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에서 비극이 발생한 지 2년 뒤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를 출범시킵니다. 이른바 3S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3S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의 앞글자를 딴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일종의 우민화 정책이었습니다.
5.18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광주에는 해태 타이거즈가 프로야구 연고 팀으로 깃발을 올렸습니다. 5공 군사 정권은 지역 감정과 광주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우려해 지역 연고제 도입을 반대했지만, 참모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프로야구 팀으로 출범했지만, 광주 연고 해태 타이거즈의 외형은 초라했습니다. 프로 원년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적은 15명의 선수로 창단할 정도로 선수층이 얇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지명 타자가 선발 투수와 타자로 동시에 뛰기도 했습니다.
당시 투타 겸업의 주인공은 김성한 전 선수. 1982년 투수로 10승 5패 평균 자책점 2.89, 타자로 타율 3할 5리, 홈런 13개를 기록했습니다. 다승과 평균 자책점은 팀 내 1위였습니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투타 겸업으로 만화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의 원조가 한국에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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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와 타자를 겸업한 김성한 전 선수
여담입니다만 프로야구 역사에서 선수 9명 만으로 한 경기를 치른 사례가 딱 두 번 있었는데 모두 1982년 프로 원년 해태가 남긴 기록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일부 해태 선수들은 학생 선수였습니다. 선수들은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목격하거나 어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디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광주의 아픔은 해태 타이거즈의 팀 정신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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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
그래서 일까요? 초라하게 출발한 해태 타이거즈는 예상과 달리 프로야구 출범 2년 차인 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프로야구판을 접수합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80년대에 5차례, 1990년대 4차례 정상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해태 타이거즈 왕조를 건설합니다. 한 마디로 1980~1990년대 야구는 타이거즈가 우승한 해와 그렇지 않은 해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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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한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가 잘 나가자 군사 정권은 불안했습니다. 특히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5월 18일 즈음엔 불안감이 더 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소요 사태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한 겁니다. 실제로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원년을 제외하면 1999년까지 5월 18일 즈음에 광주 홈경기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정권 차원에서 한국야구위원회 KBO에 압력을 넣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는데 2017년 공개된 문건을 보면 추측은 사실로 입증됩니다.
1986년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가 작성해 KBO에 하달한 문건으로 '5.18 대비 광주 지역 프로야구 경기 일정 일부 조정'이라는 제목입니다. 5월 18일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예정된 MBC 청룡과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 장소를 전주로 바꾸라는 지시였고 보안사의 지시대로 경기 장소는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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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해태 타이거즈 홈 경기 일정을 바꾸라고 지시한 보안사 문건
여기에 5월 18일 하루 전 경기 일정은 오후 4시에서 오후 3시로 바꾸고 심판들이 경기를 빨리 끝내게 끔 지시했는데 광주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한 조치였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건 민주화 운동 20주년을 맞은 2000년이 처음이었습니다. 공교롭게 당시 대통령은 호남의 대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이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가 이어질 때마다 홈 구장 무등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광주 시민들은 이른바 떼창과 특정인의 이름을 연호했습니다. 함께 목 놓아 부른 노래는 '목포의 눈물', 연호한 특정인은 바로 정치인 '김대중'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이지만 정치적 고향은 목포입니다. 호남의 정신적 지주 김대중을 생각하며, 그의 정치적 고향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기장에서 김대중의 이름을 연호한 점,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던 광주 시민들이 응원가로 어울리지 않는 구슬픈 목포의 눈물을 부른 점을 토대로 추론해보면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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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오열하는 모습
한 마디로 '무등 경기장이 광주의 소외감과 억압에 대한 한을 푸는 분출구 같은 존재로 작동했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 목포의 눈물은 2001년 해태 타이거즈가 KIA에 인수되면서 경기장에서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구슬픈 '목포의 눈물' 대신 경기장에선 흥겨운 '남행열차'가 더 자주 들렸습니다. '김대중'을 연호했던 목소리 역시 93년 문민 정부 출범으로 군사정권에 마침표가 찍히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9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더구나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만 하면 단 한 번도 우승 트로피를 내주지 않은 해태 타이거즈만의 힘은 팀 스포츠의 핵심 중 핵심인 '우리 팀'이라는 연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수와 관중 모두를 관통하며 '우리'라는 공통된 정서, 즉 연대감을 뿌리내리게 해준 핵심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한이 자리하지 않았을까요?
1980년대의 광주와 해태 타이거즈, 그리고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치 변동사.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과거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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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해태 타이거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YTN 김재형 (jhkim03@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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