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네스 배 / 재미교포 선교사 (북한 2년 억류)
[앵커]
이 북한의 인질외교의 실제 피해자이죠. 북한에서 무려 735일 2년간 억류됐다가 풀려난 케네스 배 현재 서빙라이프 대표를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앞서서 잠깐 봤는데요.
지금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으로 아마 국내외에서 언론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이렇게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 주셔서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오토 웜비어 사건으로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지금 분노하고 있는데요. 오토 웜비어 사건과 관련해서 느낌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제가 그 곳에서 나온 지가 2년 반 남짓 됐는데요. 저도 오토 웜비어처럼 15년 노동교화형을 고 교화소에 가서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작년에 오토 이 친구가 그곳에서 억류됐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에 조속히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러한 비보를 접하게 돼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마음으로 오늘 스튜디오에 나왔습니다.
[앵커]
작년 이맘때였는데요.
북한에서 735일을 보내고 나온 그 뒤에 그것을 회고록 형태로 정리하지 않았습니까?
그 책을 발간하고 난 뒤에 저희 스튜디오에 나왔었는데 이때 스튜디오에 나오고 책 소개를 한 것에 대해서 북한에서 나중에 비난이 좀 있었다고요?
[인터뷰]
북한에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유투브를 통해서 제가 책을 발간하고 여러 가지 언론 기자회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에 갔다 온 것을 여러 가지 악의적인 방법으로 이용한다는 그러한 내용의 성명 같은 식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발표하기도 했었죠.
[앵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신 것은 어떤 뜻으로 봐야 됩니까?
[인터뷰]
제가 사실은 작년부터 미국분 또 캐나다 신분을 가지신 분들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억류되신 분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 제가 공개적인 활동을 사실은 자제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이러한 비보를 접하고 나서 더 이상 침묵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특히 남아계신 분들 신변도 걱정이 되고 그리고 정말 이번 기회에 한 청년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 죽음을 통해서 더 북한에 억류되신 분들에 대한 생각들과 그리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권에 대한 생각들이 확산되어서 좀 더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앵커]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던 미국인, 외국인들이 이렇게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억류된 상태, 억류돼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가 상당히 궁금한 내용들입니다. 케네스 배 대표 같은 경우에는 2012년에 북한에 억류가 됐었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러면 그때 그 당시 노동교화형. 케네스 배 대표도 역시 오토 웜비어와 마찬가지로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받았지 않습니까?
그때 상황, 어떤 이유로, 어떤 죄목으로 노동교화형을 받은 겁니까?
[인터뷰]
죄목은 국가전복음모죄에 해당이 됩니다. 형법 60조, 국가반란죄여서 제가 15년 노동교화형을 받았고요.
그게 그렇게 발달된 이유는 제가 사람들을 여행사를 통해서 모집을 하여서 그곳에 가서 관광을 하는 와중에 선교 목적으로 들어갔다는 이유, 그것은...
[앵커]
당시에 북한에 들어가신 이유는 관광 목적으로 들어가신 건가요?
[인터뷰]
그렇죠. 관광여행사를 제가 중국에 설립을 하였고요.
그곳을 통해서 제가 데리고 간 사람들이 모두 다 크리스천이었고 또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들을 중점적으로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북한에서는 선교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북한 헌법 6조에 보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실상은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지만 지금 현재 지난 60여 년 동안 지나온 역사를 봤을 때도 특별한 신앙활동이나 선교활동은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죠.
[앵커]
그러면 노동교화형을 받은 이유는 선교활동이 아니라 다른 이유를 댔겠네요?
[인터뷰]
국가전복음모죄라는 이유가 됐고요. 그중에 몇 가지 리스트가 쭉 있는데 체제를 중상비방했다든지 또 그곳에서 기도하고 예배했던 것 그 자체가 그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기도했겠지 않는가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제가 거기에 대해서 자백을 하도록 강요를 하고 진술을 하게 해서 결국은 교화소에 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 것이죠.
[앵커]
북한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에 북한 역사상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라고 재판 기록에 나와 있다고요?
[인터뷰]
재판 기록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곳에서 저를 조사했던 사람들 중에서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아마 6.25 전쟁 이후에 붙잡힌 미국 국민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다.
그것은 혼자만 선교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선교하러 부추기고 여러 가지 조직적으로 북한 선교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앵커]
체포가 돼서, 재판을 받아서 선고를 받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습니까?
