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탐사보고서 기록] 5공화국의 강제수용소 2부 : 수용소 비즈니스
[전두환 (1986년 3월 20일) : 우리 사회정화위원회가 발족한 지가 5년이 되는데…. 다시 말해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사회정화위원회가 발족돼서.]
"사회정화 이룩하자! 사회정화 이룩하자!"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그게 전두환식 접근 방법이에요. 길거리에서 부랑인을 다 청소하면 깨끗하잖아요.]
[이승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찰관이 초코파이를 한 상자 사주고 경찰차에 태워서 갔던 기억이 나요.]
[이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서울대 체육복을 입히니까 (소대장에게) 서울대생 맞냐고 물어보니까. 서울대생 맞는다고 했어요.]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라고 있잖아요. 내왕이 있었거든.]
[문정수 / 前 신민당 의원(87년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단 단장) : (박인근의) 제일 큰 비호세력은 전두환이죠.]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 세종시.
옛 모습은 콘크리트 숲에 묻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신도시를 벗어나면 수십 년째 변함없는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넓은 정원과 짧게 깎은 잔디, 잘 정돈된 나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공간은 한때, 누군가에게, 끔찍한 고통 속에 희망마저 사라진, 지옥이었다.
[옛 양지마을 인근 주민 / 충남 연기군 : 이쪽 (왼쪽?) 네. 이쪽 말고 이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그리로 올라가면 그쪽으로 다… (묘지에요?) 묘지에요. 그 전에 양지원 사람들 죽으면 그리로 다 묻더라고…]
[옛 양지마을 인근 주민 / 충남 연기군 : 옛날 그 양지원. 전두환 대통령 할 때 양지원 거기 몇백 명 죽어서 묻었을 거야 아마 거기 슬슬 묻어서 비 오면 막 나오고 그랬어요.]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방에다가 시체를 가져다가 놔뒀더라고 싣고 가기 전에 이틀 동안 사람이 시신이 갈라지고 피가 나고….]
야트막한 산 중턱에 펼쳐지는 주인 없는 무덤들.
이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랑인 보호시설, 양지마을의 불법 행위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1998년 7월 16일.
새벽을 틈타 시민단체와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부랑인 복지시설, 양지마을의 문을 열었다.
이른바, 햇볕 작전.
"가자! 가자!"
감금과 폭력, 굶주림, 강제노동.
숨겨져 있던 참상이 드러났다.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1998년) : 이쪽 방에서 이쪽까지 화장실 가는 데까지 페인트 방으로 돼 있는데 거기다가 8일 동안을 가뒀어요. 여자를.]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98년) : 작업을 거부한다든가, 바른말을 한다든가 그럼 예외 없이 독방이에요.]
1983년 양지마을이 세워진 이후 무려 15년 동안, 그 안에서 몇 명이 목숨을 잃고 야산에 묻혔을지 모른다.
YTN 기획탐사팀은 수소문 끝에 대전에서 과거 양지마을 수용자를 만났다.
그는 80년대 여러 부랑인 수용시설을 옮겨 다니다, 양지마을에 잠시 머물렀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술 한 잔 잘못 먹은 게 잘못이죠. 그때는 시대가 동네에서 조금 잘못하면 삼청교육대 보내고…. 전두환 시대거든요.]
그런데, 그가 증언하는 폭력의 양상이 1987년에 폭로됐던 부산 형제복지원과 상당히 유사하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한강 다리라든지 사람 다리 머리 목 어깨 해서 만약 다리가 떨어지고 이러잖아요. 그럼 빠따로 치죠.]
[김 모 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한강철교, 한 사람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줄빠따 맞고….]
부산 형제복지원을 떠올리게 하는 건 또 있다.
수용자들에게 계급을 부여해 서로를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드는 ‘군대식 조직’.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신임을 얻은 사람들, 15명인가 뽑아서 선도 완장을 차서 원생이 원생을 감시하게끔….]
[양재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잡혀 온 사람들한테 맞은 겁니다, 결론이 그 사람들이 선도요원 되고 조장, 소장 되어서 군기를 잡으려니까, 어쩔 수 없이 때려야 하고….]
(기자: 98년에 직접 양지마을 가셨던 선생님 맞으시죠?)
"네."
98년 당시 양지마을을 급습해 수용자들을 구조했던 ‘햇볕 작전’의 주역들을 만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질환자, 알코올 중독자 등을 구분 없이 수용하면서 그들의 병리학적 특성마저 시설 운영에 이용했다.
