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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82년생 평양 여자 한서희"한국 드라마 보고 탈북하는 사람 많아"

2024.08.07 오후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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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4년 8월 4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탈북방송인 한서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성규 : 북한 이탈 주민들을 흔히 ‘먼저 온 통일’이라고 합니다.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용기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날마다 남한살이’의 저자, 탈북 방송인 유튜버 한서희 씨 모시고 통일과 화합에 관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한서희 : 안녕하세요.

◆ 이성규 : 얼굴이 좀 익긴 하셨어요. 근데 최근 발간한 그 책 ‘날마다 남한살이’ 이게 어떤 내용을 담으셨어요?

◇ 한서희 : 말 그대로 날마다 남한살이를 하는 과정에 대해서 세를 쓴 건데요. 제가 대한민국에 2007년도에 왔을 때.

◆ 이성규 : 2007년도면 얼마나 됐죠?

◇ 한서희 : 17년이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 초기에 정착할 때 봤던 그 시선의 그 마음으로 책을 써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 또 정착하는 탈북민들에게 어쩌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글을 썼습니다.

◆ 이성규 : 방송 처음인데. 탈북, 이런 얘기 어떠세요?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 한서희 : 처음에는 그냥 뭣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부르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살아가면서 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자꾸 그런 단어에서 느껴지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이들한테도 ‘탈북자 아이, 탈북민 가족’ 이런 것들이 아이들은 깜짝깜짝 놀라는 거죠. 그런 이질감을 좀 넣어주는 단어가 되는 것 같아서 살면서 살수록 좀 단어가 좀 더 예쁘게 이렇게 나올 순 없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는 해요.

◆ 이성규 : 이 책을 보니까 ‘날마다 남한살이’ 그리고 부재가 ‘82년생 평양 여자의 우당탕 서울살이 – 한서희’ 이렇게 돼 있는데. 이 책을 내시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어요?

◇ 한서희 : 책을 써야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사실 없었고요. 어떤 계기가 한 번 생겼는데 바로 유튜브였습니다. 제가 피앙한서희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데.

◆ 이성규 : ‘피앙’이 평양이라는 얘기죠?

◇ 한서희 : 사투리로. 피앙한서희TV에서 구독자들이 한 7만 명이 넘었는데 거기 구독자 분들 중에 제 채널을 정말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나 봐요. 그래서 그분의 친구 분이 메일이 왔어요. 내가 이렇게 해서 어느 출판사에 다니는데 한서희 씨 이런 유튜브에 나오는 내용들을 책으로 좀 쓰는 걸 제안하고 싶다고 메일이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책으로 쓸까 걱정하면서 이제 대표님과 만났더니. 자기 고향 친구가 한서희TV를 너무 애청을 하셔서 친구하고 통화를 할 때마다 통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제 유튜브 얘기로 시작해서 유튜브 얘기로 끝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맨날 전화할 때마다 얘기해서 ‘그럼 책을 한번 써야 되겠다. 이렇게나 재미있는 내용을 그냥 둘 순 없지.’ 이렇게 해서 저한테 연락을 드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책을 처음 써보는데 어떡하죠?’ 그랬더니 출판사 대표님이 ‘글 잘 쓰는 법’ 뭐 이런 책도 추천해 주시고 하면서 한번 용기를 내보라고 해주셔서 며칠 고민하다가 쓰기로 결정을 하고 이제 그 책을 쓰게 됐습니다.

◆ 이성규 : 그 책 쓰신 기간은 얼마나 되셨어요?

◇ 한서희 : 1년 걸린 것 같아요. 그렇게 두꺼운 책은 아닌데. 정작 막 시작하고 보니까 엉망진창이고 머릿속이 까매지고 뭐부터 써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유튜브를 처음엔 병행하면서 하다가 잠시 유튜브를 접고 지금 열심히 책 다 내고 했으니 다시 유튜브를 재개할까 합니다.

