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여기 어디냐고, 여기 어디냐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민주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이향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지금 여기 그냥 끌려가면 안 된다. 여긴 교도소보다 무서운 데다.]
[한종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밧줄로 발을 묶어서 거꾸로 매달고, 입에 재갈 딱 물리고….]
[이승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이렇게 해서 맞았어요. 너무 맞아서 기억은 안 납니다. 피가 터지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제까지 빛을 보지 못했던 좋은 일을 찾아 적극 권장하는 뜻에서…."
[허상용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시, 구청, 경찰, 다 제 인생을 망쳐 놓은 거잖아요. 가족도 지금 다 뿔뿔이 헤어져서 찾지도 못해요.]
[연생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진짜 힘들게 살았습니다. 안에서….]
"오늘 이 영광, 이 기쁨은 우리 국민 공동의 기쁨이며…."
[강신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진짜 지옥 같은 데였습니다. 거기는.]
사진 속 남자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있다.
땅바닥을 응시한 채로, 입은 굳게 다물었다.
여기, 십자가를 진 또 다른 예수가 있다.
남자들은 무표정하다.
우스꽝스럽고도 기괴한 가장행렬.
선글라스 낀 원장 박인근이 보인다.
소년들이 마이크 앞에 서서 무엇인가 말한다.
1981년 봄 부산시 주례동 18번지, 형제복지원.
그때 성서의 한 장면을 재현했던 그들은 지금 구원받았을까?
[양재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배웠어야 했는데, 못 배운 게 너무 한이고, 제가 진짜 형제원에 왜 잡혀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왜 5년이라는 세월을 맞아가면서, 고생하면서 아무리 고아지만, 그런 데 잡혀가서 왜 당해야 했는지, 살면서도 너무 후회되고 죽겠습니다.]
[이동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지금도 사는 게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사는 게 진짜 너무 억울하고, 내가 조금만 배웠어도 이렇게 억울하게는 안 살았을 건데 초등학교 1학년 다니다가 내가 거기 잡혀갔어요. 그 당시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서 모 씨 /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가족 : 아버지 제삿날이면 (여동생이) 왔어요. 그러다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무연고자 사망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목숨을 끊은 거죠. 일기 비슷한 걸 보니까‘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왜 난 여전히 갇혀 있는 거 같지.’ 이런 글도 적혀 있었고….]
[20대 국회 5차 본회의 (지난 5월 20일) : 재석 171인 중 찬성 162인 반대 1인 기권 8인으로써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 대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한종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대표 : 꼭 진상 규명해서 저희 억울함 풀고 명예회복 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우리는 다시 형제복지원과 마주했다.
1975년부터 12년간 수만 명이 그곳을 거쳐 갔다.
부랑인들의 새 삶을 위한 복지 시설이라는 그곳에서 기록된 것만 5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감금과 폭력, 굶주림, 강제노동, 성폭행, 그리고 의문의 죽음들.
30여 년 전, 민간인을 가두고 착취했던 끔찍했던 그곳은,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도(圖)는 원장 박인근이라는 개인이 그린 하나의 ‘사건’일 뿐일까?
YTN 기획탐사팀은 오는 12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형제복지원’을 추적했다.
참혹한 인권유린이라는 극단적 이미지를 쫓았던 기존 언론 보도를 넘어,
"분명히 책임은 있는 문제인 거잖아요?"
형제복지원 뒤에 감춰진 정치·경제적 구조,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하금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 단순히 형제복지원이라는 한 곳에서 벌어진 어떤 공포 영화적인 소재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 있을 수 있느냐’라는 방식으로 이해하다 보니까 어떤 책임이 있고, 왜 이런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지 성찰하는 분위기로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인구 340만, 거대 도시, 부산역이 붐빈다.
30여 년 전 이곳 어딘가를 헤매던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경찰이 다가갔다.
형제복지원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경찰이다.
[이승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찰관이 초코파이를 한 상자 사주고 경찰차에 태워서 갔던 기억이 나요. 어딘지는 모르고 커다란 철문이 기억나고….]
1987년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머리를 욕조 물에 밀어 넣는 과정에서 질식, 사망한 것으로…."
사흘 뒤,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을 구속했다.
대학생 고문치사 사건에, 복지시설의 참상까지 세상에 알려졌다.
민심이 들끓었다.
야당이었던 신민당이 부산으로 내려와 진상 조사에 나섰다.
신민당 1차 보고서에는 경찰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이들 가운데 3,177명을 수용 의뢰한 국가 기관이 경찰이다.