[인터뷰]
제가 2012년 11월 3일에 체포가 되어서 2013년 5월 초에 재판을 받게 됐기 때문에 그 6개월 반 정도 되는 시간을 거쳐서 예의심이라는 것을 합니다. 사전심리절차를 통해서 결국은 재판까지 가게 되었죠.
[앵커]
변호의 조력도 받았나요?
[인터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변호사를 선임하겠느냐라고 해서. 북한에서 변호사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제가 물었죠. 그러면 제가 변호사를 만나보고 결정할 수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만나볼 수는 없다.
그 대신 그러면 제가 언제 만나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재판 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렇다면 제가 그냥 제 자신을 변호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죠.
[앵커]
재판 때 만날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자기의 억울함이나 이런 것을 먼저 들어주는 게 아니고 재판정에서 보겠다는 얘기네요?
[인터뷰]
그렇죠. 당시 공화국 형법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한테는 그렇게 선임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제가 그렇다면 만날 수 없다면 제가 굳이 변호사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앵커]
노동교화형을 15년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인터뷰]
당시에는 사실 사형 내지 무기징역이 될 거라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5년형을 받은 것은 사실은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최악은 면했다고 생각은 했고 하지만 당시 검사되시는 분들이 얘기하기를 몇 년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이후에 미국 정부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은 형식적인 재판이고 재판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미 협상 카드로 사용하려고 저를 붙잡고 있다고 저는 그때 당시에 알 수 있었죠.
[앵커]
그러니까 앞으로 노동교화형이 몇 년이 나오든 그건 상관없는 거고 미국 정부의 태도에 달려 있다.
결국은 정치적인, 그러니까 외교적인 인질로 삼으려 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네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것을 복역 중에 느낄 만한 상황들이 있었습니까?
[인터뷰]
제가 한 달 반 정도 복역을 하고 있을 때 담당 검사 되시는 분이 오셔가지고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왜 미국 정부에서 잠잠하냐.
그 전에 2009년도 여기자들 사건 때는 빨리 빨리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너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시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이러다 보면 내가 은퇴할 때까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15년형을 구형한 검사의 입에서 한 달 만에 왜 빨리 안 데려가냐고 이러한 얘기를 들은 것을 봤을 때 저는 그곳에 그냥 대미 협상용으로 잡혀져 있는 인질로 저는 그때 생각이 됐죠.
[앵커]
그렇군요. 지금 오토 웜비어 군 같은 경우에는 정치체제 선전물을 떼어내다가 이게 문제가 돼서 노동교화형 15년을 받았거든요.
북한에서 정치체제 선전물을 떼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북한 체제에?
[인터뷰]
제가 정치 선전물이라도 그 문구가 어떤 문구인지 그리고 그 포스터 내용이 그쪽에 최고존엄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든지 이랬을 경우에는 굉장히 심각한 훼손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앵커]
예를 들면 김일성, 김정일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상당히 위중한 건가요?
[인터뷰]
상당히 위중한 거죠. 최고 존엄을 한마디로 훼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거의 국가전복 음모랑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노동교화소에서 2년 가까이, 2년 넘게 생활을 하셨습니다. 앞서서 저희가 잠깐 지난해 인터뷰한 내용을 보여드리기는 했습니다마는 교화소 안에서 구타나 다른 어떤 신체적인 위해를 받은 적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인터뷰]
맞습니다.
[앵커]
그렇습니까? 그런데 웜비어 같은 경우에는 지금 혼수상태로 고국에 돌아왔거든요.
엿새 만에 죽었는데 이게 그냥 아무런 신체적인 위해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다들 보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터뷰]
저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제 경우에는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도 신체적인 위해는 가해지지 않았고요.
그리고 교화소에 가서도 그러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지금 보도에 나오는 자료를 봤을 때 3월에 재판을 받고 얼마 안 돼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교화소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요.
혹시 교화소 가서 일어난 일인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저는 들고요.
포스터를 뗐다는 그런 과정 속에서 특별히 재판 받을 때까지는 온전한 모습이었는데 재판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추측할 수는 없죠.
[앵커]
지금 오토 웜비어와 관련해서 북한 당국의 설명은 식중독, 보툴리누스에 걸려서 고생을 하는 중간에 수면제를 먹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거든요. 북한에서 만약에 억류돼 있는 외국인이 아픈 경우에 의약품이나 어떤 의료적인 지원 같은 것은 원활하게 이루어집니까?