◆ 이성규 : 그러니까 처음에 책을 낼까 말까. 고민한 이유가 뭐였어요?

◇ 한서희 : 이 책을 과연 사람들이 봐줄까. 책을 냈을 때 봐줘야 되잖아요. 반응이 그렇게 재미있을까. 이게 가장 큰 걱정이었어요. 또 반대로 또 책을 냈는데 막 책에 대해서 화를 내는 분들이 있으면 어떨까. ‘이게 뭐야’ 막 이러면서. 또 그 책이라는 건 다 좋은 내용만 쓸 수 없고 제가 겪었던 감정들 이런 것도 이제 표현되다 보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또 막 화를 내는 분들은 없을까. 좀 걱정이 그 부분이 제일 많이 됐는데. 의외로 책을 내고 나서 다들 정말 재미있었고 심지어 제 한국에 살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마저도 ‘네가 이렇게 살아온 줄 몰랐어.’ 너무 정말 잘 읽었다고.

◆ 이성규 : 같이 북에서 온 친구들이에요? 아니면 한국 친구들이요?

◇ 한서희 : 한국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은 그냥 제가 북한에서 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착 스토리는 잘 몰랐었던 거죠. 그러면서 너무 정말 재미있었다고 또 북한에서 온 친구들은 ‘진짜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정말 잘 썼다. 우리의 시행착오인데 앞으로 이제 나중에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에 있는 주민들도 이 책을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또 칭찬해 주셔서 지금 너무 감사해요.

◆ 이성규 : 네. 근데 아까 처음에도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탈북민’보다는 ‘실향민’이나 ‘북향민’ 이렇게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 그 정서적으로 조금 어색하다는 말씀하셨는데 어떤 말이 좀 좋을까요?

◇ 한서희 : 저는 북향민이라는 그 단어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라는 뜻이니까.

◆ 이성규 : 그렇죠. 어차피 우리 국민이니까.

◇ 한서희 : 네. 결국 북한 이탈하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에 들어오면 북향민이 되고 대한민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탈북자, 탈북민. 어쨌든 뭐 아직 국적이 분명치 않으니 난민으로 분류된 사람들이니 그렇게 불러도 될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 들어온 이상은 북향민이 더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성규 : 이북에 계실 때 아버지는 당 간부였고 어머니는 인민반장이셔서 평양에서도 잘 사신 거 아니에요?

◇ 한서희 : 먹는 거는 사실 잘 그렇게 굶지는 않고 먹고 살고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돈은 많지는 않았어요. 돈 많은 그런 집은 아니었고. 북한은 권력 사회로 사는 그런 계층이다 보니까 그나마 먹고 사는 데 있어서는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런 거죠.

◆ 이성규 : 근데 그러면 그냥 편안하게 그쪽에서 살고 싶은 욕구도 있을 텐데. 어떻게 해서 넘어가자는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 한서희 : 그러니까 편안하게 산다기보다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만약 말을 안 들으면 죽이고 막 공개처형하고 이런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강제적으로 저희한테 세뇌시키고 보여줬었기 때문에. 공부하다가도 갑자기 ‘공개 처형한다. 오늘 수업 중단.’ 이러면 학생들이 다 공개 처형하는 데 끌려 나가서 그걸 공개 재판하고 처형당하는 것까지 봐야 되거든요. 심지어는 이제 교수형까지 하는 그런 장면을 어린아이들이 보다 보니까 제 마음속에는 늘 ‘북한을 이탈한다. 북한을 탈출한다.’ 이거는 총에 맞아 죽는 길이라고 생각을 해서 감히 그런 생각은 꿈도 못 꾸고 있었죠. 그러다가 저희 오빠가 있는데 친오빠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랑 결혼을 하려고 집에 데리고 왔는데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이유가 여자 친구네 집안의 출신 성분이 안 좋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오빠가 그 여자랑 결혼하면 북한에서는 노동자로 등급이 하락되고 그 노동자의 삶은 또 얼마나 비참한지 누구보다도 아빠가 잘 아시니까 결혼을 반대하셨던 거고. 그러니까 둘이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났다 반복하다가 끝내는 이제 이 땅에서는 우리가 결혼을 해서 결국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해도 내 아이들도 잘 살 수 없구나라는 걸 둘이 깨닫고 남한 드라마도 당시에 많이 봤겠다. 한국을 동경하면서 남한으로 둘이 몰래 탈출을 했어요. 탈출했다는 걸 오빠의 편지를 이제 옷장에서 발견하면서 3일 만에 알게 됐죠. 그래서 아빠가 ‘우리도 빨리 오빠의 뒤를 따라가야 된다. 여기 앉아 있으면 그냥 우리는 100% 죽을 길밖에 없다.’

