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① '엄마는 위대했다'···고려인이 전하는 전쟁의 참상
<1>
'전쟁 1년'
고려인이 전하는 우크라이나 상황은?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제 이름은 김 아나스타샤입니다. 고려인이고 평생 우크라이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우크라이나 중앙에 있는 작은 도시, 졸로토나샤입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부터 가족과 흩어진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현재 이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안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언제 러시아의 미사일 포격을 받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제 가족은 정말 운 좋게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목숨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라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어요. 전쟁 초반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인프라 시설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거주지도 공격했거든요."
<2>
전쟁 중 태어난 아이
'엄마는 위대했다···'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전쟁이 막 시작됐을 때 저는 임신 막달이었어요. 2월 24일은 평범한 아침이었어요. 첫째 아들은 학교 갈 준비를 했어요. 그때 온라인을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아무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정부의 발표가 있기까지만을 기다렸죠. 일단 모든 짐들을 싸고 물이나 기본 식량들도 챙기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공습경보가 울린 거예요. 그때 우리도 상황을 모두 인지했지만, 저는 만삭이라 다른 지역까지 대피하지 못했어요. 대신 지하에 대피공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경보가 울릴 때마다 내려갔죠. 당시 만삭에다 어린 아들까지 있었던 저는 경보가 울릴 때마다 내려갔다가 올라오고, 차가운 지하 바닥에 대피하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는 다행히 빠르고 건강하게 낳았어요. 하지만 저는 분만 당시 출혈이 심했죠. 그때 또 공습경보가 울려서 지하로 대피해야 했어요. 제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는데 저는 거의 걷지도 못했던 터라 지하에 도착했을 때 기절했어요. 그때 기억나는 건 제가 아이들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무의식중에도 계속 되뇌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저 자신에게 이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하니 제발 좀 더 힘을 내라고 말했죠. 그렇게 병원에서 엄마들은 신생아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대피해야 했어요. 아이들을 위한 멸균 시스템도 없었죠. 그래서 신께 기도했어요."
<3>
'전쟁 한복판'
우크라이나에 남은 고려인들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우리는 우크라이나 중앙부에 살고 있지만, 고려인 상당수가 니콜라이, 드니프로, 헤르손, 자포리지아 등 우크라이나의 남부에 살고 있어요.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고려인 가족이 타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고려인 대부분 남부 쪽에 살고 있다는 정도만 알죠. 그리고 러시아군 점령지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도 있어요. 또 일부는 우크라이나군에 합류해서 싸우고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제가 듣기로 현재 고려인군 세 명이 실종 상태고 맥심 드가이라는 이름의 고려인 한 명은 최근에 부상을 당했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전쟁으로 인해 고려인 몇 명이 희생됐는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은 제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어도 내일은 또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죠. 정말 끔찍한 현실이에요."
<4>
고려인에게 '한국'이란?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제가 알기로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고려인 2천 명 정도가 한국으로 피란 갔어요. 친언니도 지금 한국에 살고 있어요. 오래되지는 않았고 2018년부터 가족이랑 같이 한국으로 떠났죠. 형부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형부가 참 열심히 일하고 형부 상사도 그걸 고맙게 생각한대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요. 유치원이랑 초등학교 다니는데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아주 잘해요. 아이들에게는 모국어를 배우는 게 중요하잖아요. 저는 부끄럽게도 한국어를 할 줄 모르거든요. 고려인들이 세계적으로 여기저기 많이 흩어졌지만, 우리는 우리의 혈통을 잊지 않고 살고 있어요. 특히 지금처럼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는 한국이 기회의 나라가 되는 거죠. 한국은 고려인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집과도 같아요. 본적은 없지만, 조부모를 통해서 알고 또 기억하는 거죠. 조부모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모두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어요. 우리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엄마는 언제나 자랑스럽게 너는 한국인이고. 어디에 있든 넌 한국인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해줬어요.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이 고려인에게 한국인 피를 간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지 않았나 싶어요."
