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7년 만에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톈진에서 열리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이번 방문은 단순한 외교 일정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의 준동맹 관계를 자부하던 인도가, 이제는 중국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인도 정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도산 제품에 최대 50%의 관세 폭탄을 부과하고, 인도의 숙적 파키스탄의 편을 들고, 인도의 레드라인으로 불리는 카슈미르 분쟁 중재까지 제안했습니다.
일련의 조치는 미중 패권 경쟁의 균형추였던 인도를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중국은 그런 인도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
중국과 3,488km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충돌하는 최전선입니다.
인도양의 전략적 요충지, 세계 최대인 14억 인구와 4조 달러 규모의 경제력, 그리고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는 어느 쪽에 기울든 균형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인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2001년 핵개발 제재 해제, 2008년 원자력 협력 협정, 2016년 '주요 방위 파트너' 지정, 그리고 쿼드(Quad) 안보 협의체 구성까지.
이 모든 것은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인도-중국 갈등의 역사적 배경과 급격한 전환
인도와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갈등과 경쟁의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대립의 표면적 뿌리는 국경전쟁.
현재도 히말라야를 따라 형성된 국경선의 상당 부분이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2020년 6월 갈완 계곡 충돌은 이러한 긴장이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45년 만에 처음으로 양측 군인들이 사망하는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이후 인도는 틱톡을 비롯한 중국 앱 200여 개를 금지하고, 중국 기업의 투자를 차단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간 인도의 대중국 수입은 오히려 75% 늘어나 연간 1,14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인도 제약업계가 원료의 70%를 중국에 의존하고, 스마트폰 수출에도 중국산 부품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이중 실책…관세와 파키스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쪽으로 기울었던 인도의 균형추가 중국 쪽으로 급선회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에 떨어뜨린 관세 폭탄입니다.
처음에는 인도가 농업 시장 개방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25% 관세를 부과했고, 이어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문제 삼아 추가 25%를 얹어 총 50%라는 전례 없는 관세를 매겼습니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 최대 수입국인 중국이 제재를 피한 반면, 서방의 가격 상한제를 준수하던 인도에만 징벌성 관세를 부과한 것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합니다.
둘째, 파키스탄 문제입니다.
지난 5월, 카슈미르에서 테러 공격으로 26명이 사망한 뒤 인도와 파키스탄은 나흘 동안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자신이 분쟁을 해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카슈미르 문제 중재를 제안하고, 파키스탄의 실질적 권력자 아심 무니르 육군참모총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습니다.
이는 인도에게 심각한 굴욕이었습니다.
인도는 200년 가까운 식민지 경험 속에서, 외부 세력이 국경을 긋고 갈등을 조장하는 과정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상처는 반서방 정서로 이어졌고, 주권과 영토 문제에 대한 외부 개입에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왔습니다.
특히, 카슈미르는 인도의 국가 정체성과 직결된 상징적 공간입니다.
1947년 독립 이후 인도는 일관되게 "카슈미르 문제만큼은 양자 간에만 다룬다"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렇기에 트럼프가 제시한 중재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식민의 기억을 다시 건드린 치명적 모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권은 양보 못해도 무역은 협상 가능"…실리외교 펼치는 인도
인도는 이른바 '다중 정렬(multi-alignment)' 외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특정 진영에 완전히 기울지 않으면서도, 강대국과 실리를 기반으로 한 관계를 병행해 나가는 전통적 외교 전략이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절대적 국익 사안에서는 입장을 굽히지 않되, 무역과 같은 실익이 있는 부분은 양보한다"는 인도 외교의 원칙을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일부 줄이고 미국산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는 것은 가능한 타협안입니다.
그러나 파키스탄 문제나 카슈미르 중재 같은 핵심 주권 사안에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중 패권 경쟁의 새로운 변수
트럼프 대통령의 대인도 정책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견제의 핵심 파트너였던 인도를 스스로 멀어지게 한 건, 전략적 관점에서 자충수에 가까운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입니다.
미국이 스스로 인도를 밀어내면서, 중국은 아무 노력 없이 최대의 지정학적 위협 하나를 중립화시킬 기회를 얻었습니다.
물론 인도-중국 관계가 하루아침에 우호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경 분쟁, 파키스탄 문제, 인도양에서의 영향력 경쟁 등 구조적 갈등 요인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공통의 압박 요인이 생기면서, 양국은 실용적 협력의 공간을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인도의 선택과 미래 전략
인도의 대응 전략으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시나리오 1, 트럼프와의 제한적 타협 모색입니다.
인도는 아직 미국 관세에 보복하지 않았고, 트럼프를 공개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9월 유엔총회에서 모디-트럼프 정상회담 가능성도 점쳐집니다.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 약속이나 러시아산 원유 수입 소폭 감축 등으로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시나리오 2,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입니다.
미국 관세 부과 이후 모디 총리는 푸틴 대통령과 두 차례 통화했고, 인도 외무장관은 모스크바에서 무역 확대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연내 푸틴 대통령의 인도 방문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톈진서 한자리 모인 모디·시진핑·푸틴…"다극화 시대 서막 올랐다"
8월 31일 톈진에서 모디, 시진핑, 푸틴이 한자리에 모인 장면은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인도의 선택은 진행형입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도 있고, 중국과의 협력이 예상보다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인도가 독자 노선을 개척하며 제3의 길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14억 인구와 젊은 인구 구조, 성장하는 경제력을 가진 인도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열려 있습니다.
분명한 건 지금의 국면이 미국의 쇠퇴나 중국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국제 질서, 다시 말해 미중 양극 체제를 넘어선, 더 다원적이고 복잡한 국제 질서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획·구성 : 김재형(jhkim03@ytn.co.kr)
제작 : 이형근(yihan3054@ytn.co.kr)
참고 기사: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YTN digital 김재형 (jhkim03@ytn.co.kr)
YTN digital 이형근 (yihan3054@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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