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 잘 못 먹은 번데기에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남들 다 좋다는 휴양지에서 소나기와 돌풍을 얻어맞아 엉망인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다.
여행지의 첫 인상은 어쩌면 이보다 더 간단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억 속에 남는다.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청송 주산지와 대낮의 열기가 가득한 그곳이 같을 수 없고,
태풍 주의보가 내려져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제주용머리 해안의 낙조가 수학여행 시즌에
학생들로 발 디딜 틈새가 없는 때의 그것과 같을 리가 없다.
이미지 확대 보기
![울진]()
그래서 망양정은 좋았다. 날씨도 선선했고,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피천 제방길과 바닷가도 산책하기에 너무나 고요하고 좋아보였다.
아무도 없는 곳은 대체로 모든 것이 좋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다.
홍콩의 야경을 보며 그 왁자지껄한 침사추이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산속의 독거노인은 자연인이지만, 도시속의 자연인은 독거노인일 뿐이다.
이미지 확대 보기
![울진]()
망양정에 오르니 관동팔경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관동팔경을 입으로 소리 내니 관동별곡이 따라온다.
관동별곡에 대해 많은 걸 알진 못하나 정철의 삶을 생각해보면 더 알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제되었으나 의도가 다분한 문인의 글보다 팔도 유람하는 한량의 스산함을 좋아하는 취향인데다,
그 많고 많은 정나미 떨어지는 조선의 관료 중에서도 하필 선조와 연관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철을 생각해서인지 이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아마도 조선시대 이곳에서 '좋구나'를 연발하는 사람들은 정철 같은 지체 높은 양반들일 것이고,
평민은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을 터였다.
이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미지 확대 보기
![울진]()
그래서 사전 지식을 버리고 왕피천이 흘러드는 울진 바다만 바라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정철이 소환된다.
유유자적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힘, 이것은 동시대에 권력을 가진다는 것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일 것이다.
문인과 정치인 중 어느 것도 놓지 않으려 한 그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그저 재능 있고 욕심 많은 캐릭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소회도 아까울 정도로 그저 권력의 모든 종속변수로 그 많은 글을 동원한 것일까.
그 이유야 어찌됐건 이곳 망양정에서 다시 떠올린 그는 정치인이라는 기름이 대부분 지워지고 문인이라는 물만 남았으니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대부분이 교과서의 정철을 접하고 공부했어야 하지 않는가.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가 남긴 결과물의 우수성만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어쩌면 사람 뿐 만이 아니라 피라미드, 만리장성, 타지마할 등 우리가 감탄하는 모든 왕조의 유물이 그러하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갈려서 없어진 것일까.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쩌다 이 좋은 곳에서 정철이 떠올라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뿐이다.
트래블라이프=양혁진 dwhhhj@naver.com
스토리텔링 중심의 여행 전문 미디어
트래블라이프 www.travel-life.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