◆ 이성규 : 오빠가 떠나면 나머지 가족들은 영향을 받나요?

◇ 한서희 : 그렇죠. 왜냐하면 일반 노동자의 가족이 이제 그 가족 중에서 탈북을 했다고 하면 추방 정도 보내거든요. 근데 그 추방이라고 하는 것도 굉장히 먹고 살기 힘든 곳으로 추방 보내요. 죽겠으면 죽고 살겠으면 살라는 식으로. 근데 저희는 정치범 수용소 대상이 되는 거죠. 저는 당시에 또 인민보안성 협주단에서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 이성규 : 성악하셨더라고요. 성악하시고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그리고 인민보안성 협주단.

◇ 한서희 : 거기서 성악 배우로 장교로 군복을 입고 근무를 하고. 김정일 앞에서 노래 부르고 이러는 사람인데. 갑자기 오빠가 없어지면 탈북 했다는 게 알려지면 저희 가족은 다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빠가 그걸 또 너무 잘 알고 계시니까 빠른 결정을 내려서. 저도 아빠가 현직에 그런 행정 간부를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탈북하자는 말이 아빠 입에서 나올 때 너무 놀랐었고. 저는 처음에는 못 가겠다고 울면서 그랬죠. 총에 맞아 죽는 길을 어떻게 가냐 그랬더니 저희 아빠께서 ‘여기서 그냥 앉아 있으면 100% 죽을 길밖에 없고 그래도 우리가 한국으로 가다 보면 단 1%의 희망은 있지 않느냐. 살면 가서 우리가 잘 살 수 있다.’ 이 얘기를 듣고 저도 단 1%의 희망을 찾아서 저희 부모님과 함께 탈북길에 오르게 됐습니다.

◆ 이성규 : 온 가족이 지금 다 같이 계시네요.

◇ 한서희 : 온 가족이 함께 이제 탈북의 길에.

◆ 이성규 : 오빠는 사랑하는 여인과.

◇ 한서희 : 아니 오빠는 이미 출발했죠.

◆ 이성규 : 지금 한국에 계시고요.

◇ 한서희 : 네. 여기 와서 다 같이 만났죠. 오빠 뒤를 열흘, 2주 뒤로 바로 따라가다 보니까. 중국을 거쳐서 몽골로 가게 되었는데 몽골 수용소에서 오빠를 만났어요. 그래서 거기서 오빠도 만나고 오빠 여자 친구까지 만나서 다행히 온 가족이 함께 대한민국에 한 명도 잡히지 않고 무사히 와서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 이성규 :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와중에 드라마가 영향을 준 게 좀 있나요?

◇ 한서희 : 엄청 컸죠.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부터는 정말 남한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 거의 다 봤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그리고 보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보면 처벌이 내려지고 추방 보내고 심지어는 그걸 복사한 사람은 사형까지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걸 한 번 보면 정말 마약같이 중독성이 엄청 강하니까. 1회를 보면 끝을 안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남한 드라마를 보면 막 정말 밤을 새서 몰래 이불 속에 들어가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사람들이 엄청 많이 보니까 영향이 없을 수가 없죠. 서울 말 흉내 내고 이런 것도 유행하고 요즘은 그래서 북한에서 서울 말 흉내 내면 엄청난 처벌이 또 가해짐에도 불구하고 서울말 배우는 사람들까지 늘어나고 있습니다.

