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정아 앵커
■ 출연 : 김병민 / 경희대 겸임교수, 김성완 / 시사평론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97세를 일기로 어젯밤 11시 37분에 별세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치열한 생의 여정을 마감한 이희호 여사.
그 발자취를 지금부터 김병민 경희대 겸임교수, 김성완 시사평론가 두 분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희호 여사 하면 단순히 영부인을 넘어서 민주화 운동도 하셨고 또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시기도 하고 말년에 평화운동도 하셨던. 어떻게 보면 현대사에 굉장히 큰 획을 그은 이런 여성 인물입니다.
[김성완]
맞습니다. 보통 대통령 영부인 하면 영부인으로만 기억이 되는데 이희호 여사는 그런 분으로 기억되지 않고요.
영부인이 되시기 전에도 이미 민주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주화운동을 많이 하셨고요.
방금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일제치하를 겪고 난 다음에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그리고 여성운동을 곧바로 시작하셨던.
요즘에 남녀 갈등이 되게 많다, 성, 젠더 갈등이 많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굉장히 진보적 여성운동을 하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분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고 그리고 정치에 뛰어들고. 그 엄혹한 시절을 다 함께 겪어왔던 그런 분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성, 또 영부인으로 우리가 기억하기보다는 우리 시대에 한 획을 그은 큰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앵커]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개인의 영달보다는 일생을 여성운동가, 이 부분을 굉장히 주목해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김병민]
한국전쟁 당시 1952년 부산으로 가서 처음으로 했던 일 중에 하나가 여성문제 연구원을 설립하게 되는데요.
이희호 여사가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돌아오고 나서 사실은 사회 운동에 헌신하면서 했던 첫 번째 캠페인이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혼인신고를 합시다가 캠페인이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말 그대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로 축첩의 형태로서 이루어지게 되는 잘못된 관행들이 남아 있었을 때였기 때문에 당시에 요정정치를 반대하는 이런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국회에 축첩자를 보내지 말자라고 하는 이런 운동들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우리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1950년대를 생각해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참 많이 먼저 앞서서 이행해 나갔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고요.
굉장히 오랜 기간 공부를 했던 신여성으로도 볼 수가 있는 건데 이화고등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그리고 나서 서울대학교 사범대를 나오고 나서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돌아오게 되면 사실 사회에 중요한 역할들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을 통해서 본인이 헌신, 그러니까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재능들을 사회에 헌신하기로 노력했던 이희호 여사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추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핀란드를 방문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도 별세 소식에 추모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희호 여사도 각별하지 않습니까?
[김성완]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큰 어른이었던 거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셨던 분들 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늘 가서 기댈 수 있는 분. 그러니까 그런 분으로 기억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흔히들 얘기하지만 진보 성향의 어떤 정치인이 있으면 대선 출마라든가 아니면 정치에 뜻이 있으면 꼭 이희호 여사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잖아요. 그럴 정도로.
그분의 그늘이 그만큼 컸다고 하는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들을 밟았다고 볼 수 있고요.
그런 측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자산, 업적 이런 것들을 이희호 여사가 고스란히 함께 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 입장에서도 아주 각별한 분이었다고 기억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또 이희호 여사 같은 경우에는 보통의 경우에는 누구의 부인 이렇게 기억되잖아요.
한국 사회가 좀 그런 분위기가 있고 뒤에서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셨다 이렇게 보통 표현되는데 그런 분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원자이기도 하면서 정치적 동지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치적 동지라고 하는 건 누구한테 예속이 되거나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돕는 이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정치운동을 펼쳤던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꼭 이희호 여사 이름이 거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민주화운동을 했었던 사람들한테 이희호 여사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각별한 분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앵커]
그렇죠. 영부인이지만 이희호 여사 독자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그래서 굉장히 많은 이런 분이기도 한데 조금 전에 김대중평화센터가 이희호 여사의 유언을 공개했어요.
[김병민]
두 가지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기도를 할 것인데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겼던 최고의 정치적 업적을 이어가기 위해서 한반도에 지금 굉장히 평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평화를 위해서 한걸음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존재하고 있는데요.
그런 내용들에 대한 메시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는 것 같고. 두 번째는 동교동에 있는 사저에 관한 얘기입니다.