어쩌면 양지마을은 형제복지원보다 더 무서운 지옥이었는지 모른다.
[김병후 / 정신과 의사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조현병 환자는 알코올 중독 환자들의 밥이에요, 말하자면. 밥이라고 하면 말이 이상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은 감성적으로 약한 여린 사람들이니까 알코올 중독인 사람들이 위에서 휘두르는 셈이 되죠.]
그러나 양지마을과 형제복지원이 지속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 이윤 창출 구조는 같다.
사냥하듯 수용자 모으고, 그만큼 정부 보조금이 늘어나면 가로챈다.
[이성재 / 前 국회의원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그냥 사람이 죽지 않고 있어야 정부에서 나오는 돈을 떼어먹을 수 있잖아요. 1인당 100만 원 나오면 50이 내 수입이니까 동물 키우듯 죽지 않게만 해주면 되는 거지.]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80년대 5공화국, 감금의 시대가 낳은 괴물.
양지마을 원장의 이름은 노재중이다.
그는 80년대 초 5공화국 출범과 함께 본격적으로 복지사업을 확장해 천성원이라는 법인 아래 양지마을 이외에도 대전 성지원 등 여러 시설을 운영했다.
87년 2월, 신민당의 보고서.
대장 격인 원생이 곡괭이 자루로 동료 원생을 때려죽였다는, 양지마을 내 끔찍한 살인 사건 조사 기록이다.
[김운구 /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87년) : 중대장 애가 때려서 죽은 애 거기 딱 현장 검열을 나왔을 때…]
당시 신민당은 형제복지원을 계기로 불거진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의 인권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양지마을에 이어 성지원도 찾아간다.
반복되는 극심한 폭력을 참다못한 원생들이 집단 탈출한 곳.
원장 노 씨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원생들을 끌고 나와 국회의원들을 막아섰다.
"원장 노 모 씨와 원생 25명이 욕설을 퍼부으며 폭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욕설과 멱살잡이, 폭력이 난무하던 대치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대전 성지원 노재중이라는 악질 박인근 원장에 버금가는 악질이에요. 인천 삼영원 원장은 이름 기억 못 하는데 꼭 마찬가지예요. 이 사람들이 형제복지원 수사할 때 떼 지어서 여러 번 몰려왔어요. 떼 지어서 몰려다니며 수사 방해하고….]
그렇다면, 노재중과 박인근은 어떤 관계일까?
YTN 기획탐사팀은 둘의 관계를 추적하던 중, 87년 김용원 검사의 형제복지원 수사 자료에서 노 씨의 이름을 다수 발견했다.
85년 5월 4일 천만 원 횡령, 노재중에게 대여.
85년 1월 25일 2천만 원 횡령, 이듬해 윤 모씨에게 대여.
윤 씨는 노재중의 부인이다.
그런데 노 씨뿐만 아니다.
박인근이 법인 돈을 빼돌려 빌려준 ‘고액 채무자’들은 모두, 수원·서울·마산·인천 등 전국의 부랑인 수용시설 원장들이다.
그들은 돈과 인맥으로 얽혀 87년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박인근을 부랑인 협회장으로 선출할 만큼 탄탄한 관계를 맺었다.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형제복지원장이 돈이 제일 많으니까 수하로 거느리고 자기가 두목 노릇하기 위해 돈으로 엮어놓은 거겠죠. 내가 노예 임대라 명명했는데 인천 삼영원에서 건축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에…. 그러니까 여기서 6백 명을 공급을 해줬어요. 사람을 기차에 실어서 몇 달 동안 노동을 해주고 돌아왔단 말이에요.]
그중에서도 노재중은 박인근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인근은 2016년 사망했다.
노 씨에게 그들의 관계를 직접 물었다.
[노재중 / 前 양지마을·성지원 운영자 : 부랑인 시설을 정부에서 갑자기 하라 그러는 바람에 자부담이 있었어요. 시설별로 자부담이 이제 일부 몇천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데….]
(기자 : 성지원 사건하고 양지마을 사건 두 개가 있더라고요. 혹시 기억하세요?)
"그 당시에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잊어버렸죠. 잊은 지가 오래죠."
(기자: 피해 봤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좀 있는데)
"아니 그럼 그 사람들 얘기를 들으세요. 피해 봤다고 생각한다면 여기는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했으니까."
그러나 기록과 증언은 잊지 않고 있다.
