나누고 있다는 반론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표를 가진 세대와 아직 표가 없는 세대 사이에서, 정치가 어느 쪽을 먼저 지켰는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표가 없던 세대가 곧 표를 갖게 됩니다.
대통령 선거가 6개월 남짓 남았습니다.
거리에 나선 고교생 일부는 내년 대선에서 처음으로 투표합니다.
르코르뉘 총리는 10월 7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달 말까지 대책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만 정부는 극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는 시각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말처럼 교육 예산은 늘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 숫자가 그렇습니다.
교육 예산이 교실에 닿기 전에 물가에 깎이고, 국방에 밀리고, 이자에 눌렸습니다.
재무장과 국가 부채, 그리고 저출생.
이 세 가지 압력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나라에서는 교육이 가장 먼저 줄이기 쉬운 항목이 됩니다.
학생이 줄었다는 숫자는 언제나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단지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역시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교원 정원을 줄여 왔고, 국방비와 복지 지출의 압박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아낀 돈은 사라지지 않고 10년, 20년 뒤 더 비싼 값으로 사회에 되돌아옵니다.
지금 프랑스의 10대들이 거리에서 외치는 것은 단지 교사 몇 명이 아닙니다.
나라가 미래를 가장 뒷순위에 세웠다는 경고입니다.
지금까지 한방이슈 김재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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