대통령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그리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런 기념사업에 활용했으면 좋겠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떠나게 됐는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평생을 정치적 동지로 살아왔던 이희호 여사의 유언이기 때문에 이 내용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치권이 많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현재 남겨진 과제들을 묵묵히 수행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성완]
저는 유언이 감동적이었는데요.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저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
보통 유언장에는 이렇게 기록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이 남겨야 될 마지막 말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런데 본인들이 받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먼저 했다고 하는 게 일단 가슴이 찡했고요. 그리고 마지막 평화통일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본인 스스로가 밝혔다는 겁니다.
이거는 지금 꽉 막힌 남북관계, 그것도 북미 비핵화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이런 정신이 지금 서로 간에 갈등이라든가 반목 이런 상황에서 남북 간에, 북미 간에 관계가 안 풀리는 것에 사람들한테 울림 같은 걸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고인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실 때까지도 이런 의미를 담고 가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앵커]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또 울림을 주고 가는 이런 뒷모습을 보여주셨는데 2시부터 본격적인 조문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정치인, 사회계 원로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조문도 많이 이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생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아내 이희호 여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요.
이희호 여사와 DJ의 운명적인 만남, 그 역사를 차현주 앵커가 정리해 드립니다.
[앵커]
동교동 178-1번지. 김대중 이희호, 남편이 떠난 뒤에도 나란히 걸려 있던 부부의 문패.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이 담겨있던 이 문패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던 신여성, 이희호 여사와 부인과 사별한 채 셋방살이하던 정치 재수생 김대중 전 대통령. 두 사람은 첫 만남 때부터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했습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첫인상을 핸섬한 멋쟁이, 김 전 대통령은 이 여사를 이지적 눈매를 지닌 활달한 여성이라고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결혼까지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주위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며 1962년 5월, 김 전 대통령과 평생 동행을 자청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행로와 함께한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납치와 구금, 사형선고, 미국 망명과 가택 연금 등 정치 혹한기를 함께 견뎌내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이뤄진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까지, 이 여사의 조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도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준 것도 아내고, 제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을 때 힘과 능력을 주었던 이도 아내"라며 이 여사를 추켜 올렸습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남긴 일기에서 '아내와의 사이가 최상'이라며 아이처럼 행복해하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마침내 생을 마감하는 순간 이 여사는 이 편지를 남편의 품에 영원히 안겼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사는 이제 평생의 동지, 김 전 대통령 곁으로 떠났습니다.
[앵커]
서로를 존중하던 부부. 많은 부부들에게 또 이 부분이 귀감이 되는 부분인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잘생겨서 결혼했다, 농담삼아 이런 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김성완]
실제로 미남이었어요.
[앵커]
실제로 예전 사진을 보면. 어쨌든 62년 결혼 당시를 살펴보면 군사정권에 탄압받는 돈 없는 정치인 아니었겠습니까?
[김성완]
그래서 보통 정치낭인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첫 국회의원 당선된 게 이듬해 63년입니다.
그러니까 62년까지는 2번인가 아마 그전에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사람이었거든요.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우리가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냥 할 일 없는 백수, 요즘 식으로 따지면.
그러니까 계속 정치를 하겠다고 다니는데.
[앵커]
그러니까 얼마나 반대가 많았겠습니까?
[김성완]
그렇죠. 그러니까 당시 사회상으로도 마찬가지고 당시 엘리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아마 크게 두 가지였을 것 같아요. 하나는 여성운동한다는 사람이 그 늦은 마흔의 나이였거든요.
그 나이에 굳이 여성운동을 하면서도 선구자, 굉장히 진보적인 여성운동의 선구자라는 사람이 왜 결혼이라는 것들을 선택하려고 하느냐.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주변의 아쉬움 같은 게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둘째로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정치 하겠다고 하는 아무 일 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백수 같은 사람하고 왜 그런 엘리트가 굳이 결혼하려고 하느냐.
그리고 앞날이 그렇게 밝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독재정권에 결국은 탄압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하고 굳이 왜 그렇게 결혼하려고 하느냐.
그래서 주변에서도 시선이 곱지 않고 많이 뜯어말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희호 여사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그만큼 좋으셨나 봐요. 좋으셨던 것 같고요.
사랑이라는 걸 얘기하시더라고요. 거기 안에는 약간 동지애적 관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를 바꾸겠다고 하는 신념이나 이런 부분하고 본인이 여성운동이나 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거기에서 같이 뜻이 맞지 않았을까.