◆ 이성규 : 근데 어떤 드라마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 한서희 : 그 당시에는 가을동화, 천국의 계단, 겨울연가. 정말 너무 울면서 봤던 것 같아요. 근데 남한 드라마는 하나하나 다 볼 때마다 울지 않는 드라마가 없었어요. 다 엉엉 울고 북한에서의 영화, 드라마는 그냥 당과 수령을 위해서 모두 다 목숨을 바쳐야 되는 억지 스토리가 뻔한 거죠. 분명히 당과 수령을 위해서 죽지만 분명히 죽게 되는. 그런 거다 보니까 뭐 눈물 나거나 이런 걸 못 느껴봤는데. 이건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던 거예요.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더라고요.

◆ 이성규 : 근데 처음에 우리 국정원을 찾을 때는 이런저런 두려움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 한서희 : 그럼요.

◆ 이성규 : 어땠어요? 그때 처음 만나고 나서.

◇ 한서희 : 북한에 있을 때 저는 장교였기 때문에 간부 학습을 일주일에 한 번 받는데. 그때마다 보여주는 영상이 남한에 가면 남산 지하실에 끌려들어가서 고문 받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영상은 어디서 가져온 영상인지 맞는 영상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손톱 밑에 판을 꽂아서 고문하는 거, 전기 고문하는 거. 이런 거를 저희한테 보여주거든요. 그러니까 성인이 돼서 그걸 계속 보다 보니까 우리가 남한에 가면 저렇게 고문 받는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탈북하면서 ‘아니야 그건 아니고 가서 죄수복 입고 고무신 신고 그냥 조사만 받는다더라.’ 뭐 이런 카더라들이 엄청 많은 거예요. 탈북민들 중에서도. 그래서 정작 딱 국정원에 도착했는데 정말 떨리는 거예요. 제가 몽골에서 일기를 썼었는데 매일매일 언제 가나 불안한 마음에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를 다 찢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일기조차도 무슨 큰 단서가 될 단서가 돼서 내가 간첩으로 오해받아서 고문당할까 봐. 근데 일기를 못 없앴어요. 깜빡하고 나 죽었구나 했는데 그냥 아무 일이 없더라고요. 그다음에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런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나면서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곳이구나. 죄수복이 아니라 오히려 새 옷도 주고 화장품도 주고 생필품도 주고 해서 너무 감동을 겪었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탈북 방송인 한서희 씨와 얘기 나눠보고 있는데요. 한서희 작가님, 우리 이쯤에서 노래를 하나씩 듣거든요. 어떤 노래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 한서희 : 저는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를 신청하는데요.

◆ 이성규 : 사연이 좀 있으세요?

◇ 한서희 : 가사가 너무 항상 들을 때마다 마음에 와 닿는데.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이거는 북한 주민들과 함께하는 노래인 것 같아서 제 마음속에는 그걸 항상 느껴요. 북한에 있는 내 친구들도 그 벽을 넘어서 우리 함께 웃을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이 노래들을 때마다 저는 통일을 꿈꿉니다.

◆ 이성규 : 오늘은 탈북 방송인 한서희 씨가 추천한 인순이의 ‘거위의 꿈’ 듣고 왔는데요. 북한 떠나셔서 한국에 정착하시면서 언어 이런 쪽 소통은 어땠어요?

◇ 한서희 : 만만하게 생각했었죠. ‘우리 한민족이니까 뭐 같은 조선말 쓰는데 뭐가 어려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왔는데 정말 물건을 사기조차도 어렵고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일단 외래어가 대한민국은 너무 많이 쓰이고 있고, 70년 분단이라는 장벽으로 문화도 많이 달라지고. 대한민국은 서양 문화에 많이 발전되어 있고 북한은 멈춰서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대화가 안 되죠. 마트 가도 ‘밥 가마 어디 있습니까? 밥 가마.’ 이러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

◆ 이성규 : 저도 모르겠는데요.

