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 국무총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난 3월 23일 국회에서 처리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우리 국민이 쌀을 얼마나 소비하느냐와 상관없이 농민이 초과 생산한 쌀은 정부가 다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매수 법”입니다.
이런 법은 농민을 위해서도 농업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이번 개정안과 관련하여, 문제점과 부작용이 많다고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하였고, 법안 처리를 재고해 주십사, 간곡히 요청해 왔습니다.
이번 법안은 농업계에서도 많은 전문가들이 쌀 산업과 농업의 자생력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농연, 쌀전업농연합회 등 농업인 단체들마저, 법안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회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일방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을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쌀은 우리 국민의 주식이며, 농업과 농촌경제의 핵심입니다.
정말 농업을 살리는 길이라면, 10조원도, 20조원도 충분히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지금의 우리 쌀 산업은 과잉생산과 쌀값 불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산업을 더욱 위기로 몰 것으로 우려됩니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금일 당정협의를 한 결과, 이번 법안의 폐해를 국민들께 알리고, 국회에 재의 요구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오늘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국민들께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소상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문제가 많은 법률안에 대한 행정부의 재의요구는 올바른 국정을 위해 헌법이 보장한 절차입니다.
첫째, 개정안은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갑니다.
지금도 정부는 반복되는 생산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할 때, 남는 쌀을 사들이는 '쌀 시장격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시장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긴급한 상황에 한해, 최소한의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쌀이 남아도는데도 영구히 무조건 사들이는 것은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을 더욱 무력화시킵니다.
공급과잉이 더 심해지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쌀 소비를 늘리거나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고자 노력하는 농민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그래야 할 이유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현재 23만톤 수준의 초과공급량이 2030년에는 63만톤을 넘어서고,
쌀값은 지금보다 더 떨어져 17만원 초반대에 머무를 것으로, 농촌경제연구원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업인들이 입게 됩니다.
특히, 영세농업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쌀 가격을 안정시키고, 농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과는 달리, 개정안은 더더욱 우리 농업을 파탄으로 몰 것입니다.
둘째, 미래 농업에 투자해야 할 재원이 사라지게 됩니다.
개정안에 따른 재정부담은 연간 1조원 이상입니다.
이 돈이면 300개의 첨단 스마트팜을 조성하고, 청년 벤처농업인 3천명을 양성할 수 있습니다.
농촌의 미래를 이끌 인재 5만명을 키울 수 있습니다.
농업 경쟁력 강화와 청년 농업인 육성에 써야 할 재원을 남아도는 쌀 매입에 쏟아부으면 농촌의 혁신은 더욱 멀어집니다.
과잉생산된 쌀을 정부창고에 수년간 보관하다가 5분의 1,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처분하는 것은 혈세의 낭비입니다.
소중한 농업재원은 농촌의 미래주역인 청년농업인을 지원하고, 농업을 미래 신성장산업으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셋째, 진정한 식량안보 강화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식량안보는 물론 중요합니다.
최근의 기후변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제 곡물 공급망이 불안해지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식량안보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미 자급률이 높은 쌀을 더 생산하는 것은 합당한 결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외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밀, 콩 같은 작물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 국가 전체와 농민을 위한 결정입니다.
쌀만 가지고 식량안보를 따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국민들의 먹거리 수요변화에 맞춰, 농축산물, 수산, 가공품 등 다른 분야의 수급을 균형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만 더 생산하게 하고 부족한 작물의 자급률을 높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넷째, 농산물 수급에 대한 과도한 국가개입은 이미 해외에서도 실패한 정책입니다.
60년대 유럽에서도 가격 보장제를 실시했다가 생산량 증가와 가격하락에 따른 농가소득 감소 부작용으로 결국 중단했습니다.
태국도 2011년 가격개입정책을 펼쳤다가, 수급조절의 실패와 과도한 재정부담으로 이어져 3년 만에 폐지했습니다.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번 개정안은 지난 정부에서도 그런 이유로 이미 반대하였던 법안입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식으로 다시 추진하는 것은 혈세를 내는 국민들에게 도리가 아닙니다.
존경하는 농업인 여러분,
지난 정부는 정책실기로 쌀값 대폭락을 초래한 바 있습니다.
쌀값 안정과 수급균형 회복을 위한 우리 정부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지난해에도 역대 수확기 최대물량인 45만톤의 시장격리 대책을 통해 쌀값을 빠르게 안정시킨 바 있습니다.
오늘 정부와 당은 농업 미래발전과 쌀 수급안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시장을 왜곡하는 정책이 아니라, 진정으로 농업을 살리는 다양한 지원정책을 통해 식량생산의 수급균형을 맞춰나가겠습니다.
쌀소비 수요를 최대한 확대하고, 고품질 쌀 생산체계를 강화하는 등, 쌀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겠습니다.
더 이상, 쌀만 생산해서는 안 됩니다.
밀이나 콩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에게도 직불금을 지원하겠습니다.
수입 밀을 대체할 수 있는 가루쌀 산업도 활성화시키겠습니다.
미래 농업 농촌의 발전을 위해 과감히 투자하고 지원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농업, 농촌, 농민의 삶과 직결된 일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개정안은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실패가 예정된 길로 정부는 차마 갈 수 없습니다.
이에 정부는 우리 쌀 산업의 발전과 농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를 대통령께 건의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국익과 농민을 위하고,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한 결단이라는 점을,
국회와 농업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앞으로 정부는 생명산업인 농업과 공동체의 터전인 농촌을 진정 위하는 방향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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