이런 동지적 관계를 계속 만들어서 평생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들이 아마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앵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9년에 서거하셨으니까 딱 10년 만에 남편 곁으로 돌아가는 이런 상황인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도 상당히 파란만장했잖아요.
이 모진 세월을 다 옆에서 정치적 동반자로서 지켜준 이런 버팀목이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서 남편석방 청원을 한 일화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김병민]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하나를 꼽으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됐던 당시를 꼽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오죽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서 여기에 대한 구명까지 얘기를 했을 텐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혼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면서 거절을 당했던 일화는 굉장히 유명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유신정권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굉장히 고진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요.
당시 옥중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하죠.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항상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순간마다 이희호 여사가 옆에서 힘을 불어줄 수 있는 역할들을 했던 것 같고요.
1977년도에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당시에는 완전히 난방이 되지 않는 냉방이어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을 텐데 평상시에 김대중 대통령이 이러한 추위들을 견디는 걸 굉장히 어려워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도 이러한 상황들을 같이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집에 아예 난방을 하지 않고 냉방 속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 일화도 굉장히 유명하게 전해지기도 하죠.
그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약 옆에 이희호 여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처음 만났을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더라고요.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거세게 노크했다라고 얘기를 하게 되는데.
사실은 우리가 사회적인 통념상으로 선택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상황이지 않았겠습니까? 그 당시. 지금 연상연하 커플이 흔하기는 합니다만 두 살 연하였고 이미 사별해서 아이가 둘이 있고 가난과 정치적으로 희망이 없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화를 해서 정치적 뜻을 같이 이뤄갈 수 있다라고 하는 그 신념 하나로 이런 선택을 했던 이희호 여사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한 단계 발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앵커]
이 두 분 생각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문패. 보통 아버지의 이름만 문패에 걸리잖아요. 그런데 김대중, 이희호. 이 문패.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동시에 내건 이 문패가 굉장히 국민들 가슴속에 남아 있고 이 문패가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계속 저렇게 달려 있는 거죠?
[김성완]
지금까지 있다고 하고요. 1963년도. 그러니까 결혼하고 난 다음 해에 동교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요. 그때 문패를 같이 거는 거죠.
[앵커]
63년도에 그러면 저렇게 문패를 단 거라는 거죠?
[김성완]
63년도에요. 저는 70년대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도 문패를 2개 달고 있는 집을 제가 못 봤거든요.
아무래도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도 사실은 문패를 2개를 나란히 다는 집은 그렇게 많이 흔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에 그렇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일이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건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식이 있었다.
그걸 엿볼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희호 여사가 여성운동을 했다고 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게 어느 순간 남편의 그늘에 묻혀서 사라질 수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을 내조하면서 자기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 많이 얘기하는 것처럼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난 다음에 여성부가 생겼잖아요.
그때 여성부 생겼을 때도 이희호 여사가 적극적인 노력을 했다 이런 것이고요. 그리고 이희호 여사가 그동안에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여성이라든가 어린이, 그다음에 장애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친구들이라고 하는 재단도 만들고.
그게 결국은 남북관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북쪽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일까지도 연결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처럼 남편과 항상 함께했지만 항상 남편하고 별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 않고 자기 활동을 계속해왔던 굉장히 우뚝 섰던 여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그렇죠. 여성 운동가, 민주화 운동가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희호 여사 말년에는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이런 작업도 굉장히 활발히 한 이런 평화운동가이기도 합니다.
[김병민]
2009년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는 그 유지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사실 북한과의 활동들에 나섰다고 볼 수가 있는데요.
이명박 전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관계가 굉장히 단절 국면에 이르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중간중간 역할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부분들이 이희호 여사의 역할로도 볼 수가 있고요.
사실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난 뒤에는 우리에게 은둔의 지도자로 불려졌기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과 그의 활동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죠.
그랬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던 것도 이희호 여사의 모습이었고요. 2015년도 8월달 같은 경우에는 남북관계가 굉장히 경색적인 국면으로 흘렀을 때입니다.
이때 김정은 위원장이 친서를 보내서 초청을 이희호 여사를 하게 되는데 사실 그 당시에도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여전히 북한에 가서 경색된 남북관계 국면들을 풀어내기 위한 노력들.