◇ 한서희 : 밥솥. ‘밥가마 어디 있습니까?’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리고 ‘신발 사이즈 어떻게 돼요?’라고 하면 ‘사이즈가 뭡니까?’ 이러고.

◆ 이성규 : 낙지 오징어는 무슨 얘기예요?

◇ 한서희 : 낙지 오징어는 저희 엄마가 아빠가 오징어 회를 엄청 좋아하셨어요. 북한에서부터. 그런데 여기 와서 그러면 처음으로 우리 여기 나왔으니 오징어 회를 한번 먹자. 그러니까 북한은 낙지라고 하죠. 그래서 그 낙지를 찾았는데 여기의 낙지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아니라고, 우리말이 어눌하니까 이 사람들이 섞여 먹으려고 이 조그만 낙지를 준다. 조그만 걸 준다고. 저게 낙지지 이게 무슨 낙지냐고 하니까. 그건 오징어고 이게 낙지라고. 아니라고 이게 오징어라고 하면서 시장에서 엄마랑 같이 막 상인이랑 옥신각신했던 일화가 있는데요. 그럴 정도로 이제 대화가 많이 어려웠었죠.

◆ 이성규 : 일화가 많겠네요.

◇ 한서희 : 그렇죠. 그래서 나름 막 서울말 배우고 이럴 때도 가까스로 길을 모르면 무조건 택시를 타거든요. 택시 타고 가까스로 서울말을 해서 ‘아저씨 저기 경비실 앞에 세워주세요.’라고 해야 되는데 ‘경비초소 앞에 세워주세요.’ 하면 택시기사분이 갑자기 ‘경비 초소라니 여기 군부대가 없는데요.’ 이러면서 놀라시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휴대전화 가게에서 알바하실 때도 좀 일화가 있죠.

◇ 한서희 : 핸드폰 대리점에서도 알바할 때 제가 그 당시에 2007년도니까 뉴스만 틀면 보이스피싱이었거든요. 근데 그 당시에 저는 나름 서울말을 열심히 했었죠. ‘안녕하십니까? 여기 어디 대리점입니다.’ 이렇게 핸드폰 요금을 그 당시에 안내면 대리점에서 일일이 전화를 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무슨 보이스피싱이냐고 저한테 욕을 하고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고 화를 내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정말 버라이어티 했다. 재밌었다. 이렇지만 그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랬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이제 말투도 말투지만 문화적인 차이 같은 것도 꽤 많을 텐데요.

◇ 한서희 : 문화 차이가 음식 문화도 너무 충격적이었고 ‘무슨 김치찌개를 돈 주고 사 먹어. 샐러드를 왜 돈 주고 사 먹어. 나가서 뜯어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것도 문화적 충격이었죠.

◆ 이성규 : 생일 선물 이런 문화 그런 문화가 좀 있나요? 없나요? 북한에.

◇ 한서희 : 최근에는 좀 많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제가 있을 당시에는 사실 생일문화라고 하는 게 북한에서는 막 뭉쳐서 노는 자체를 조직에서 안 좋아해요.

◆ 이성규 : 왜 그러죠?

◇ 한서희 : 뭉쳐서 놀다 보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어떤 이제를 꾸밀 수 있거나 이런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 여지조차를 아예 못 생기게 하거든요. 생일이면 여기는 케이크도 주고 막 선물 주고받고 하잖아요. 근데 거기는 케이크 초 불고 이런 게 전혀 없었고. 생일이면 그냥 혼자 집에서 밥 한 끼, 고기 먹었다. 이러면 잘 먹었던 거고. 크게 선물 이런 문화가 없었죠. 그러다 대한민국에 오니까 생일이라고 선물해주고 따뜻한 말 ‘생일 축하해.’ 이런 말도 너무 감사하고 어쩔 바를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이런 축하를 왜 받지. 너무 생소하고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생일이 되면 선물을 너무 많이 받고 싶어요.

