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길선, 김덕홍 부실장 비서
[앵커]
북한 주체 사상의 정립자. 그리고 최고위급 탈북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입니다. 황 비서와 함께 탈북했었던 동지죠. 김덕홍 씨의 회고록이 연일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황장엽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을 적으로 규정했었다. 그리고 미국의 북한 망명정부 수립을 시도했었다라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서울에 당시 왔었던 장성택한테 쪽지전달도 시도했었다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김덕홍 씨는 현재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방송 인터뷰가 여의치가 않습니다. 저희가 오늘 황장엽 전 비서 그리고 김덕홍 고문의 비서 역할을 했었고 본인도 김일성대 출신이고 북한 관영매체 기자였습니다. 탈북자 김길선 씨 이번 회고록 출간에도 많은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저희가 오늘 초대했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안녕하십니까? 방송에서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인터뷰]
여태까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앵커]
방송 출연 안 하셨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인터뷰]
네,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덕홍 선생님을 오랫동안 모셨다 하니까 함부로 말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분의 보안도 문제가 있고. 또 찾아주는 데도 없었습니다.
[앵커]
황장엽 전 비서 그리고 김덕홍, 지금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문이고요. 그분들하고 어떤 관계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인터뷰]
제가 1999년 1월 16일에 대한민국에 들어왔습니다. 4월 말에 나와서. 황장엽 선생의 비서로 복무를 했습니다. 그때는 국가정보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황장엽 선생이 그때 들어가서 6월말까지 황장엽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그후에 황장엽 선생이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네가 덕홍이한테 가야 되겠다. 동생한테 가서 네가 도와줘야겠다고 해서 그다음에 김덕홍 선생 비서로 또 황장엽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국정원하고 통일됐다면서 이야기를 해 줬어요.
[앵커]
얘기가 됐다, 국정원하고.
[인터뷰]
그때부터 제가 김덕홍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앵커]
이번에 김덕홍 고문께서 회고록 출간할 때 그때는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인터뷰]
김덕홍 선생님 회고록이 한두 해에 해서 나온 게 아닙니다. 김덕홍 선생님이 노무현 참여정부 때 심각한 4년간 법적소송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많이 타격을 입고 심신에 타격을 많이 입고 재판이 끝나고 부터 많이 앓으셨어요.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래도 내가 건강이 심상치 않은데 내가 글을 좀 써야 되겠다. 그분이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 맨처음에 나온 책이 이 책이었습니다. 이걸 누구도 출판해 주겠다는 데도 없고요.
[앵커]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청자 분들이 보셔야 되니까요.
[인터뷰]
그래서 이게 성사가 안 됐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초고 같은 거군요, 지금 나온 회고록의. 제목도 백화만발한 새 봄을 위해. 다르고요. 보시면 2007년 4월 26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때부터 계속 도와주셨던 거군요?
[인터뷰]
원래 황장엽 선생님과 김덕홍 선생님이 컴퓨터 타이핑을 못 치십니다. 그 두 분은 다 손으로 쓰십니다. 그리고 손으로 쓴 걸 제가 타이핑으로 다 쳐서 다시 드리면 그걸 읽어보시고 또 틀린 것은 또 지적해 주시면 또 고치고 이런 역할로서 많이 도와드렸죠.
[앵커]
그러니까 내용에 대해서는 저자만큼이나 다 숙달하고 계시겠군요.
[인터뷰]
그렇죠. 한 건, 한 건을 김덕홍 선생님이 10번, 20번을 수정하셨어요. 10번, 20번 수정하면 저는 10번, 20번을 타이핑 쳐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제 눈감고도 쭉 외울 수 있어요.
[앵커]
그러시군요. 사실 저희가 듣기로 김길선 씨의 북한에서의 생활, 그리고 왜 거기서 최고위급의 지위를 누리셨는데 어떻게 해서 그걸 잃고 탈북하게 되셨는지. 그것도 하나의 드라마더라고요. 그 이야기까지 오늘 다 하기는 저희가 다 듣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다음에 다시 모셔서 들으려고 합니다.
[인터뷰]
수정해도 되는지. 저는 최고위급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국가의 김일성 왕좌의 기틀을 이루는 제일 중요한 출판사에서 정책기자로서 17년 근무했습니다.
[앵커]
기자로 일하시고. 황장엽 선생의 딸하고는 김일성대.
[인터뷰]
김일성 종합대학교 때 황장엽 선생님의 따님인 황선희, 저한테는 언니죠. 언어학과 출신이고 저는 고전문학과 출신이고. 우리는 한 층에서 여자 화장실도 같이 쓰면서.
[앵커]
그러니까 선배군요.
[인터뷰]
1년 선배입니다.
[앵커]
그래서 황장엽 비서도 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러셨다고요?
[인터뷰]
네. 그런데 제가 글씨를 좀 잘 써서 그때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모든 대학생 명단, 모든 문서들을 손으로 다 쓰는 거예요. 거기에 많이 동원이 돼서 황장엽 선생도 저를 몇 번 보셨던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대학 총장이라고 해서 많이 봤는데. 저를 만나자마자 재깍 알아보시더라고요.
