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3:00~14:00)
■ 진행 : 김혜민 PD
■ 방송일 : 2022년 1월 12일 (수요일)
■ 대담 : 김만진 다큐멘터리 PD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김혜민의 이슈&피플]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배은심 운동가로 살아간 이유<어머니와 사진사>mbc 김만진피디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지금 흐르고 있는 노래는 배은심 운동가가 광주 트라우마 센터에서 떠난 호남 유가협 치유여행에서 직접 부른 ‘사노라면’입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아들 이한열 열사를 만나셨으니 좋은 날이 되셨을까요. 미래 교육이 열리다, <런어스> 이 시간에는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며 꼭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 주제들을 연세대학교와 함께 배워보는 시간인데요. 오늘은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와, 또 5.18 진상 규명을 외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운동가의 삶을 돌아봅니다. 배은심 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MBC ‘어머니와 사진사’ 이 다큐멘터리인데요. 그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MBC의 김만진 피디님 모셨습니다. PD님, 어서 오세요.
◆ 김만진 다큐멘터리 PD(이하 김만진)> 안녕하세요.
◇ 김혜민> 반갑습니다. 처음 배은심 운동가의 부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 심정을 먼저 좀 나눠주실까요.
◆ 김만진> 그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제가 이 자리에 올 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 고민을 되게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한열 열사라든지, 배은심 어머니. 저는 어머니라는 호칭을 좋아하는데, 그분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같이 지내고.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많은 분들은 저보다 더 많아요. 특히 이한열 기념관이라든지, 굉장히 많은데. 내가 여기 나올 자격이 있는가. 그런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대중매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자격으로 저를 불러주신 것 같다고. 어렵게 왔습니다.
◇ 김혜민> 제가 그 얘기에 조금 덧붙이면, 정말 처음에 섭외 전화를 드렸을 때 PD님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자격이 될까요. 제가 그때 PD님께 했던 말씀은 그거였습니다. 기록한 자는 말해야 한다. 아마 그 말 한마디에 사명감을 갖고 이 자리에 나와 주신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요. 부음 소식 들으셨을 때 심정, 어떠셨어요.
◆ 김만진> 일요일이었어요. 일요일 아침에 일 안 하는 날이니까 제가 좀 늦잠을 자고 있었죠. 그런데 우리 식구가 그 얘기를 전해주는데, 정말 큰 충격을 받았고요. 그날은 굉장히 하루 종일 우울하더라고요. 제가.
◇ 김혜민> 건강하신 편이셨잖아요.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 김만진> 제가 이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하고 난 다음에도 연락을 좀 하고 지냈는데, 또 죄스러운 것은 최근 한 6개월 동안 연락을 잘 못 했어요. 최근에 잘 못 봬서 좀 자책스럽고. 건강 얘기를 많이 했을 거잖아요. 나이가 많으시니까. 그런데 건강에 대해서는 저는 크게 문제는 없다고 느꼈는데, 다만 어머니 어디 편찮으신 데 없으셔요. 여쭤보면 무릎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무릎 관절이 안 좋으셨는데 어머니, 왜 무릎이 안 좋으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여기저기 너무 많이 뛰어다녀서 무릎이 다 소모돼 버렸다. 참 가슴 아픈 얘기죠. 근데 이제 무릎이 안 좋으신 얘기는 내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제 보니까 이제 심근경색과 관련된 거 같던데. 그쪽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이 놀랐습니다.
◇ 김혜민> 장지 다녀오셨죠.
◆ 김만진> 그 다음 날, 월요일 밤에 갔다 왔는데 거기에서도 어떤 느낌을 받았냐 하면 조선대학교에 있는 장례식장에. 제가 여기저기 장례식에 많이 가보는 편이거든요. 근데 제가 한 거의 10년 안에 본 장례식 중에서는 제일 조객이 많았어요. 그래서 옛날 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왜,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조객이 많아도 정승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면 손님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데, 완전히 그렇지 않고. 그리고 제가 또 하나 받은 인상은 어떤 특정 집단의 조객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부터 이름 모르는 일반 시민까지 아주 많은 분들이 이렇게 조객으로 오신 걸 보고 큰 보편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은 분이다. 그런 생각 다시 했습니다.
◇ 김혜민> 그렇습니다. 보편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은 분의 삶을 제가 PD님이 만든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배웠어요. 이 다큐멘터리로 사실 상도 많이 받으셨죠. 굉장히 인정 많이 받고.
◆ 김만진> 여기저기서. 아무튼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관련해서 이런 질문을 하셔서 밖에서 잠깐 생각할 때 생각난 말씀은, 한국에서 몇 가지 상을 받았지만 이게 미국에서 상을 두 가지를 받았는데. 처음에 미국에 출품을 할 때 좀 의문이랄까. 이게 이제 어떤 게 있었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한열이 다 누군지 알잖아요.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 운동의 맥락이랄지, 이런 것들을 알고 있지만. 이게 과연 한국적인 정서가 전혀 없는 분들, 외국 심사위원들한테 공감을 시킬 수 있냐.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되게 좋은 미국의 상을 두 개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역시 나라를 떠나서 보편타당한 이야기에는 공감할 수 있구나. 이런 걸 느낀 계기도 되었습니다.