형제복지원 수용자 10명 가운데 8명이 경찰에 의해 잡혀 온 셈이다.
보고서에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문정수 / 前 신민당 의원 (87년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단 단장) : 파출소나 경찰서 데려가면 내부 평점 2~3점 불과한 근무평점을 형제복지원에 데려다주면 배로 더 받거든요. 평점을 5점 받으니까. 경찰관들이 그런 혜택 때문에 서로 다투듯이 형제복지원에 부랑아들을 의도적으로 데려가고….]
근무평점과 관련한 기록을 찾기 위해 부산지방경찰청으로 향했다.
협조를 얻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 :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이 이관됐는지 안 됐는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답변 못 합니다. 근데 경찰이 저희도 잘못했다고 사과도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YTN 기획탐사팀은 경찰 내부 제보자를 통해 80년대 부산에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에 가담했던 일부 경찰관들의 명단을 확보해 추적했다.
궁금했다. 그들은 공범일까?
아니면 단지 맡은 일에 충실했던 공무원이었을까.
(기자 : 전에 사시던 분?)
"몰라요. 전혀."
답을 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기자 : 안녕하세요. 이OO 선생님 댁 맞나요?)
"지금 안 계시는데요."
(기자 :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형제복지원 취재 중인데 여기 앞집에 박00 선생님이라고….)
"그 양반 죽었어요."
공범과 방관자의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퇴직 부산 경찰 : 가라! (기자 : 예전 형제복지원 기억 안 나세요?) 기억 안 나!]
[내레이션]
취재진을 향한 격렬한 적대감 너머로 작고 초라한 한 시대의 희생양이 보였다.
[퇴직 부산 경찰 : 공무원 생활하다 다쳐서 온몸이, 다리 수술해서 국가가 뭐 자꾸 이래 이제 와서. 국가유공자야 왜!"
비교적 선명한 기억을 가진 전직 경찰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퇴직 부산 경찰 : (기자 :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 OOO 선생님 댁 맞나요?) 네. (기자 : 안녕하세요. 저 YTN에서 나왔거든요.) YTN?]
그는 경찰이 민간인 강제수용에 가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퇴직 부산 경찰 : 시민들한테 불편을 주고 해서 신고가 들어오고 하면 데려다가 가족 찾아서 연결해주고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은 그쪽(형제복지원)으로 연결해서 데려간…. (기자 : 피해자 중에서는 가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시설에….) 그럴 리가 있나, 어떤 경찰관이 가족 있는데 가족한테 안 데려다주고, 시설에 보낼 그런 경찰이 어디 있어요. 내 생각에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는 마땅히 그랬어야 할 정상적인 경찰의 모습을 말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길잃은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당연한 일을, 경찰은 하지 않았다.
[이혜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찰 아저씨들이 집이 어디냐고 물어봐서 제가 상세히 약도까지 다 그려주고 할머니 집 주소랑 전화번호랑 다 알려주고‘조금만 기다려라. 데려다주겠다’고 얘기해서 기다리다가 파출소에서 잠이 들었어요. 집에 가자고 깨워서 일어났는데 밖에 파출소 문 열고 나가면 냉동탑차 같은 그런 게 있더라고요. ]
[배기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찰 아저씨가 마침 순시 돌고 있었나 봐요. 그 근처에 파출소가 있던 거로 기억해요. 그분이 와서 일단 좋은 데 보내줄 테니까 울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더니만….]
경찰이 이들의 호소를 외면했던 이유는 뭘까?
평점을 높게 받아 승진하고픈 열망?
원장 박인근과의 유착?
경찰이 민간인 납치와 불법감금에 가담하고, 방조하고, 묵인한 배경에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무서운 힘이 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생지옥이 만들어진 토대, 그 시대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를 한 부산시 공무원들을 찾아 나섰다.
형제복지원의 역사는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대 수용소로 성장한 건 80년대이기 때문이다.
[최 모 씨 / 퇴직 부산시 공무원 :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는 1981년 동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부서 업무 가운데 하나는 형제복지원으로 부랑인을 보내는 일이었다.
[최 모 씨 / 퇴직 부산시 공무원 : 나도 (형제복지원) 정문 앞까지만 가봤어. 보통 파출소에서도 오면 부랑아들 있으면 정문 앞에 가서 인수인계하지. 내가 보기에는 안에까지는 경찰들도 안 들어갔을 것 같아. 못 들어가.]
그는 그 일을 사회정화라고 불렀다.