그는 ‘형제복지원식’ 대규모 강제수용소를 운영했고, 민간인을 감금해 돈을 벌었다.
[백순미 / 대전 지역 부랑인 수용시설 연구자 : 사실 사회복지시설을 부산이나 대전이나 가장 크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는 굉장히 큰 거였거든요. 강제 노역이라든가 폭행, 성폭행은 당연한 거고요. 통제하는 방식이 비슷했다는 거죠.]
[김일환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 81년도에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 문건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전국에 수용시설을 어떻게 더 신축하고 규모를 늘려서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넣을지에 대한 대책들이 마련이 되는데 형제복지원이 굉장히 모범적으로 저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한 사례로 꼽히고 그런 모델을 따라서 전국에 있는 공립시설을 다 민영화시키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사람을 때려죽이고, 암매장했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폭력.
그 모든 것이 군사 정권의 기획일까?
[김일환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 부랑인이 단속되는 측면에서 국가의 개입과 권력의 행사 문제가 강하게 나타났지만 실제로 이들을 관리하고 수용하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측면에서는 민간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나 여러 가지 역할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YTN 기획탐사팀은 형제복지원과 양지마을 수용자, 인권운동가, 관련 공무원 등의 증언과 남겨진 기록들을 토대로 80년대 민간인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의 경제적 이유를 분석했다.
이 작업이 중요한 건, 당시 수용시설의 이윤 창출 방식이 지금까지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금의 경제학’은 형제복지원의 수익 구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5공화국의 출범, 사회정화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정부 보조금 비율이 급격히 커진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이른바 ‘거리 청소’가 한창이던 85년에는 그 비중이 무려 91%에 이른다.
머릿수만 늘리면 돈이 되는 구조.
80년대 부랑인 수용시설들이 ‘인간 사냥’에 나선 이유다.
[이상명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부산역에서 TV 보다 잡혀 오신 분도 계시고 중학교 가다가 학교에서 하교하다 잡아간 사람도 있고 우리가 그 사람들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된 거예요.]
납치·감금을 통한 돈벌이는 9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계속됐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IMF 경제 체제라고 하는 특수상황에서 실직 노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음에도 대전역에서는 정기적으로 대합실에서 자는 노숙자들을 짐짝 싣듯이 봉고차에 싣고 천성원으로 끌고 갔었어요.]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폭력은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용자를 관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관리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원생들에게 감투를 주고 서로를 규율하게 하는, 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군대식 조직 체계’도
그래서 탄생했다.
[김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소대장, 중대장, 조장해서 한 사람 잘못하면 그 밑에서 계속 구타를 하니까요.]
축구장 세 개 크기의 형제복지원.
숙소 11개 동, 교회, 학교, 식당, 모든 시설을 수용자들이 지었다.
대가는 없었다.
[허상용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들어간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에 돌 깨는 것처럼 식당 앞에 모래를 엄청 퍼 놓아요. 돌을 깨고 아니면 바윗돌 있거든요. 그런 걸 깨서 골재 자재로….]
[이동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원장이란 박인근 씨는 그 돈을 분명히 받았을 거란 말이야. 일을 그만큼 했으면 예를 들어 하루에 몇천 장 몇만 장을 만들었는데 그걸 공짜로 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다 가로챘을 거라고.]
노동력 착취를 통한 수익 창출 방식은 양지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취재진은 양지마을 부랑인 수용 업무를 했던 전직 지역 공무원을 만났다.
그는 양지마을에서 벌어졌던 강제노동, 노동력 착취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 공사를 하면 업자한테 주면 되는데 인건비를 부랑인 시설 수용인을 투입했어. 그러다 보니 콩고물을 좀 뜯은 거지. 그게 화근이 된 거야 실은 그게.]
[김운구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1987년) : ‘야, 할 수 없이 너희들이 다 발라야 되겠다’ 이거야. 노재중이 쫓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야 이거(시멘트) 바르는데 1,300만 원 나와 견적서 넣으면’ 그래서 우리가 다 안 했습니까.]
대부분의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이뤄진 직업교육도 노동력 착취의 수단이다.
낚싯바늘이나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지만, 그 돈은 대부분 시설 운영자의 주머니로 갔다.
[한종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8년 동안 있으면서 돈 받아 나간 사람은 내 기억으로는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다섯 명도 안 됩니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봉투 같은 거 접는 일을 시킵니다. 아침 눈만 뜨면 6시부터 밥 먹고 나서 이걸 붙이는 거죠.]