[인터뷰]
원활하게라고는 제가 말을 못하겠고요. 제가 교화소에 있을 때는 교화소에는 거기 군의관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는 와서 검사도 하고 필요한 약도 조달해 주게 돼 있고요. 그리고 병원에 제가 가서 장기 치료를 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필요한 약물 같은 것이 공급은 됐습니다마는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죠.
[앵커]
구타나 학대는 없다고 하셨는데 그때 노동교화소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인터뷰]
노동교화소에서는 구타, 학대는 없었지만 노동교화소다 보니까 아침 6시에 기상을 해서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을 나가서 신체적인 노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콩밭에 가서 콩도 심고 김도 매고 석탄 창고에서 석탄을 한 장소에서 한 장소로 나르기도 하고 돌을 나른다든지 하수구 공사를 한다든지 이런 식의 신체적인 노동. 그래서 소위 말하는 중노동은 다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죠.
[앵커]
노동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체중이 한 20kg 넘게 빠지셨다고요?
[인터뷰]
제가 한 27kg가 감량이 된 적도 있었고요.
굉장히 저로서는 노동이나 농사일들 같은 경우는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는 신체적으로 어려웠던, 특히 여름 같은 경우에는 불볕더위에 37도 이런데 땡볕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니까 제가 물을 한 2리터짜리 주전자 물을 3통, 4통을 마셔도 화장실도 한 번 안 나가는 정도에 굉장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일은 계속 진행돼야 되는 일입니다.
[앵커]
저희가 자료화면이나 사진을 보면 케네스 배 대표 혼자서 일을 하는 거를 볼 수 있거든요.
다른 북한인들이나 다른 외국인들이랑 같이 노역에 나서지는 않았나요?
[인터뷰]
제가 있었던 데는 외국인 특별교화소라고 해서 외국인들만 있게 되는 시설이었습니다.
[앵커]
혼자서 그러면 노역을 했습니까?
[인터뷰]
그랬는데 제가 있을 당시에는 저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가 혼자 일하게 된 것이죠.
[앵커]
그렇군요. 현재 북한에는 미국 국적의 한국계 미국인이죠. 3명이 억류가 돼 있고 한국인들도 3명이 지금 구금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전해 주고 싶으신가요?
[인터뷰]
저는 그곳에 억류돼 있던 사람으로서 참 가슴이 많이 아프고요.
그분들은 지금도 아마 매일같이 집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구원은 확실히 될 것이다라는 그런 확신이 있었고요.
미국 정부가 저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같이 웜비어 같은 경우가 나올 것이라는 것은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마는 지금 계신 분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아달라고 말해 주고 싶고요. 세계 각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신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저한테 그런 많은 편지가 왔듯이 그분들도 지금 이러한 웜비어 학생의 참사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다시 잊혀졌던 억류자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이 계기를 통해서 조만간에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앵커]
지금 제가 케네스 배 대표를 서빙라이프의 대표라고 소개를 해 드렸는데 북한의 인권과 관련돼 있는 단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2006년도에 시작된 단체고요.
북한인권권리활동과 탈북자들도 와서 지원 정착하는 일들 그다음에 탈북했지만 중국이나 이런 데서 인신매매로 팔려가서 생겨진 아이들이 버림받았을 경우 그 아이들을 돌보는 탈북 고아원 시설 등등의 그런 인권활동들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앵커]
2년 반 동안 북한에서 고생을 하셨는데요. 다시 북한의 인권 문제를 위해서 활동을 하겠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인터뷰]
제가 2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으면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살 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었는데 그곳에 제 자유가 빼앗겨진 상태에서 살면서 그곳에 살고 계신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2400만이나 되는 북한 동포들이 계신데 말할 수 있는 자유, 또 갈 수 있는 자유, 하고 싶은 자유 이런 기본적인 인권들이 보장이 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에서 사실은 지금은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거나 우리가 정치적인 논리나 또 경제적인 논리로 통일이란 것에 접근하기보다는 우리가 인도주의 차원에서 우리 동포라는 차원에서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억압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개선되고 또 그들이 그곳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지금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2012년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2년 만에 자유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케네스 배 서빙라이프 대표와 북한의 인권 상황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북한에 인질로 잡혀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짚어봤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