[최 모 씨 / 퇴직 부산시 공무원 : 정화. 정화하면 깨끗해지는구나. 우리가 보통, 그죠? 사회정화 업무를 구에는 총무과에서 했고, 시에는 시정과라고 있어요. 막강했지. 하여튼 그 당시에 최고 뉴스는 사회정화 활동.]
"비뚤어진 의식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서 사회정화 운동은 국민의 굳건한 새로운 의지로써 구체화 됐으며 정신 개혁 운동으로 전국 각계각층에 파고들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1980년 9월 1일 대통령 전두환."
이 선서를 위해서였다.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5월 광주 시민들을 총칼로 짓밟았다. 학살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5월 광주’의 배후에 고정간첩, 그리고 공산주의자 등의 이른바 불순분자들이 있다고 발표했다.
무력시위의 불을 지핀 자들로는 전국에서 몰려온 불량배들을 지목했다.
불순분자와 불량배들을 ‘정화’해 제2의 광주를 막아라!
‘사회정화’의 출발점이었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 신군부의 과도 정부, 국가보위비상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전두환 장군은 상임위원장의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국보위 산하 기구 중 핵심이 사회정화 분과위원회였다.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정화’가 시작됐다.
“사회정화 이룩하자! 사회정화 이룩하자!”
미국은 그 ‘정화’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었다.
80년 7월 4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내는 문서.
일부가 비밀로 처리돼 가려졌지만, 신군부가 ‘사회정화’ 명목으로 감시체제를 강화하고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해 탄압했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공포 정치로 민주주의의 열망을 억누르는 신군부의 통치술.
전방위적인 ‘사회정화’가 ‘삼청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마지막 5호의 결과물이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이듬해 81년 4월부터 새로운 사회정화가 시작됐다.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
행색이 초라하거나 불량해 보이면 집과 가족이 있어도 부랑인으로 몰려 잡혀갔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만든 내무부 훈령 410호가 강제수용의 근거였다.
부정한 권력은, 부랑인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는 복지 국가로 포장됐다.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그게 전두환식 접근 방법이에요. 길거리에서 부랑인, 걸인을 다 청소하면 굉장히 깨끗해지잖아요. 굉장히 선진화된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렇게 연출하기 위해서 집단 수용을 감행한 거죠. 집단 수용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거란 말이에요. 내무부 훈령 410호? 그게 뭐예요? 그런 방식으로 어떻게 사람을 감금할 수 있죠?]
사회복지를 빙자한 대규모 강제수용은 국무총리실 직속 사회정화위원회의 주도로 80년대 5공화국 내내 계속됐다.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정화위원들은 전국에 걸쳐 무려 113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말초신경이었다.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의 선봉에 서서, 민간인을 감금했다. 거리는 조용해졌다.
사회는 평화롭고 질서정연해 보였다.
[하금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기에 들어서면서 (대규모 수용시설을) 일종의 사회 안보적인 차원에서 활용했던 측면도 있죠. 사회의 불안과 범죄 증가의 원인을 가난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전두환은 사회정화위원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렸을까?
YTN 기획탐사팀은 국가기록원에 정보 공개 청구해, 전두환의 육성 파일을 입수했다.
"1986년 3월 20일 본관에서 사회정화위원회 연두 업무 보고 말씀입니다."
[전두환 (1986년 3월 20일) : 우리 사회정화위원회가 발족한 지가 5년이 되는데, 다시 말해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사회정화위원회가 발족돼서.]
그는 사회정화위원회를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칼로 여겼다.
[전두환 (1986년 3월 20일) : 정화위원들이 지역별로 조직을 활성화해서 그 지역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라든지 소위 말하는 부조리 사항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중앙에 보고가 되고 내가 대통령이 특명을 주는 사안에 대해서는 정화위원회가 조사할 수 있다. 그것도 내가 정화위원회 줄 때는 여러 참작을 해서 임무를 줄 테니까.]
전두환은 형제복지원이 자신의 계획한 사회정화에 빛나는 공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81년 4월 대통령 국민포상, 84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
원장 박인근은 적은 비용으로 대규모 강제수용을 가능하게 해 독재자를 복지 국가의 지도자로 둔갑시킨 5공화국의 공신이었다.
[문정수 / 前 신민당 의원 (87년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단 단장) : (박인근의) 제일 큰 비호세력은 당시 전두환이죠. ‘박인근 참 훌륭한 사람이야, 그 사람 있어서 거리가 깨끗해지고 부랑자가 없어졌어.’ 전두환의 전언이 나오거든요.]