형제복지원 수사 자료를 보면, 원장 박인근은 86년 한 해에만 부식비로 지급된 보조금 11억 2천만 원 가운데 절반 이상을 횡령했다.
수용자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연생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1년 동안 거의 삼시 세끼를 핏국을 끓여줬어요. 피에다가. 물만 넣고 소금 조금 넣고….]
[이향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보통 (신발) 바닥들이 다 구멍이에요. 닳아서 이만큼씩(손동작) 구멍 나 있고 그래요.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그런 신발이에요.]
노동 착취와 보조금 횡령 실태는 양지마을 사건으로 3년 형을 선고받은 노재중의 판결문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인건비를 가로채고 수용자 월급과 보험금도 빼앗았다.
요양비, 유류비, 생필품비를 횡령하고, 가족 등을 가짜 직원으로 올려 지원금을 타냈다.
[김운구 /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87년) : 경운기 10마력짜리 대가리 하나 있던 형편인데 지금(87년) 차가 7~8대 되고 포크레인 2대라 이거야. (누가 타고 다닙니까?) 마누라. 노재중이 마누라.]
수용시설 안에서 착취당한 것도 모자라, 사회로 나간 뒤 원장 일가에게 돈을 뜯긴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노인 요양병원.
전신은 80년대 아동 보호 시설 덕성원으로, 당시 원장은 박인근에게 돈을 빌렸던 김 모 씨다.
안종환 씨는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납치됐고 87년에 홀로 덕성원으로 보내졌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 돈을 벌던 안 씨에게 어느 날, 덕성원 김 원장의 아내가 찾아왔다.
[안종환 / 형제복지원·덕성원 피해자 :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천 만 원가량 모아서 생선 업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걸 하다가 한 달에 오백만 원씩 저축했거든요. 어찌 알고 찾아와서 믿고 빌려줬는데 배신감 있지 않습니까. 장가갈 때 분명히 주신다 했는데 이제 와서 돈도 안 주고….]
그렇게 돈을 떼인 덕성원 출신은 안 씨뿐만이 아니다.
[박 모 씨 / 덕성원 피해자 : 내가 그것 때문에 교도소 간 일이 있어서 받아놓은 게 있어요. 내가 1억짜리 아직도 서류 가지고 있어요. 10년이 넘었는데도….]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김 원장의 아들에게 입장을 물었다.
[김 모 씨 / 前 덕성원 원장 아들 :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릴 게 없고 부모님 다 돌아가신 상태고요. 제가 뭐 다른 말씀 드릴 게 없어요.]
(기자: 온 김에 한번 만나주시죠.)
그들이 빼앗아 간 것은, 돈뿐일까.
[안종환 / 형제복지원·덕성원 피해자 : 아기 때부터 가족이랑 대화를 못 해봤어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강하지. 그게 한 맺혀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게 가장 원망스럽죠. 한순간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보하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납치와 감금은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5공화국, 민간인 강제수용소의 수익 창출 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가두고, 폭력으로 규율한다.
"사회복지사들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한 것으로…"
"CCTV가 없는 사각지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는 것을…"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 여성도 목사가 건네준 술을 마시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정부 보조금을 횡령한다.
"농사와 과일 수확 가축 사육에 노예처럼 동원됐습니다."
"시설 보수공사에 동원하는 등 사실상 강제노동을 시켰다는…"
"노숙인들의 밥값까지 가로챈 쉼터 원장이 적발됐습니다."
"보호 아동 29명에게 지급되는 생계 급여와 인건비를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이윤 추구 행위.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영 노하우는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 본성과도 같은 예고된 목적지.
우리 사회 약자들을 돌본다는 비영리 법인에서 벌어지는 가장 세속적인 영리 행위.
그것은 바로 세습이다.
[박 모 씨 / 박인근 둘째 아들 (前 형제복지원 총무) : (기자 : 피해자들한테 사과하실 마음은 없나요?) 내가 무슨 피해자한테…. 그런 거 없어요. 나는 월급 받고 일했으니까 내가 오히려, 내 인생이 오히려 더 피해자지.]
[백순미 / 대전 지역 부랑인 수용시설 연구자 : 부인한테, 자식한테 물려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어마어마한 대재벌이라고 보통 표현을 합니다. 복지재벌.]
