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YS도 못 피해 간 '싸가지' 비판
'싸가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봤다. 없었다. 국립국어원에서 누구든지 참여해 만든다는 <우리말 사전>으로 안내했다. '싹수'의 방언 (강원, 전남). 설명이 부족해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 찾아봤다. '②방언,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이르는 말, 또는 그러한 예의나 배려가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예상대로 싸가지가 없다는 건 예의나 배려가 없다는 말이다.
'싸가지'란 말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인다. 정치권에서도 종종 쓰인다. 주로 소신과 패기를 앞세운 젊은 정치인을 향해 선수를 많이 쌓은 정치인이 애용한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두 거목인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도 젊은 정치인 시절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대 당시 야당인 신민당 유진산 총재는 YS와 DJ가 40대 기수론을 주도하자 이를 '구상유취'라고 깎아내렸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이다. 결국 '싸가지 없다'는 의미다.
40대 기수론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을 견제해야 했던 야당이 안고 있던 중대 정치 과제였다. 1971년 44살이던 김영삼 의원이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지명전에 먼저 뛰어들었고, 45살 김대중 의원과 48살 이철승 의원이 잇따라 출마했다. 결과적으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다수파인 김영삼 의원이 아닌 소수파인 김대중 의원이 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94만표 차로 석패했다. 엄혹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졌지만 잘 싸웠다'는 야당의 성과로 기록될 만했다. 결국 큰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체제로 강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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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백바지'(흰색 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등장한 유시민
"옳은 소리도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대명사 유시민
2000년 이후 대표적인 '싸가지' 정치인 하면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흔히 꼽는다. 그는 2003년 4월, 1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했다. 의원 선서 첫날, '백바지'(흰색 바지)에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권위의 상징인 정장 차림을 고집했던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에서조차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의원 선서 자체가 미뤄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시민 당시 의원은 정장 차림으로 다시 나와 선서를 해야 했다. 이때부터 여의도에선 '백바지'가 '싸가지' 없는 정치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참고로 유 전 이사장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보좌관 출신이다. 이해찬 전 대표도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듣는 정치인이다.
유 전 이사장은 대선이 있던 2002년 동교동계를 향해 "DJ(김대중 전 대통령) 신임만 받으면 개똥이건 소똥이건 할 수 있는 3, 4선이 무슨 훈장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리고 상대 당을 향해선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며 날을 세웠다. 정치 기득권에 향한 메시지인데 말본새가 독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저토록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 노무현 정부 시절 386그룹이었지만 비노였던 김영춘 열린우리당 의원이 정치인 유시민을 향해 던진 말이다. 이때 '옳은 소리도 싸가지 없이 하는'이란 수식어가 공식화됐다. 분명한 건 유시민이 하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싸가지'가 없어 기분이 나쁘다는 얘기다. 이성보단 감성의 영역이다.
16·17대 국회의원, 그리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 전 이사장은 그가 추종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매우 닮았다. 솔직한 화법과 승부사적 기질, 사안을 반대 관점에서 보는 시각, 화제성 등 비슷한 점이 참 많다. 그렇다고 유시민 전 이사장이 한 행동과 말이 모두 옳다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게 노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대연정 관련이다. 유 전 이사장은 홀로 앞장서 대연정을 설득하고 다녔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조차도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라고 반성한 게 바로 대연정 제안이다. 비교적 최근 사례는 조국 사태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명예훼손 사건 때인데 당시 유 전 이사장은 말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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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싸가지' 정치인 이준석…결국 '싸가지'로 되돌려주다
최근 안철수 의원을 겨냥한 '욕설 논란'으로 사과까지 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도 '싸가지'란 말이 자주 뒤따른다. 친윤계가 앞장서 대표직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지난해 6월에도 이 말이 나왔다. 이 전 대표가 친윤계의 총선 공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혁신위원회를 띄우자 친윤계는 집단 반발했다. 이때 5선인 정진석 의원이 '정치 선배의 우려를 개소리로 치부한다'며 이 전 대표를 비난했다. 선배, 우려, 개소리…결국 '싸가지' 없다는 얘기다.