그 당시에도 이미 93세 고령이었는데 고령의 몸을 이끌고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유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했던 모습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지금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뿐만이 아니라 보수 정권 때도 북한을 많이 방문을 하면서.
[김성완]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부부가 오래 살면 같이 닮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돼요.
이희호 여사는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가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남북 화해, 평화협력, 또 남북 통일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분입니다.
한때는 그게 불온하다 이렇게 해서 보수 진영에서 굉장히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고려연방제나 이렇게 해서 남북 간에 통일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단계적 통일 방안에 대한 나름의 로드맵까지 갖고 있었던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거지만 한 80년대, 70년대 넘어가면서 그 시절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금기를 깨는 작업이기도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과 함께 남북 화해 협력에 나서고 그리고 남편이 작고하고 난 다음에 다시 그 유지를 받들어서 본인이 거기에 대해서 남북관계가 서로 막히고 대립이나 아니면 점점 긴장 국면으로 가는 것에 있어서 본인이 어떻게 해서든 그걸 다시 그 뜻을 이뤄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를 잃지 않고 계속 추진해나갔다는 거죠.
그게 2009년도에 김대중 전 대통령 돌아가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도 2011년에 북쪽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난 다음에 거기에 굳이 일부러 조문단에 참여해서 갔던 것도 이렇게 서로 긴장 국면을 이걸 어떤 방식으로든 바꿔야 되겠다.
내가 거기에 헌신하고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졌던 거고요.
[앵커]
그때 지금의 김정은 위원장도 보고 왔죠.
[김성완]
처음으로 김정은 위원장을 남측 인사가 봤다고 하는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이희호 여사이기도 했고요.
이후에 2005년도에 잠깐 말씀하셨지만 그때도 굳이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하셨던 것도 결국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바꿔봐야겠다라고 하는 뜻이 있으셨던 거죠. 그런 뜻을 끝까지 계속 최근까지도 그 뜻을 밝혀왔고요.
그러면 인터뷰 과정에서도 거의 마지막 인터뷰할 때도 그 뜻을 밝히신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본인이 해야 될 역할을 우리 사회에 기여할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기여하고 또 내가 지금 현재 해야 될 일이 무엇이고 마지막까지 무엇을 해놓고 가야 할지.
[앵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까지 하신.
[김성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남북 평화통일에 대해서 기도하겠다고 하는 뜻까지 밝히고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처음과 끝이 똑같은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유언에 굉장히 감동하셨다, 앞서 이런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이희호 여사의 별세 소식을 아마 북한에서도 들었을 텐데요.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는 북한에서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어떨까요?
[김병민]
그 당시에 김양건 통전부장이 조문단 대표로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아마 지금은 김영철 통전부장에서 장금철 통전부장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이 장금철 통전부장과의 접촉을 하지 않은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만약에 통전부장이 오게 되면 새로운 통일전선부장, 그러니까 대남에 대한 총괄적인 내용들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이기 때문에 지금 비핵화로 인해서 여러 가지 남북 간의 관계까지도 경색돼 있는 국면을 뭔가 활로를 여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전망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과거에 이희호 여사가 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에 직접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의 입장에서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고개를 숙였던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이 생생이 기억나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김여정 부부장, 본인의 혈육이고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볼 수 있고 또 지난번 평창동계올림픽 때 특사단을 파견했을 때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김여정 부부장이 대한민국 땅을 밟았던 것도 굉장히 이례적이다라고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김여정 부부장에 대한 조문단으로서의 파견까지도 검토하지 않겠는가라고 전망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워낙 남북 관계가 꼬여져 있는 상황이어서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가지고 와서 남북 정상회담이 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는데 정상회담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은 과연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접촉하는가에 대한 결단이 남아 있는 상황으로 보이는데요.
적어도 이희호 여사의 사망으로 인해서 나타나게 되는 조문단에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할들은 북한에서도 하지 않을까 이렇게 조심스럽게 전망이 됩니다.
[앵커]
김여정 제1부부장이 올 가능성도 있다. 앞서 이 얘기를 해 주셨는데 김성완 평론가께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김성완]
저는 북쪽에서 최대한 성의와 격을 맞출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그러니까 김여정 부부장은 북측에서 여러 백두혈통이고 굉장히 중요한 상징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격이 높은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조문단을 파견할 때는 최소한의 격을 맞추려고 노력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북쪽을 얘기할 때 흔히 유교적 사회주의국가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예를 갖추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때도 조문단을 파견했었고요. 우리도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했을 때 이희호 여사가 갔던 것처럼.