[앵커]
그렇군요.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다시 회고록 얘기로 돌아가자면 제일 많이 보도가 되고 많은 분들에게 회자가 됐었던 것이 황장엽 전 비서, 김덕홍 고문이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때 국정원을 아예 적이라고 규정하고 그렇게 쓰기도 했었다라고 하는데.
[인터뷰]
그건 사실이죠.
[앵커]
왜 그렇게 됐던 겁니까?
[인터뷰]
그때는 제가 두 분의 곁, 제일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 말하자면 2001년인가 미국 방문이 제기가 됐을 때 국정원이 못 간다고 해서 압력을 좀 행사를 했어요. 그분들이 뜻이 또 따로 있었겠죠.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계시는 보수 원로분들이 두 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김덕홍 선생 탈북자 동지 사무실을 자주 찾아왔었어요, 많은 원로분들이. 찾아와서 정부가 안 보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서 나 미국에 가서 북한인권문제를 증언해야 된다.
만약에 미국에 가게 되게 된다면 김대중 정부가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마시라, 위험할 수 있다, 이런 충고들을 많이 했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때 옆에서 받아적고 그랬거든요. 그거하고 맞아떨어져서 어느 날인가 그때 당시 국정원장이 김덕홍 선생을 많이 불러서 당신들이 미국에 가는 것은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몇 달만 있으면 당신들을 암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국정원장이 통지를 한 거예요.
[앵커]
암살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국정원이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마음 먹는다면. 예컨대 북한 정권이라든가. 그런 이야기인가요?
[인터뷰]
의도는 그거죠. 우리가 돈을 300만달러만 줘서 청수업자를 사서 내가 죽일 수 있다는 그런 뜻인 것 같아요. 그분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그게 맞아떨어져서 아, 이건 적이로구나 해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황장엽 선생이 여기 원로분들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위협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글도 나왔죠.
[앵커]
그 당시에 썼던 편지, 저희가 사진을 준비했는데요. 편지를 사진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편지가 황장엽 선생께서 쓰신 거죠?
[인터뷰]
황장엽 선생님의 자필입니다.
[앵커]
저기에 보면 몇 가지 방안들. 잠깐 보시죠. 지금 아마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읽고 계실 텐데요. 저기에 보면 몇 가지 방안들이 나오고 그중에서 국정원을 적이라고 직접 지칭한 그런 내용들이 나오네요. 그래서 보니까 아예 미국 가서 오래 있을 것인지, 그러니까 사실상 망명. 망명이라는 표현도 쓰셨습니까?
[인터뷰]
네, 쓰셨습니다.
[앵커]
미국으로 망명을 다시 한 번 할 것을 생각을 하셨군요.
[인터뷰]
제가 이 문제를 놓고 그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제일 안타까운 건 두 분이 애초에 망명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망명해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패가 그쪽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래서 김덕홍 선생님은 이건 실현 불가능한데... 어떤 충동적인 분들이 자기네가 황장엽 선생을 어떻게 어떻게 해서 미 대사관으로 안내하고서 언론 공포하고. 대화가 오고갔는데 김덕홍 선생님, 황장엽 선생님이 글을 그렇게 썼지만 이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앵커]
북한 망명 정부를 미국에서 세우는 방안도 고려했었다라는 보도도 있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인터뷰]
아, 그것은 그때 없었죠. 왜냐하면 미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 못 간다, 간다, 못 간다 그런 상황에서 망명 정부를 논하고. 그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이고요. 김덕홍 선생은 황장엽 선생이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망명 정부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 후에 두 분이 갈라선 다음에 황장엽 선생 그쪽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덕홍 선생님하고 황장엽 선생님이 같이 계실 때는 결별하지 않았을 때 그런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앵커]
망명정부 얘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
[인터뷰]
없었습니다.
[앵커]
이 회고록에 보니까 2차 남북정상회담 후에 국정원 차장이 김정일의 황장엽 비서에 대한, 김정일의 언급을 전하면서 황장엽 비서에게 이야기했다는 그 내용도 있더라고요.
[인터뷰]
저도 그때 그 옆에서 두 분을 모시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 날이면 저도 전해듣고 했어요. 그때도 많이 분개했죠.
[앵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인터뷰]
그때 말한 게 좌우지간 북한에 갔다온 남측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분들이 북한에 갔다와서 아마 말한 것 같아요. 김정일 위원장이 황 선생이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면 받아주겠다고 하면서 이 말을 황장엽한테 전달해 주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서 내가 황 선생의 의향을 묻는데 황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것 같아요.
[앵커]
우리 국정원 차장이요.