◆ 이성규 : 지금은 안주면 미워하시고.

◇ 한서희 : 안주면 서운하고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에서 ‘너 생일이 그렇게 좋아?’ 그래서 ‘좋아.’ ‘왜 좋아?’ ‘선물을 받아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선물 벽돌 과자, 사탕. 엄청 맛없는 사탕 받고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정말 감격해 있었었거든요. 여기서는 지인들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선물을 주고 축하해 주는 날이라 1년 중에 사실 생일이 제일 좋습니다.

◆ 이성규 : 근데 처음 오셨을 때 TV나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좀 있었는데 처음에 왜 거절을 그렇게 하셨어요?

◇ 한서희 : 무서웠죠.

◆ 이성규 : 알려지는 게.

◇ 한서희 : 알려지는 것도 무섭고. 또 중요한 건 북한에 있는 친척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안 한다고.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해준다고 해도 안 나간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이만갑’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요청이 들어왔는데 거기는 좀 다르게, 정착하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셔서. 제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이제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열심히 사는 이런 모습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좀 보여주고 싶다. 우리 탈북민들의 이미지를 개선해서 조금 더 잘 사는 사람으로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이렇게 출연을 하게 되고. 출연하면서 정말 저도 많이 느낀 게, 정말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우리가 열심히 사는 걸 봐주시고 또 그거에 감동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거에 너무 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 이성규 : 그런데 지금은 여러 가지 활동하시잖아요. 방송도 하시고 통일안보 교육 강사도 하시고. 그다음에 성악도 하시나요?

◇ 한서희 : 네. 가끔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 그리고 또 아까 말씀하셨지만 피앙한서희TV 유튜브 채널. 근데 여러 가지 하는데 가장 집중하고 싶은 프로는 어떤 거예요?

◇ 한서희 : 아무래도 제 유튜브 채널이죠. 채널을 좀 열심히 하고 싶고. 또 제가 마음껏 할 수 있는 얘기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제일 크고. 또 올해부터 이제 2학기부터는 저도 대학원에서 공부할 예정이라서 같이 병행을 하면서.

◆ 이성규 : 어떤 전공으로요?

◇ 한서희 : 글로벌 평화 통일 안보 쪽으로 좀 공부를 해서 좀 더 전문적으로 좀 다가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실수해도 괜찮다.’ 그런 메시지를 전하시더라고요. 무슨 의미일까요?

◇ 한서희 : 북한에서는 실수하면 진짜 큰일 나는 거죠. 어떤 실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체제에 관해서 말실수하면 말 반동으로 정치범수용소 잡혀가고. 그 온 집안이 다 그 말 한마디로 실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경우를 너무 빈번히 봐왔고. 저 역시 그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자나 깨나 너무 긴장하면서 북한에서 살아왔거든요. 근데 대한민국에 오니까 정말 모든 게 자유롭잖아요. 언론의 자유. 제가 지금 이렇게 라디오를 하고 있는 것 대본을 읽고 하는 게 아니라 제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그대로 할 수 있는 거. 얼마나 자유롭다는 걸 느끼게 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정말 실수해도 그냥 ‘괜찮아.’ 오히려 박수를 쳐주고 제가 말을 버벅거려도 ‘괜찮아요. 다시 해요.’ 노래하다 실수해도 박수를 쳐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살면서는 실수해도 괜찮다는 그런 마음으로 언제든지 대한민국 국민들도 실수해도 좀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이런 마음에 그 마지막 대목을 쓰게 됐습니다.

◆ 이성규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정착기 에세이를 쓴 탈북 방송인 한서희 작가와 함께 먼저 온 통일, 북한 이탈주민의 성공적인 한국 정착기에 관해 함께 얘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한서희 : 감사합니다.

◆ 이성규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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