역시 이번에도 최소한 그 정도의 성의 표시는 북쪽에서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게 조문단이 왔을 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갈 것이냐, 아니냐.
그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지만 조문단을 파견하는 것은 저는 충분히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어떻게 보면 남북, 북미 간 관계가 교착 상태이기 때문에 이게 어떤 돌파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성완]
만약에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간다고 하면 남북관계 지금 4차 남북 정상회담을 6월쯤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메시지가 오고갈 가능성이 있거든요.
더군다나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북유럽 순방을 하면서 오슬로 선언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도 굉장히 큰 관심사이기도 하고요.
또 북미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이냐 이것도 굉장히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희호 여사 소천을 계기로 해서 남북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쯤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우리 사회 여러 면에서 큰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이희호 여사. 부디 영면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모태 신앙인데 이 영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관련 영상 보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희호 여사 별세 얘기를 하다가 이 얘기를 하려니까 조금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대통령 하야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전광훈 목사, 한기총 회장이기도 한데요. 굳이 오늘 기자회견까지 한다고 하네요.
[김병민]
그러니까 정치적인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겠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종교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약간 정치인에 가까운 입장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고요.
지금 교단 일부에서는 한기총 성명을 임의로 작성해서 공표하지 말아라라고 얘기가 나오고 있고 기독교협의회 같은 경우도 비상식적 발언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실제로 그 내용 속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저는 가장 공감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 정치 참여인의 복음의 가치에 기초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뱉고 있는 여러 가지 얘기들이 오히려 갈등을 야기시킴으로 인해서 대한민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라고 하는 건데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역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그런 역할들을 고민한다면 이런 얘기들을 본인이 정치적으로 주장을 한다고 해서 대한민국 사회에 긍정적인 메시지보다는 부정적인 메시지가 훨씬 더 강하지 않을까 싶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해서 이 기독교계의 이야기인 것처럼 아니면 보수적인 진영의 이야기인 것처럼 혹은 회자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전광훈 목사 스스로가 하고 있는 개인적인 발언에 대해서 적정 수준에서의 이야기로 그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같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기총 내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굉장히 크고요. 사퇴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인데 트럼프 대통령과 상하원에 공개 서한을 보내겠다.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김성완]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건 정치적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전광훈 목사는 원래 그랬던 분인 거죠.
원래 기독자유당을 창당하고 그리고 선거에도 뛰어드는 그런 것도 했고 그리고 공직선거법으로 법정 구속이 되기도 했었고 이런 전력들을 다 갖고 있던 거예요.
그런데 원래 이렇게 정치 활동을 했던 목사였던 거죠. 그런데 저는 더 주목하고 싶은 게 원래 그렇게 우리 사회에 어느 한 구석에 있었던 사람인데 왜 지금 주목을 받을까 이런 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자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언론에서도 그런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팩트에 가까운 얘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최근에 보수 진영 내부에서 좀 더 극단화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5.18 망언도 얘기가 되고 이런 것처럼 우리 사회에 과거에는 이런 목소리가 사회의 어떤 공론장에서 잘 묻혀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는 건데 지금 이런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는 거예요, 우리 귀에.
그만큼 울림이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울림을 과연 어디서 만들고 있느냐. 그게 혹시 지금 자유한국당이나 이런 곳이 같이 그 울림에 떨려주는 것 아니냐.
그런 면에 있어서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생각을 하고요. 지금 보수 유튜브 공간이나 이런 데서도 그런 역할들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보고요.
그런 공간 안에서 일종의 가짜 뉴스가 사회적 이슈가 돼가는 과정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우리가 제어하고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배제시킬 것이냐. 이런 노력들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앵커]
극우 막말이 나오다 보니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언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을 봐야 된다.