[하금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 한국의 공공부조 시스템은 아직까지 형제복지원 체제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찬섭 / 동아대 교수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조사 위원장) :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는 자체를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다음 생에 태어나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자고 우리….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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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화 이룩하자! 사회정화 이룩하자!"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그게 전두환식 접근 방법이에요. 길거리에서 부랑인을 다 청소하면 깨끗하잖아요.]
[이승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찰관이 초코파이를 한 상자 사주고 경찰차에 태워서 갔던 기억이 나요.]
[이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서울대 체육복을 입히니까 (소대장에게) 서울대생 맞냐고 물어보니까. 서울대생 맞는다고 했어요.]
[최 모 씨 / 70-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퇴직 공무원 :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라고 있잖아요. 내왕이 있었거든.]
[문정수 / 前 신민당 의원(87년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단 단장) : (박인근의) 제일 큰 비호세력은 전두환이죠.]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 세종시.
옛 모습은 콘크리트 숲에 묻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신도시를 벗어나면 수십 년째 변함없는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넓은 정원과 짧게 깎은 잔디, 잘 정돈된 나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공간은 한때, 누군가에게, 끔찍한 고통 속에 희망마저 사라진, 지옥이었다.
[옛 양지마을 인근 주민 / 충남 연기군 : 이쪽 (왼쪽?) 네. 이쪽 말고 이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그리로 올라가면 그쪽으로 다… (묘지에요?) 묘지에요. 그 전에 양지원 사람들 죽으면 그리로 다 묻더라고…]
[옛 양지마을 인근 주민 / 충남 연기군 : 옛날 그 양지원. 전두환 대통령 할 때 양지원 거기 몇백 명 죽어서 묻었을 거야 아마 거기 슬슬 묻어서 비 오면 막 나오고 그랬어요.]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방에다가 시체를 가져다가 놔뒀더라고 싣고 가기 전에 이틀 동안 사람이 시신이 갈라지고 피가 나고….]
야트막한 산 중턱에 펼쳐지는 주인 없는 무덤들.
이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랑인 보호시설, 양지마을의 불법 행위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1998년 7월 16일.
새벽을 틈타 시민단체와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부랑인 복지시설, 양지마을의 문을 열었다.
이른바, 햇볕 작전.
"가자! 가자!"
감금과 폭력, 굶주림, 강제노동.
숨겨져 있던 참상이 드러났다.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1998년) : 이쪽 방에서 이쪽까지 화장실 가는 데까지 페인트 방으로 돼 있는데 거기다가 8일 동안을 가뒀어요. 여자를.]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98년) : 작업을 거부한다든가, 바른말을 한다든가 그럼 예외 없이 독방이에요.]
1983년 양지마을이 세워진 이후 무려 15년 동안, 그 안에서 몇 명이 목숨을 잃고 야산에 묻혔을지 모른다.
YTN 기획탐사팀은 수소문 끝에 대전에서 과거 양지마을 수용자를 만났다.
그는 80년대 여러 부랑인 수용시설을 옮겨 다니다, 양지마을에 잠시 머물렀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술 한 잔 잘못 먹은 게 잘못이죠. 그때는 시대가 동네에서 조금 잘못하면 삼청교육대 보내고…. 전두환 시대거든요.]
그런데, 그가 증언하는 폭력의 양상이 1987년에 폭로됐던 부산 형제복지원과 상당히 유사하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한강 다리라든지 사람 다리 머리 목 어깨 해서 만약 다리가 떨어지고 이러잖아요. 그럼 빠따로 치죠.]
[김 모 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한강철교, 한 사람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줄빠따 맞고….]
부산 형제복지원을 떠올리게 하는 건 또 있다.
수용자들에게 계급을 부여해 서로를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드는 ‘군대식 조직’.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신임을 얻은 사람들, 15명인가 뽑아서 선도 완장을 차서 원생이 원생을 감시하게끔….]
[양재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잡혀 온 사람들한테 맞은 겁니다, 결론이 그 사람들이 선도요원 되고 조장, 소장 되어서 군기를 잡으려니까, 어쩔 수 없이 때려야 하고….]
(기자: 98년에 직접 양지마을 가셨던 선생님 맞으시죠?)
"네."
98년 당시 양지마을을 급습해 수용자들을 구조했던 ‘햇볕 작전’의 주역들을 만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질환자, 알코올 중독자 등을 구분 없이 수용하면서 그들의 병리학적 특성마저 시설 운영에 이용했다.
어쩌면 양지마을은 형제복지원보다 더 무서운 지옥이었는지 모른다.
