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위에 짓겠다던 인류 최대의 유토피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초거대 프로젝트.
네옴시티가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170km를 잇겠다던 거울 도시 '더 라인'은 입주 목표가 15분의 1로 줄었고 추가 공사는 2030년 이후로 밀렸습니다.
석유에 기대던 나라를 첨단 도시로 바꾸겠다던 빈살만 왕세자의 구상.
그 꿈을 멈춰 세운 건 유가였습니다.
석유 이후를 준비하려던 계획이 정작 석유에 발목이 잡힌 겁니다.
네옴시티의 속사정을 들여다봅니다.
사막 위에 그린 약속
네옴은 그리스어로 '새로운'을 뜻하는 '네오'와 아랍어로 '미래'를 뜻하는 '무스타크발'의 첫 글자를 합친 이름입니다.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2017년 이 계획을 세상에 내놨습니다.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 첨단 산업과 관광의 나라로 거듭나겠다는 '비전 2030'의 상징이었습니다.
중심에는 '더 라인'이 있었습니다.
높이 500미터, 거울 외벽으로 덮인 건물 두 동이 200미터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섭니다.
그렇게 170킬로미터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도시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와 맞먹는 거리입니다.
자동차도, 도로도 없는 미래 도시에 900만 명을 살게 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택시와 로봇 서비스가 일상이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빈살만 왕세자가 공언한 미래였습니다.
공식 사업비는 5천억 달러, 우리 돈 약 700조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계속 불어났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2023년 네옴 이사회 자료에는 2080년까지 필요한 총사업비가 8조 8천억 달러로 추산됐습니다.
처음 발표한 금액의 17배가 넘고 사우디 한 해 예산의 약 25배에 이르는 규모입니다.
물론 네옴 측은 장기 비전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짓는 계획인 만큼 초기 청사진과 지금의 속도를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그 '단계'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훨씬 작게 쪼개지고 있습니다.
멈춰 선 현장
가장 먼저 줄어든 건 사람이었습니다.
사우디는 애초 "2030년까지 더 라인에 150만 명을 입주시키겠다"고 했습니다.
2024년에는 목표가 3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목표는 10만 명, 처음 계획의 15분의 1입니다.
올해 5월, 미국 매체 세마포는 네옴이 더 라인의 추가 공사를 최소 2030년 이후로 미뤘다고 보도했습니다.
멈춘 건 더 라인만이 아닙니다.
사막의 스키 리조트 트로제나는 네옴 내부 문서 기준으로 사업비가 2년 새 두 배, 380억 달러까지 불어났습니다.
결국 사우디는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 개최를 포기했고 대회는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넘어갔습니다.
트로제나의 인공호수를 만들 댐 공사, 이탈리아 건설사 웨빌드와 맺은 47억 달러 계약도 해지됐습니다.
같은 회사가 따낸 고속철도 계약 역시 취소됐습니다.
홍해 연안의 리조트 벨트 '마그나'도 2030년 이후까지 새 예산이 끊겼습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돈의 흐름입니다.
미국 매체 세마포에 따르면 네옴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계약 해지 비용으로 최대 160억 달러를 잡아뒀습니다.
같은 기간 새로 짓는 데 쓸 돈은 약 107억 달러.
새로 짓는 돈보다 공사를 멈추는 돈을 더 많이 준비한 겁니다.
지금까지 네옴에 들어간 돈은 약 64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여파는 한국에도 닿았습니다.
[나드미 알 나스르 / 당시 네옴 최고경영자(2023년 7월, 네옴 서울 전시회 기자간담회) : 우리는 네옴이 좋은 투자처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한국 기업들이 다양한 분야에 참여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2022년 6월, 더 라인 지하를 관통하는 2.5킬로미터 터널 공사를 약 1조 3천억 원에 따냈습니다.
그해 11월 빈살만 왕세자가 방한했고 한국과 사우디는 26건, 약 40조 원 규모의 양해각서를 맺었습니다.
'제2의 중동 붐'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두 회사는 터널 공사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습니다.
