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970년대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에 맞서 먼 독일 땅에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청춘.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거리 위에서 신념의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안녕하세요, 저는 1966년 파독 간호사 1진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온 간호사 박화자 입니다.]
1966년 파독 간호사 1진으로 독일 땅을 처음 밟았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외화벌이라는 사명감보다는 유럽 음악을 듣고 싶었던 스무 살 남짓 청춘의 호기심이 먼저였던 소녀.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독일에 대한 호기심, 유럽에 대한 호기심. 가면 이것저것 다 보고 할 수 있겠다. 아기 같죠. 내가 저 나이에 여기를 어떻게 왔나 싶어요.]
환자들로 온기가 넘쳤던 병동과 수줍게 인사를 나누던 옛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새 건물이 들어서며 비워진 옛 병실엔 정적만이 가득합니다.
빛바랜 복도 위로 43년 청춘의 기억을 가만히 짚어봅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옛날에는 이거 아니었어요. 이건 좋은 거예요. 열 몇 명 우리 병동에 있었는데 8개국 사람이 있었어요. 2009년에 퇴직할 때 전부 병동에서 사진을 찍었죠. 단체 사진을.]
계약 기간 3년만 채우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박화자 씨의 계획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결국 영원한 망명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삶이 거센 풍랑 속으로 들어선 건 1975년.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된 '인혁당 사건'을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청년 8명이 대법원 판결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된 비극이 박화자 씨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75년 인혁당 사건, 4월 8일 날 판결 내고 4월 9일 날 8명 다 죽였잖아요. 굉장히 큰 쇼크였어요. 유신 체제 반대 이런 거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임 희 길 / 남편 : 독일에 사회민주당만큼이나 강한 조직력이 있는 단체였던 '카베베(KBW)'라고 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기구라든가 확성기라든가 다 그 사람들한테 빌려서 하고 했었는데.]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유신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시작한 박화자 씨 부부.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타자기를 사 학생들이 써 온 글을 밤새 타자로 치며 직접 신문 판형을 짜고 인쇄소로 달려가 찍어낸 신문들을 손수 배포했습니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민건회'의 일원으로 거리로 나가 고국의 실상을 알리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데모니 뭐니 전부 여기서 했어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여튼 젊었으니까 해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먼 데서 힘들게 오는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나 정의를 택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동포 사회의 배척 속에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킬 수 없었습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계약 기간) 3년 끝나면 가야지, 가야지 아주 그냥 다짐을 했어요. 아버지가 위암으로 전화하셨을 때 그때는 정말 가고 싶었어요. 엄마는 그냥 그렇게 갑자기 가셨다고 해도 아버지는 그때는 정말 가고 싶었어요.]
결국, 부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망명 비자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버렸지만 정말 많이 울었고, 왜 한국이 나를 국적을 바꾸게 만드는가 그게 참 힘들었어요.]
뿌리째 흔들리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건 그녀를 독일로 이끈 스승 고 이수길 박사였습니다.
파독 간호사의 기틀을 마련하고, 수많은 파독 간호사들의 '아버지'이자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고 이수길 박사.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박화자 내외분께 드립니다. 이수길 드림. 2021년 8월 27일 이렇게 쓰셨네요. 지금도 굉장히 그리워지는 이 박사님이에요. 그래서 자주 요즘은 대신 사모님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스승을 대신해 유족의 곁을 지키는 박화자 씨.
이 박사가 남긴 1톤 분량의 역사 자료를 고국 박물관에 전하기 위해 하나 하나 정리하는 일도 도맡았습니다.
[이 영 자 / 故 이수길 박사 아내 : 우리 남편은 무슨 일 있으면 우리 박화자한테 전화 먼저 해라 그랬어요. 자기들 그냥 일상에 어떻게 지낸다 하는 그런 얘기도 하고 박화자 씨가 오고 간다면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던 아픔을 겪었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박화자 씨.
[박 화 자 / 파독 간호사 :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게 정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저 전혀 바꿀 생각이 없어요. 계속할 겁니다.]
이국땅에서 한평생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바쳐온 여든의 파독 간호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YTN 최가영(weeping07@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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