취재: 이정민 / 제작: 소재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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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1년'
고려인이 전하는 우크라이나 상황은?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제 이름은 김 아나스타샤입니다. 고려인이고 평생 우크라이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우크라이나 중앙에 있는 작은 도시, 졸로토나샤입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부터 가족과 흩어진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현재 이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안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언제 러시아의 미사일 포격을 받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제 가족은 정말 운 좋게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목숨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라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어요. 전쟁 초반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인프라 시설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거주지도 공격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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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태어난 아이
'엄마는 위대했다···'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전쟁이 막 시작됐을 때 저는 임신 막달이었어요. 2월 24일은 평범한 아침이었어요. 첫째 아들은 학교 갈 준비를 했어요. 그때 온라인을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아무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정부의 발표가 있기까지만을 기다렸죠. 일단 모든 짐들을 싸고 물이나 기본 식량들도 챙기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공습경보가 울린 거예요. 그때 우리도 상황을 모두 인지했지만, 저는 만삭이라 다른 지역까지 대피하지 못했어요. 대신 지하에 대피공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경보가 울릴 때마다 내려갔죠. 당시 만삭에다 어린 아들까지 있었던 저는 경보가 울릴 때마다 내려갔다가 올라오고, 차가운 지하 바닥에 대피하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는 다행히 빠르고 건강하게 낳았어요. 하지만 저는 분만 당시 출혈이 심했죠. 그때 또 공습경보가 울려서 지하로 대피해야 했어요. 제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는데 저는 거의 걷지도 못했던 터라 지하에 도착했을 때 기절했어요. 그때 기억나는 건 제가 아이들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무의식중에도 계속 되뇌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저 자신에게 이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하니 제발 좀 더 힘을 내라고 말했죠. 그렇게 병원에서 엄마들은 신생아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대피해야 했어요. 아이들을 위한 멸균 시스템도 없었죠. 그래서 신께 기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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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한복판'
우크라이나에 남은 고려인들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우리는 우크라이나 중앙부에 살고 있지만, 고려인 상당수가 니콜라이, 드니프로, 헤르손, 자포리지아 등 우크라이나의 남부에 살고 있어요.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고려인 가족이 타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고려인 대부분 남부 쪽에 살고 있다는 정도만 알죠. 그리고 러시아군 점령지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도 있어요. 또 일부는 우크라이나군에 합류해서 싸우고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제가 듣기로 현재 고려인군 세 명이 실종 상태고 맥심 드가이라는 이름의 고려인 한 명은 최근에 부상을 당했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전쟁으로 인해 고려인 몇 명이 희생됐는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은 제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어도 내일은 또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죠. 정말 끔찍한 현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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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에게 '한국'이란?
김 아나스타샤 / 고려인·졸로토나샤
"제가 알기로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고려인 2천 명 정도가 한국으로 피란 갔어요. 친언니도 지금 한국에 살고 있어요. 오래되지는 않았고 2018년부터 가족이랑 같이 한국으로 떠났죠. 형부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형부가 참 열심히 일하고 형부 상사도 그걸 고맙게 생각한대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요. 유치원이랑 초등학교 다니는데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아주 잘해요. 아이들에게는 모국어를 배우는 게 중요하잖아요. 저는 부끄럽게도 한국어를 할 줄 모르거든요. 고려인들이 세계적으로 여기저기 많이 흩어졌지만, 우리는 우리의 혈통을 잊지 않고 살고 있어요. 특히 지금처럼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는 한국이 기회의 나라가 되는 거죠. 한국은 고려인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집과도 같아요. 본적은 없지만, 조부모를 통해서 알고 또 기억하는 거죠. 조부모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모두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어요. 우리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엄마는 언제나 자랑스럽게 너는 한국인이고. 어디에 있든 넌 한국인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해줬어요.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이 고려인에게 한국인 피를 간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지 않았나 싶어요."
취재: 이정민 / 제작: 소재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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