[인터뷰]
황장엽 선생님이 너무 격분했거든요. 그분은 망명에 대한 의지를 우롱하는 것이고. 그분 인격 자체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분이 큰 희생을 대가를 치르고 오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적국에서 왔는데 도로 가라고 어떻게 권유를 합니까? 그러니까 너무 분해서 그 말을 김덕홍 선생한테 전해드립니다. 야, 그것들이 나를 이렇게 말하더라. 그래서 김덕홍 선생이 그때 형님보다도 더 화가 난다 하면서 대응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앵커]
김대중 대통령 때 그때 장성택이 우리나라에 한번왔었죠. 경제사절단으로. 그때 황장엽 비서가 쪽지를 전달하려고 했었다. 그것은 사실입니까?
[인터뷰]
저는 황장엽 선생님이 지금 안 계시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는데 황장엽 선생이 북한 시스템도 잘 알고 계시고 대외 나왔을 때 어떤 감시가 따라붙고 다 아는데 황장엽 선생이 그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질 않아요. 황장엽 선생의 망명 문제 때 옆에서 바람잡이처럼 했던 그런 현상이 그때 있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앵커]
그러니까 그것은...
[인터뷰]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확인하지 못했지만 황장엽 선생은 누구보다도 그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알고 계세요. 그런 분이 한국에 와서 장성택 죽으라고 그런 것을 쓰겠습니까? 그것은 아니죠.
[앵커]
그 내용은 회고록에 들어있지 않가요.
[인터뷰]
그런 건 몰랐으니까요.
[앵커]
전체적으로 김덕홍 고문 그리고 황장엽 전 비서께서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때 국정원, 더 크게 보면 정권, 정부에 대해서 매우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한쪽 편에서 보자면 그 당시에 남북관계가 진전이 되고 잘해 보려고 하고. 그런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황장엽 전 비서나 김덕홍 씨가 그런 것의 방해물이 될 것이라고 판단을 할 수 있수도 있고. 대북적인 차원에서는 그런 면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인터뷰]
그것은 그때 당시 대통령들의 스케일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그래요. 원칙적이라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에 입각한다면 민간인이 하는 대로 놔두고 정부는 정부대로 나가면 되는 거죠. 그 사소한 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글쎄요. 지금 오늘날 현실이 어떻게 됐습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그게 잘 된 선택은 아니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앵커]
이 회고록에 보니까 김덕홍 고문께서 북한에 있을 때 당 주체사상연구소장 지내셨고 당노동당 자료연구실 부실장을 지내시고 그래서 희귀한 자료들에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위치였고 그래서 여러 가지 비화들이 있던데 우선 김일성이 내가 결혼 3번했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그것이 흥미롭던데 그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인터뷰]
저도 김덕홍 선생이 그 글을 쭉 쓰셨을 때 제가 이해되는 측면이 하나 있었어요. 왜냐하면 최희숙 씨, 여기에 나오는 김일성의 둘째 부인이라는 최희숙.
김용한이라는 분이 쓰셨는데 그분의 빨치산 경력은 그거밖에 안 돼요. 일본놈들이 눈알을 뽑고 죽였다. 이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열사릉을 가보면 최희숙을 기라성같은 빨치산들 다 재끼고 제일 윗쪽에 김정숙과 같이 놨어요. 그래서 저도 그때 열사를 보면서 최희숙이 왜, 여기에 있지? 그건 엄격한 나라입니다.
그런 사람을 등분화하고 차별화하는 건 김일성 족속을 못 따라가요, 북한. 그런데 최희숙을 어떤 빨치산에서 그렇게 요란한 공로를 세운 것도 없는데 왜 윗단에 놨을까. 내가 항상 의문이 있었어요. 김덕홍 선생이 글 쓴 걸 보고 이해했어요. 아, 이런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김정숙과 같은 반열이 놨구나.
그런데 이건 김덕홍 선생이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게 한설야가 쓴 글이래요. 그래 장가는 나갔느냐 했느냐 했더니 가도 세 번이나 갔습니다라고 해서 나온 겁니다.
[앵커]
1945년에 고향 가서 가자마자 내가 이미 장가 세 번을 갔다고 말 하는 게. 그 기사는 완전히 삭제되어 버렸다면서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우상화에서 치명적이니까.
[앵커]
김정일이 전두환한테 넘어갔다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그 이야기도 짧게 해 주세요.
[인터뷰]
저는 김덕홍 선생님이 이 회고록을 정리를 해 주면서 그 대목을 볼 때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우리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 말이 돌았댔어요. 전두환 때문에 북한이 허리가 꺾어졌다고.
[앵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터뷰]
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거예요. 김덕홍 선생 이 책에서 이렇게 쓴 걸 보고 아, 그래서 그 말이 김정일이 입에서 부터 흘러나온 말이로구나. 이 책을 정리를 하면서 제가 감을 잡았습니다.
[앵커]
수혜지원을 하려고 했는데 받겠다고 할 줄 몰랐는데 덥석 받겠다고 하니까 그것을 받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인터뷰]
그거죠.
[앵커]
알겠습니다. 이 회고록을 읽어보면 김일성이 이미 1950년대부터, 55년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라는 내용도 담겨있고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김길선 씨의 북한에서의 기자생활 그 이후 파란만장했던 그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다음 번에 저희가 모셔서 다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