[김병후 / 정신과 의사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조현병 환자는 알코올 중독 환자들의 밥이에요, 말하자면. 밥이라고 하면 말이 이상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은 감성적으로 약한 여린 사람들이니까 알코올 중독인 사람들이 위에서 휘두르는 셈이 되죠.]
그러나 양지마을과 형제복지원이 지속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 이윤 창출 구조는 같다.
사냥하듯 수용자 모으고, 그만큼 정부 보조금이 늘어나면 가로챈다.
[이성재 / 前 국회의원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그냥 사람이 죽지 않고 있어야 정부에서 나오는 돈을 떼어먹을 수 있잖아요. 1인당 100만 원 나오면 50이 내 수입이니까 동물 키우듯 죽지 않게만 해주면 되는 거지.]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80년대 5공화국, 감금의 시대가 낳은 괴물.
양지마을 원장의 이름은 노재중이다.
그는 80년대 초 5공화국 출범과 함께 본격적으로 복지사업을 확장해 천성원이라는 법인 아래 양지마을 이외에도 대전 성지원 등 여러 시설을 운영했다.
87년 2월, 신민당의 보고서.
대장 격인 원생이 곡괭이 자루로 동료 원생을 때려죽였다는, 양지마을 내 끔찍한 살인 사건 조사 기록이다.
[김운구 /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87년) : 중대장 애가 때려서 죽은 애 거기 딱 현장 검열을 나왔을 때…]
당시 신민당은 형제복지원을 계기로 불거진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의 인권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양지마을에 이어 성지원도 찾아간다.
반복되는 극심한 폭력을 참다못한 원생들이 집단 탈출한 곳.
원장 노 씨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원생들을 끌고 나와 국회의원들을 막아섰다.
"원장 노 모 씨와 원생 25명이 욕설을 퍼부으며 폭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욕설과 멱살잡이, 폭력이 난무하던 대치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대전 성지원 노재중이라는 악질 박인근 원장에 버금가는 악질이에요. 인천 삼영원 원장은 이름 기억 못 하는데 꼭 마찬가지예요. 이 사람들이 형제복지원 수사할 때 떼 지어서 여러 번 몰려왔어요. 떼 지어서 몰려다니며 수사 방해하고….]
그렇다면, 노재중과 박인근은 어떤 관계일까?
YTN 기획탐사팀은 둘의 관계를 추적하던 중, 87년 김용원 검사의 형제복지원 수사 자료에서 노 씨의 이름을 다수 발견했다.
85년 5월 4일 천만 원 횡령, 노재중에게 대여.
85년 1월 25일 2천만 원 횡령, 이듬해 윤 모씨에게 대여.
윤 씨는 노재중의 부인이다.
그런데 노 씨뿐만 아니다.
박인근이 법인 돈을 빼돌려 빌려준 ‘고액 채무자’들은 모두, 수원·서울·마산·인천 등 전국의 부랑인 수용시설 원장들이다.
그들은 돈과 인맥으로 얽혀 87년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박인근을 부랑인 협회장으로 선출할 만큼 탄탄한 관계를 맺었다.
[김용원 / 변호사 (87년 형제복지원 수사 검사) : 형제복지원장이 돈이 제일 많으니까 수하로 거느리고 자기가 두목 노릇하기 위해 돈으로 엮어놓은 거겠죠. 내가 노예 임대라 명명했는데 인천 삼영원에서 건축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에…. 그러니까 여기서 6백 명을 공급을 해줬어요. 사람을 기차에 실어서 몇 달 동안 노동을 해주고 돌아왔단 말이에요.]
그중에서도 노재중은 박인근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인근은 2016년 사망했다.
노 씨에게 그들의 관계를 직접 물었다.
[노재중 / 前 양지마을·성지원 운영자 : 부랑인 시설을 정부에서 갑자기 하라 그러는 바람에 자부담이 있었어요. 시설별로 자부담이 이제 일부 몇천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데….]
(기자 : 성지원 사건하고 양지마을 사건 두 개가 있더라고요. 혹시 기억하세요?)
"그 당시에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잊어버렸죠. 잊은 지가 오래죠."
(기자: 피해 봤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좀 있는데)
"아니 그럼 그 사람들 얘기를 들으세요. 피해 봤다고 생각한다면 여기는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했으니까."
그러나 기록과 증언은 잊지 않고 있다.
그는 ‘형제복지원식’ 대규모 강제수용소를 운영했고, 민간인을 감금해 돈을 벌었다.