이 전 대표는 우크라이나 방문을 마치기 전 SNS에 글을 올렸다. "3일 뒤면 (당대표) 취임 1년인데 1년 내내 흔들어놓고는 무슨 싸가지를 논하나, 흔들고 가만히 있으면 더 흔들고, 흔들고 반응하면 싸가지 없다 그러고…" 정진석 의원의 이른바 '개소리' 발언에 대한 응수다. 혁신위 자체를 놓고 건설적인 논쟁을 벌여도 될 일을 '싸가지'란 말이 등장하면서 감정의 영역으로 급전환됐다.
또 하나의 장면은 바로 '미스터 린튼'. 11월 초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은 자신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이준석 전 대표의 부산 토크 콘서트장을 예고 없이 찾아갔다. 이때 이 전 대표는 인 위원장을 '미스터 린튼'이라고 칭하며 영어로 "이준석이 환자라 찾아온 것입니까? 환자는 서울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표 반대편 사람들은 '싸가지'는 물론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갔다. '백인'을 향한 인종차별주의자란 말 자체가 어색하긴 한데 분명한 건 남의 공식 행사에 불쑥 찾아간 건 바로 인요한 위원장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인요한 위원장은 당원 행사에서 "준석이는 도덕이 없다, 그것은 준석이 잘못이 아니라 부모 잘못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또 '싸가지' 없다는 얘기인데 부모까지 끌어들이면서 이 전 대표를 '미성숙한 아이'로 취급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SNS에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양 김을 비방하던 옛날 유진산 대표가 연상된다"며 "이준석은 버릇없는 것이 아니라 당돌한 것"이라고 적었다. 최근 이 전 대표는 김기현 대표 사퇴를 두고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 한마디 하는 사람 없다'며 '정말 싸가지 없다'는 글을 올렸다. '싸가지'가 '싸가지'로 되돌려준 셈이다.
1985년생 이준석. 20대 중반에 여의도 정치에 입문했다. 이 전 대표는 2011년 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의해 비대위원으로 발탁됐다. 이듬해 4월 총선에서 박근혜 위원장이 당선권 내 비례 의원 또는 TK 출마를 권유했지만 거절한다. 그리고 새누리당 '험지'인 서울 노원 병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이후 두 차례 같은 곳에 출마했지만, 또 낙선했다. 그는 10년 이상 여의도 정치를 경험하면서 세 차례나 총선에서 떨어지고, 당 대표로 대선과 지방선거라는 큰 선거를 이끈 정치인이다. 현재 여의도에서 이 정도 경험을 가진 정치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물학적 나이를 앞세워 '싸가지 없다'로만 몰아갈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최근 '욕설 논란'처럼 이 전 대표도 말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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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싸가지' 발언도…'형식 앞서 내용부터 보라'
최근엔 좀 다른 '싸가지' 발언이 나왔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의원총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김정은 위원장의 딸 김주애에 빗대며 추대설에 반대했다. "우리가 국민의힘이냐, 용산의 힘이냐. 왜 짜고 와서 한동훈 장관을 비대위원장으로 미느냐. 한 장관을 비대위원장으로 하면 내년 총선은 어렵다"는 게 주된 논리였다. 내용만 보면 의총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이러자 친윤계인 장예찬 최고위원은 YTN 라디오에 출연해 "비윤계나 비주류라고 하는 분들이 기본적으로 참 싸가지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한 장관이 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합리적으로 근거를 대고 설득하면 되는데 쓰는 단어를 보면 아바타나 김주애가 왜 나오나. 그럼 그렇게 잘난 김웅 의원이 차기 주자 1위 하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이 '싸가지' 발언은 이전에 비해 좀 뜬금없다. 88년생인 최고위원이 70년생인 현역 의원에게 예의가 없다고 한 격인데 이전 '싸가지' 문법과는 좀 차이가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싸가지' 공격은 주로 젊은 정치인, 진보 세력을 겨냥했다. 단지 예의가 없다는 게 아니라 오만함을 내포한다. 다만 생산적 논쟁이 필수인 여의도 정치권에서 '싸가지'는 논리에 밀렸을 때 오용되거나 과용되는 사례도 있었다. 특정 장면만을 박제해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다. 현실 정치에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내용을 먼저 봐야 한다. 형식을 주로 앞세우면 생산적 논쟁이 아닌 정쟁만이 팽배해진다.
50년 전 40대 정치인 DJ와 YS도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결국 우리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 되었다.
YTN 이대건 (dglee@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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