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빛과 주황빛으로 물든 한지 조각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가을의 정취를 보여줍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서 영감을 받아 상실과 희망, 한국 문화의 정신을 담은 작품입니다.
겹겹이 붙인 한지 위에 새겨진 문양은 인간의 108번뇌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적 정서와 색채를 담은 작품들에 관객들은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빅토리아 로브레겟 / 관람객 : (작품들이) 정말 아름다웠고 마치 움직이는 명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었습니다.]
한지와 오방색, 그리고 한글을 활용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주인공은 바로 동포 이현희 작가입니다.
벌써 20년째 호주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 씨는 우연히 찾은 작은 미술 수업을 계기로 다시 예술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민자의 삶이 대개 그렇듯 낯선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는데요.
[이 현 희 / 호주 동포 작가 : (작은 미술 교실) 할머니께서 저한테 직업교육기관에 가라, 거기에 가서 공부하면 네 인생이 달라질 거다(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제가 열심히도 했지만 정말 보람차고 알차고 바람직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교수님의 추천으로 국립 미술 학교에 가게 됐는데요.]
무엇보다 호주 미술계는 이 씨의 작품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한국적 정서를 고스란히 투영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할머니와의 추억에서 비롯된 작품은 이현희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 현 희 / 호주 동포 작가 : (돌아가신 할머니의) 옷을 태우는 그러한 경험을 제가 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 '번 드레스(The Burn Dress)'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통) 한지에 우리나라 잉크로 다 물을 들여서 그다음에 이렇게 다 꿰매서 저 위에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그 시신을 감싸는 소청을 이용해서 이 드레스를 만들었어요.]
[로버트 베네츠 / 스승 : 가장 중요한 것은 이현희 작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자신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어서 모든 작업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품에 한지를 활용하고 (한국 전통) 기법을 사용해 그래픽 작업과 바느질, 종이 염색을 합니다.]
이처럼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내자 이 작가에게 현지 사회의 많은 기회도 쏟아졌습니다.
2022년 시드니 음력설 축제에서 공식 홍보물 디자인 작가로 처음 선정된 데 이어- 오방색과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오페라하우스 등 시드니 곳곳에서 한국 문화를 알렸습니다.
[이 현 희 / 호주 동포 작가 : (2026년) 오방색을 사용한 그 활기차고 진취적인 말의 모양이 정말 많은 인기를 받았어요. 오페라하우스 앞에 34개의 프린트가 정말 잔뜩 걸렸었어요. '저건 한국 사람들의 작품이다'하고 공감을 할 수 있을 만큼 다 눈에 딱 들어오고 색채가 화려하고, 우리나라의 전통 색이기 때문에 그렇게 알아볼 수가 있었고.]
한국인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는 한국계 작가들의 초청전을 마련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꾸준히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지 체험 활동 등을 전개하며 지역사회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도 이 작가가 주목하는 작업입니다.
[애슐리 백 / 전시 참여 작가 : 오히려 (이 지역에) 한인들이 없기 때문에 한인 문화를, 달항아리를 통해서 알릴 수 있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요.]
[존 물랜드 / 센트럴코스트 부시장 : 작품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이 작가는 정말 훌륭한 예술가이고 작품으로 보여준 다양성도 정말 뛰어납니다. 다섯 명의 한국인 작가 모두 놀랍고, 뛰어난 여성 작가들이 협업해 이 전시회에 아름다운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이 씨에게 남은 꿈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품으로 한국 문화와 철학을 현지 사회에 자연스럽게 알리는 것.
[이 현 희 / 호주 동포 작가 : 앞으로는 지금처럼 이렇게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를 통해서 한국 문화를 알리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후배들을 끌어주고 그다음에 밀어주고 하는 그런 위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 장의 한지 위에 그려온 한국의 정신과 문화.
자신의 작품이 사람과 문화를 잇길 바라며 이현희 씨는 오늘도 한국에서의 추억을 작품에 녹여냅니다.
YTN 강현정(khj87@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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