◇ 김혜민> 그 보편타당한 감정이라는 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 그리고 그 아들의 삶을 대신 이어가기 위해 운동가로 변모한 그녀의 삶이, 아마 인종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저도 생각을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주인공이 이제 두 분이죠. 한 분은 킴 뉴턴 사진 기자. 좀 설명을 짧게 해주시겠어요. 어떤 분인지.
◆ 김만진> 50년대 태어난 분이고, 지금은 애리조나 대학교의 교수죠. 그런데 80년대 중반, 한국에 오기 전에는 원래 사진 기자들은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도 그랬고, 굉장히 유명한 잡지들. 타임이나 뉴스위크나 이런 데 계약을 맺고 사진을 공급하는 전속 사진 기자였어요. 그런데 일본에 많이 와 있다가 일본은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이 올림픽 직전에 되니까 뉴스거리가 좀 있고, 특히 한국이 관광을 많이 유치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멋진 사진들을 찍을 수 있는 외국 사진 기자들을 지원도 해줬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래서 그런 일환으로 제주도에도 오고, 멋진 사진들을 많이 찍다가 이제 87년 초가 되면 그분도 들었대요. 되게 서울에 시끄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는 것을. 그래서 서울에 오게 되고, 박종철이라고 하는 학생의 죽음을 기록하게 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계속 제주도 못 내려가고 계속 서울에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이한열의 죽음을 직접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을 하게 되고, 기록을 남겼고. 어떻게 제가 그분을. 기획 얘기를 좀 했다면 하겠습니다마는, 기획을 성공시키는 구체적인 인물로서 연구를 하다가 그분을 내가 찾아내게 된 것이죠.
◇ 김혜민> 유명한 사진이죠. 우상호 의원하고 배우 우현 씨와,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영정 사진. 그 사진을 찍은 분이 이 사진 기자셨어요. 그리고 이제 또 한 분의 주인공이 우리 배은심 운동가인데 저는 이제 의도적으로 운동가라고 호칭하겠습니다. 처음에 이 다큐를 구상하시고 배은심 운동가를 만나셨을 거 아니에요. 저 이 다큐 하고 싶다. 그랬을 때 반응이 궁금해요.
◆ 김만진> 질문지에 기획을 하게 된 계기와 연결되어 있는 얘기인데, 기획은 기억하시겠지만 2016년 말은 11월부터 우리나라에 촛불이 붙어서 탄핵과 관련되는 움직임들이 거세게 불 때였는데 저도 자주 나갔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불과 6~7개월 있으면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구나, 하는 걸 내가 문득 깨달았고. 그래서 이런 기획을 하게 됐고. 한쪽에 킴뉴튼이라고 하는 사진가는 시간이 걸렸어요. 찾아낼 때까지. 그렇지만 배은심 어머니가 너무 대표적인 분이기 때문에 빨리 연락을 해서 만나 뵙고 촬영도 하고 싶다는 기획 의도를 말씀드렸는데, 아시겠지만 그 당시에 MBC는 시청자들한테 굉장히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배은심 여사도 그 이후에 세월호 관련된 유가족들하고 활동도 많이 하시잖아요. 세월호 관련된 보도 MBC가 어땠던 거는 다들 기억하고 계실 거고. 그러니까 MBC에 대한 인상이 굉장히 배은심 여사께서는 좋지 않으셨죠. 또 개인적으로도 그러셨지만, 배은심 어머니와 같이 있는 한울삶 유가협에 있는 분들의 공통적인 의견도 MBC에 대한 불신이라든지, 협조할 필요가 별로 없지 않냐. 그런 반응이 처음에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PD가 가지고 있는 게 별 게 없으니까 자주 자주 전화하고 만나고.
◇ 김혜민> 진심을 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죠.
◆ 김만진> MBC라고 다 똑같은 사람만이 있는 거는 아니구나, 이런 걸 자꾸 보여드리는 방법밖에 없고. 그런 과정 끝에 어렵게 설득을 할 수 있었고. 2007년 다행스럽게 한 중반 정도 되면, 우리나라의 큰 구조의 변화가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사회적인 변화에 약간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그래서 섭외가 되고, 굉장히 많이 만나게 됐죠. 그다음부터는.
◇ 김혜민> 그러게요. 그게 다큐에 참 잘 나타났는데, 어머니로서의 아들을 향한 그리움은 사실 말하지 않아도 제가 너무 잘 알 것 같고. 저는 아들이 죽은 후에 내 삶이 바뀌었다, 라고 이야기하신 운동가로서의 삶을 좀 조명하고 싶어요. PD님 보시기에는 어떤 운동가셨을까요.