[백순미 / 대전 지역 부랑인 수용시설 연구자 : 사실 사회복지시설을 부산이나 대전이나 가장 크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는 굉장히 큰 거였거든요. 강제 노역이라든가 폭행, 성폭행은 당연한 거고요. 통제하는 방식이 비슷했다는 거죠.]
[김일환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 81년도에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 문건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전국에 수용시설을 어떻게 더 신축하고 규모를 늘려서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넣을지에 대한 대책들이 마련이 되는데 형제복지원이 굉장히 모범적으로 저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한 사례로 꼽히고 그런 모델을 따라서 전국에 있는 공립시설을 다 민영화시키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사람을 때려죽이고, 암매장했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폭력.
그 모든 것이 군사 정권의 기획일까?
[김일환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 부랑인이 단속되는 측면에서 국가의 개입과 권력의 행사 문제가 강하게 나타났지만 실제로 이들을 관리하고 수용하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측면에서는 민간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나 여러 가지 역할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YTN 기획탐사팀은 형제복지원과 양지마을 수용자, 인권운동가, 관련 공무원 등의 증언과 남겨진 기록들을 토대로 80년대 민간인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의 경제적 이유를 분석했다.
이 작업이 중요한 건, 당시 수용시설의 이윤 창출 방식이 지금까지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금의 경제학’은 형제복지원의 수익 구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5공화국의 출범, 사회정화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정부 보조금 비율이 급격히 커진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이른바 ‘거리 청소’가 한창이던 85년에는 그 비중이 무려 91%에 이른다.
머릿수만 늘리면 돈이 되는 구조.
80년대 부랑인 수용시설들이 ‘인간 사냥’에 나선 이유다.
[이상명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부산역에서 TV 보다 잡혀 오신 분도 계시고 중학교 가다가 학교에서 하교하다 잡아간 사람도 있고 우리가 그 사람들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된 거예요.]
납치·감금을 통한 돈벌이는 9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계속됐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IMF 경제 체제라고 하는 특수상황에서 실직 노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음에도 대전역에서는 정기적으로 대합실에서 자는 노숙자들을 짐짝 싣듯이 봉고차에 싣고 천성원으로 끌고 갔었어요.]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폭력은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용자를 관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관리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원생들에게 감투를 주고 서로를 규율하게 하는, 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군대식 조직 체계’도
그래서 탄생했다.
[김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소대장, 중대장, 조장해서 한 사람 잘못하면 그 밑에서 계속 구타를 하니까요.]
축구장 세 개 크기의 형제복지원.
숙소 11개 동, 교회, 학교, 식당, 모든 시설을 수용자들이 지었다.
대가는 없었다.
[허상용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들어간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에 돌 깨는 것처럼 식당 앞에 모래를 엄청 퍼 놓아요. 돌을 깨고 아니면 바윗돌 있거든요. 그런 걸 깨서 골재 자재로….]
[이동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원장이란 박인근 씨는 그 돈을 분명히 받았을 거란 말이야. 일을 그만큼 했으면 예를 들어 하루에 몇천 장 몇만 장을 만들었는데 그걸 공짜로 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다 가로챘을 거라고.]
노동력 착취를 통한 수익 창출 방식은 양지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취재진은 양지마을 부랑인 수용 업무를 했던 전직 지역 공무원을 만났다.
그는 양지마을에서 벌어졌던 강제노동, 노동력 착취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 공사를 하면 업자한테 주면 되는데 인건비를 부랑인 시설 수용인을 투입했어. 그러다 보니 콩고물을 좀 뜯은 거지. 그게 화근이 된 거야 실은 그게.]
[김운구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1987년) : ‘야, 할 수 없이 너희들이 다 발라야 되겠다’ 이거야. 노재중이 쫓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야 이거(시멘트) 바르는데 1,300만 원 나와 견적서 넣으면’ 그래서 우리가 다 안 했습니까.]
대부분의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이뤄진 직업교육도 노동력 착취의 수단이다.
낚싯바늘이나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지만, 그 돈은 대부분 시설 운영자의 주머니로 갔다.
[한종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8년 동안 있으면서 돈 받아 나간 사람은 내 기억으로는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다섯 명도 안 됩니다.]
[우 모 씨 / 양지마을·성지원 피해자 : 봉투 같은 거 접는 일을 시킵니다. 아침 눈만 뜨면 6시부터 밥 먹고 나서 이걸 붙이는 거죠.]