당시 부랑인 수용시설에는 수용자 한 명당 정부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머릿수만 늘리면 돈이 되는 구조였다.
사회정화라는 5공화국의 필요에, 박인근 개인의 탐욕이 더해져 무차별적인 민간인 납치와 감금이 자행됐다.
둘의 공생관계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절정으로 치달았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집’ 운영) : 부랑인 시설들이 지역적으로 아주 적당히 배분돼 있습니다. 어디 지역으로 몰려있지 않아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어쨌든 사회정화. ]
수소문 끝에, 전두환 정권과 박인근과의 구체적인 유착 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부산시 한 퇴직 공무원과 연락이 닿았다.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사회정화위원장들이 박인근 씨랑 바로 연결된 거라. 일단 들어가면 80%는 가족과 연락 두절됩니다. 하여튼 형제복지원 악랄했어요.]
취재진은 그와 세 차례 전화 인터뷰, 한 차례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형제복지원과 공무원 간의 유착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경찰서에서 박인근한테 한 사람 데려다주면 500원인가 줬어. 70년대에. 내 공무원 초봉이 10,230원이었어. (형제복지원) 동쪽에 사무실에서 경리부 아가씨들이 있었어요. 커피 한 잔 얻어먹고 나면 노란 봉투에 500원씩 주더라고 차비 식으로 주는 거지.]
전두환 일가와 박인근 원장 사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나왔다.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라고 있잖아요. 아마 (박인근의) 배후에는 그 양반 영향이 컸을 거예요. 박인근 씨하고 전경환 씨하고 내왕이 있었거든.]
전경환은 전두환의 막냇동생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육군 중위로 예편했고, 형이 권력을 잡자, 새마을운동협회를 장악해 사무총장과 회장, 명예 총재까지 오른다.
현재는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그 둘은 뗄 수 없는 사이일 거예요. 근데 나는 위에서 근무하면서 그걸 알았다고. (87년 검찰 수사 당시) 새마을운동본부에서 전경환이가 엄청나게 압력을 많이 넣은 거야. 전두환 정권 때 전경환이 실세니까.]
형제복지원에는 전두환 정권을 위해 수행하던 숨겨진 기능이 하나 더 있다.
"모든 복지원 입소자들은 개개인의 신상 카드를 갖게 된다. 흰색 카드는 정상인, 노란색 카드는 환자, 파란색 카드는 우범자,
그리고 붉은색 카드는 신원 특이자로 작성이 되어 모두가 원생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87년 신민당 보고서는 당시 11명 이상이 신원 특이자였고, 이들은 행방불명된 시국사범일 가능성이 크다고 기록한다.
[이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서울대 체육복을 입히니까. (소대장에게) 서울대생 맞냐고 물어보니까. 서울대생 맞는다고 그래요. 외부 병원 가야 해서 형제복지원에 있는 거 감추려고 (옷을) 갈아입히나 바로 가도 될 건데. 몸이 완전히 진짜. 의식 불명 상태로 왔어요. 의식도 없고. 몸도 약하고 젊은 사람. 20대 정도 돼 보이던데…]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그러니까 그게 신원 특이자잖아요.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 경찰서 정보과에서 아마 그거 한 거로 난 알고 있는데….]
형제복지원은 군사 정권이 내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괴물이 되어갔다.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시국사범, 도시 빈민, 그리고 어린아이, 학생, 부녀자까지 집어삼켰다.
70년대 후반 천 명대 초반이었던 수용인원은 86년 말 3천 명을 훌쩍 넘어섰고, 폭력과 굶주림은 갈수록 극악해졌다.
하나로는 부족했다.
대전에서, 대구에서, 인천에서, 형제복지원의 형제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군사 정권의 필요와 시설 운영자들의 탐욕이 만나 탄생한, 거대한 민간인 강제수용소.
5공화국, 감금의 시대가 그렇게 시작됐다.
[김용원 / 변호사(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폭력, 인권 유린 이런 내용적인 측면에선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었어요.]
"어쩌면 양지마을은 형제복지원보다 더 무서운 지옥이었는지 모른다."
[이성재 / 前 국회의원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다 감금 수준이야. 감금 수준이 실제로 철창화 돼 있고]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밟고 때리고 주로 빠따를 많이 치죠.]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 그때는 건물을 돌로 짓는 게 아니야. 그 수용된 사람들 데리고 공사 일을 하는 거야.]
[이동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그걸 공짜로 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다 가로챘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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