◆ 김만진> 제가 제 다큐멘터리 시청자들 중에, 또 이 프로그램의 청취자들도 보신 분들도 있으시리라고 보는데. 마지막에 제가 의도적으로 민들레라고 하는 다큐 영화를 제가 일부 사용했다. 물론 허락받고 쓴 거지만 특히 표현한 이유가 그것도 관심 있으신 분들이 찾아봐주기를 기대하는 건데, 거기에 바로 운동가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거든요. 배은심 어머니가 아니고 운동가로서의 삶이 그 민들레라는 다큐멘터리에 잘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걸 한번 보시면 제 다큐멘터리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너무 할 말이 많은 얘기여서, 이번에 그 얘기 약간 구체적으로 하자고 그러면,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께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날, 어머니의 구체적인 운동가로서의 업적 두 가지를 짚었거든요. 그런데 하나가 2015년 시행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2천년에 시행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이 후자는 한시법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작동하지 않습니다마는, 이 두 개가 사실 배은심 어머니와 그가 중심이 된 유가협 활동가들, 운동가들의 노력의 결과예요. 지금도 이제 사후에 유지를 받들어서 민주유공자법을 발의 철회한 면이 있기 때문에 유지로 남기고 떠나셨는데, 아마 이런 법들이 유가협이나 배은심 어머니의 운동가적인 면이 없었다면 절대로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이런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어요.
◇ 김혜민> PD님 만드신 다큐에 배은심 운동가가 이런 말을 해요. 기억해 준다는 게 좋죠. 아들은 안 보이지만 사람들이 기억해 주잖아요.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게 엄마들의 마음을 녹여주죠. 내가 가면 이한열 엄마가 오는 거예요. 배은심이 온 게 아니고. 아, 이 말이 엄마로서 운동가의 삶을 살게 된 우리 배은심 운동가의 진심이 참 느껴졌는데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했지만 배은심 운동가의 어떤 부분이 이렇게 운동가로 살 수 있게 했을까요. 피디님, 취재하면서 좀 엿보신 게 있으실 것 같아요.
◆ 김만진> 여쭤본 적도 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여쭤본 적도 있고 대답을 들은 적도 있는데, 어머니 본인이 그렇게 얘기하세요. 나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애들 공부를 잘하고 우리 남편이 농협에 계셨거든요. 돌아가신 이한열 열사의 아버지께서는 농협에 계셨던데 돈을 유복하게는 아니어도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기에 걱정은 없었고, 자녀들이 건강하고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는 주부였다고 그렇게 평가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이제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이 완전히 배은심 어머니의 일생을 다 바꿔버린 거죠. 그런데 거기서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아들이 겪었다고 해서 인생을 완전히 항로를 바꿔서 그런 인물이 될 수 있냐. 그건 또 별개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의 독자성이라든지 특별성이 거기에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리고 스스로 대답하실 때에는 아들이 그런 일을 겪게 된 과정이 궁금하셨던 거예요. 왜 시위를 그냥 뒤에서만 하라고 했는데, 안 할 수 없고. 근데 왜 제일 앞줄에 서가지고 시위를 했는지. 이런 것들이 어머니가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궁금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한 거죠. 의도적으로 알아보게 되고. 물론 그 과정에서 유가협 있는 분들하고 같이 대화를 나눈 것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나한테 얘기할 때
이한열이라고 하는 내 아들이 서울 운동권 제일 앞선에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5.18에 대해서 우리 아들이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이놈이 대학 가서 처음 알았다, 라고 하는 얘기를 했고 그러면서 5.18 때 우리 집이 어떻게 지냈는가를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 돌아가신 바로 그 집. 그 집이 광주 지산동에 있는 집인데 5.18 때 내가 어떻게 했냐면, 이렇게 얘기를 하시면서 밖에 총소리가 들리고 시끄럽고 하니까 그냥 일반 작은 옛날 집, 마당이 있는 집이거든요. 창문을 다 솜이불로 이렇게 막고.
◇ 김혜민> 그때 그렇게 했었던 걸 말씀하셨군요.
◆ 김만진> 애들을 다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이제 우리 가족 생각만 나는 했다는 거예요.
◇ 김혜민> 그때 그 빚진 마음이 이한열을 평범한 학생이 아닌 열사로 살게 했고, 또 그 죽음 이후 어머니가 어머니의 삶을 버리고 열사로서의 삶을 살게 한 것 같습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PD님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 좀 짧게 마지막으로 부탁드릴게요. 제가 시간 넘어가도 이건 좀 여쭤봐야 될 거 같아요. 우리 남은 분들이, 이분의 삶을 어떻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지 짧게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만진> 이런 거죠.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얘기가 겹치는 얘기이기는 한데, 어떻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느냐. 보통 사람들도 살다 보면 비극적인 일을 겪는 사람은 곧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비극, 자기의 상황을 사회화시키지는 않거든요.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우리 돌아가신 어머니는 자기의 비극적인 일, 자기 가족의 비극적인 일을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타인에 대한 공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현실화시켜줄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 이런 걸 위해서. 또 말만 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무릎 관절이 진짜 다칠 때까지 그렇게 일했던 분이었다. 그렇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김혜민> 감사합니다. 정말 이분의 운동가의 삶을 기록해 주신 우리 김만진 PD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요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YTN 김혜민 (visionmin@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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