형제복지원 수사 자료를 보면, 원장 박인근은 86년 한 해에만 부식비로 지급된 보조금 11억 2천만 원 가운데 절반 이상을 횡령했다.
수용자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연생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1년 동안 거의 삼시 세끼를 핏국을 끓여줬어요. 피에다가. 물만 넣고 소금 조금 넣고….]
[이향직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보통 (신발) 바닥들이 다 구멍이에요. 닳아서 이만큼씩(손동작) 구멍 나 있고 그래요.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그런 신발이에요.]
노동 착취와 보조금 횡령 실태는 양지마을 사건으로 3년 형을 선고받은 노재중의 판결문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인건비를 가로채고 수용자 월급과 보험금도 빼앗았다.
요양비, 유류비, 생필품비를 횡령하고, 가족 등을 가짜 직원으로 올려 지원금을 타냈다.
[김운구 / 양지마을 ·성지원 피해자(1987년) : 경운기 10마력짜리 대가리 하나 있던 형편인데 지금(87년) 차가 7~8대 되고 포크레인 2대라 이거야. (누가 타고 다닙니까?) 마누라. 노재중이 마누라.]
수용시설 안에서 착취당한 것도 모자라, 사회로 나간 뒤 원장 일가에게 돈을 뜯긴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노인 요양병원.
전신은 80년대 아동 보호 시설 덕성원으로, 당시 원장은 박인근에게 돈을 빌렸던 김 모 씨다.
안종환 씨는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납치됐고 87년에 홀로 덕성원으로 보내졌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 돈을 벌던 안 씨에게 어느 날, 덕성원 김 원장의 아내가 찾아왔다.
[안종환 / 형제복지원·덕성원 피해자 :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천 만 원가량 모아서 생선 업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걸 하다가 한 달에 오백만 원씩 저축했거든요. 어찌 알고 찾아와서 믿고 빌려줬는데 배신감 있지 않습니까. 장가갈 때 분명히 주신다 했는데 이제 와서 돈도 안 주고….]
그렇게 돈을 떼인 덕성원 출신은 안 씨뿐만이 아니다.
[박 모 씨 / 덕성원 피해자 : 내가 그것 때문에 교도소 간 일이 있어서 받아놓은 게 있어요. 내가 1억짜리 아직도 서류 가지고 있어요. 10년이 넘었는데도….]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김 원장의 아들에게 입장을 물었다.
[김 모 씨 / 前 덕성원 원장 아들 :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릴 게 없고 부모님 다 돌아가신 상태고요. 제가 뭐 다른 말씀 드릴 게 없어요.]
(기자: 온 김에 한번 만나주시죠.)
그들이 빼앗아 간 것은, 돈뿐일까.
[안종환 / 형제복지원·덕성원 피해자 : 아기 때부터 가족이랑 대화를 못 해봤어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강하지. 그게 한 맺혀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게 가장 원망스럽죠. 한순간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보하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납치와 감금은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5공화국, 민간인 강제수용소의 수익 창출 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가두고, 폭력으로 규율한다.
"사회복지사들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한 것으로…"
"CCTV가 없는 사각지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는 것을…"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 여성도 목사가 건네준 술을 마시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정부 보조금을 횡령한다.
"농사와 과일 수확 가축 사육에 노예처럼 동원됐습니다."
"시설 보수공사에 동원하는 등 사실상 강제노동을 시켰다는…"
"노숙인들의 밥값까지 가로챈 쉼터 원장이 적발됐습니다."
"보호 아동 29명에게 지급되는 생계 급여와 인건비를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이윤 추구 행위.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영 노하우는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 본성과도 같은 예고된 목적지.
우리 사회 약자들을 돌본다는 비영리 법인에서 벌어지는 가장 세속적인 영리 행위.
그것은 바로 세습이다.
[박 모 씨 / 박인근 둘째 아들 (前 형제복지원 총무) : (기자 : 피해자들한테 사과하실 마음은 없나요?) 내가 무슨 피해자한테…. 그런 거 없어요. 나는 월급 받고 일했으니까 내가 오히려, 내 인생이 오히려 더 피해자지.]
[백순미 / 대전 지역 부랑인 수용시설 연구자 : 부인한테, 자식한테 물려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어마어마한 대재벌이라고 보통 표현을 합니다. 복지재벌.]
[하금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 한국의 공공부조 시스템은 아직까지 형제복지원 체제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찬섭 / 동아대 교수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조사 위원장) :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는 자체를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다음 생에 태어나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자고 우리….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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