사유는 '발주처의 사업 재편'이었습니다.
현대건설은 "투입 비용 정산이 끝나 현재까지 손실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모든 사업이 멈춘 건 아닙니다.
항만 산업도시 옥사곤에는 30억 달러가 추가로 투입됩니다.
84억 달러 규모의 그린수소 공장도 건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려한 미래 도시는 접고 돈이 되는 산업 기반만 남기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겁니다.
싼 석유가 멈춰 세웠고, 비싼 석유도 살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네옴을 멈춰 세웠을까요?
시작은 저유가였습니다.
국제통화기금, IMF는 "사우디가 나라 살림의 균형을 맞추려면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안팎은 돼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2025년 유가는 70달러 안팎에 머물렀고 연말에는 60달러 선 아래까지 내려앉았습니다.
그 차이는 고스란히 적자로 쌓였습니다.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석유 이후를 준비하겠다는 계획이 정작 석유 값에 발목이 잡힌 겁니다.
네옴을 이끄는 사우디 국부펀드의 장부에도 균열이 드러났습니다.
국부펀드는 2024년 한 해 동안 기가프로젝트의 가치를 2,410억 리얄에서 2,110억 리얄로 낮춰 잡았습니다.
약 80억 달러의 평가손실입니다.
비용 초과와 사업 지연, 시장 여건 악화가 이유였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네옴 경영진이 관광 수익과 인구 증가 전망을 부풀려 사업성을 좋게 보이게 한 정황이 내부 감사에서 드러났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이란 전쟁이 터졌습니다.
유가는 다시 치솟았습니다.
브렌트유는 지금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듭니다.
사우디가 그토록 바라던 비싼 석유가 돌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사우디는 웃지 못했습니다.
주요 수출길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막히면서 팔 수 있는 원유 자체가 줄었습니다.
우회로인 홍해마저 후티 반군과의 교전으로 불안해졌습니다.
여기에 전쟁으로 지출까지 늘면서 올해 1분기에만 335억 달러의 적자가 났습니다.
정부가 연초에 계획한 한 해 적자는 440억 달러였지만 골드만삭스는 "실제 적자가 두 배 가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IMF는 "높은 유가가 수출량 감소를 상쇄해 올해 재정 사정이 오히려 나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설령 돈이 돌아온다 해도 네옴이 예전 모습을 되찾을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도시에서 서버로
그렇다면 네옴에서 빠져나간 돈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2030년 리야드 세계박람회, 2034년 FIFA 월드컵, 그리고 AI 데이터센터입니다.
날짜가 정해진 국가 행사, 그리고 당장 수익이 보이는 산업입니다.
국부펀드는 물류와 광물, 종교 관광,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50억 달러 넘게 쏟아부은 LIV 골프 지원도 올 시즌을 끝으로 중단합니다.
"더 라인 부지 역시 AI 데이터센터 중심으로 다시 짜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했습니다.
바닷물을 끌어와 서버를 식힐 수 있는 홍해 연안의 입지가 새 쓸모를 찾은 겁니다.
사우디가 사려는 미래가 '도시'에서 '서버'로 바뀐 셈입니다.
저렴한 석유는 네옴을 멈춰 세웠고, 전쟁이 불러온 비싼 석유도 네옴을 되살리지 못했습니다.
해협이 막히고 미사일이 날아드는 현실 앞에서 사우디는 불가능해 보이는 환상이 아니라 방어력과 실리를 선택했습니다.
화려한 미래 도시라는 포장지를 벗겨낸 자리에 남은 건 홍해의 바닷물로 식힐 데이터센터와 수소 공장입니다.
사막 위 유토피아는 사라졌지만 석유 이후를 준비하겠다는 사우디의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기획·구성 : 김재형(jhkim03@ytn.co.kr)
제작 : 이형근(yihan3054@ytn.co.kr)
참고 기사 : 월스트리트저널, 유로뉴스, 세마포
영상 출처 : NEOM
YTN digital 김재형 (jhkim03@ytn.co.kr)
YTN digital 이형근 (yihan3054@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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