[김성완]
그리고 자꾸 주목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굉장히 큰 목소리처럼 우리 귀에 자꾸 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 사회의 현재 문제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하다 보면 이게 일종의 사회 한 세력처럼 느껴지게 되고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적 입지를 갖게 되고 정치 진출을 하게 되면 나름의 정치적 의서록을 점하게 되고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거고 이건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다른 국가들에 극우 정치가 자꾸 득세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던 패턴하고 비슷하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런 목소리를 어떻게 사회 공론장에서 적절하게 제어할 것이냐. 또 언론이든 정치권에서 이런 목소리들을 자기 지지로 흡수하려고 하면서 자꾸 이용하지 말고 오히려 사실 확인, 팩트 체크를 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들을 자꾸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오늘 릴레이 단식도 하는데 기자회견 뒤에 할 것 같습니다. 몇 분이나 참석을 하실지 지켜보도록 하고요. 막말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민경욱 대변인. 대통령 순방을 앞두고 천렵질이라는 발언을 해서 또 논란이 됐습니다. 고민정 대변인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대변인은 본인의 생각을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김병민]
그렇기 때문에 아마 정당의 대변인이기 때문에 당의 입장을 그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냐라고 얘기를 하게 되는데요.
이게 SNS에 민경욱 대변인이 글을 쓰게 되는데 천렵질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기보다는 천렵질을 하러 떠났던 사람에 대해서 비유를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가 있고요.
북유럽 순방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행보가 6월 말에 있는 G20 정상회의를 통해서 대한민국이 지금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 속에서 중간에 끼여있는 있는 굉장히 고립된 외교 현실들을 사실상 돌파하기 위한 노력들은 배제한 채 북유럽에 가서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간 것이냐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게 되고요.
오늘 자로 또 SNS에 이런 글을 올리더라고요. 나도 피오르에 가고 싶다. 사실상 북유럽에 간 것이 순방에서 중요한 외교적 목적보다는 뭔가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냐라고 얘기를 하게 되는데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라고 보니까 오늘 아침에 중앙일보의 한 칼럼에 김정숙 여사의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칼럼이 실렸더라고요.
이 칼럼의 내용을 보니까 노르웨이 서해안에는 베르겐이라고 하는 그림 같은 도시가 있는데 이 그림 같은 도시에 모레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가 절경으로 볼 수 있는 피오르에 대한 절경을 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리그의 집으로 가서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 음악회를 연다라고 얘기를 하게 되는데요.
사실상 북유럽 순방에서 핀란드 방문에서 스타트업을 격려하기 위한 의미 있는 방문에 대한 행사가 있습니다만 현 정부 들어서 유독 해외 순방을 가게 됐을 경우에 관광지를 많이 순회하게 되는 경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민경욱 대변인이 특히 자유한국당이 당의 입장으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작금의 중요한 경제적인 위기 그리고 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들을 풀어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북유럽에 대한 순방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는가에 대한 얘기들을 하는 과정에서 민경욱 대변인의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앵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는 대통령이 순방 중에는 비판을 자제한다, 이런 분위기다, 어제 한 정치 평론가께서는 이런 이야기도 해 주시던데 민경욱 대변인은 개인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제1 야당의 입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고 청와대의 경제수석 경제 브리핑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우짤낀데, 또 이런 글을 달았습니다.
지금 계속 막말과 논란이 나오면 또 더한 말이 덧붙여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요. 어떻게 보십니까?
[김성완]
정치라고 하는 건 함께 공동 책임을 지는 거잖아요. 정치를 왜 하는 겁니까? 자기 정치 세력의 확장, 정치 세력의 어떤 권력을, 수권을 잡기 위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건가요?
물론 목적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국민을 위해서 아닙니까?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위임해 준 그 권한을 사용하는 게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경욱 대변인의 인식 수준에서는 경제에 대한 책임 그리고 지금 추경 문제를 두고 어떻게 추경을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 이런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냥 희화시키는 겁니다. 우짤낀데. 그러면 야당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한국 경제가 지금 어렵다, 힘들다고 얘기하면 야당은 그냥 그냥 여당 욕만 하고 대통령 욕만 하면 야당 역할은 끝나는 건가요?
굉장히 이해가 안 되고요. 그리고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에 대해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심각하게 많이 어제까지 그런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요.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유럽, 민경욱 대변인도 한번 데려가주시지. 안 가봤기 때문에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가서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라는 이런 생각이 문득 드네요.
[앵커]
황교안 대표 중도확장을 선언한 마당에 이런 막말을 앞으로 어떻게 제어해 나갈지 이런 부분도 앞으로 주목해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김병민 경희대 겸임교수, 그리고 김성완 시사평론가 두 분과 오늘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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