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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있저] 전쟁 고아들의 비밀 실화...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2019.06.24 오후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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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변상욱 앵커, 안보라 앵커
■ 출연 : 추상미 영화감독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동안 잊혀졌던 전쟁 고아들의 삶을 조명하며 한국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입니다.

오늘 인터뷰가 있는 저녁시간에 이 영화를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추상미 감독님을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감독님,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반갑습니다.

[앵커]
저는 아주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데 그대로이시군요.

[인터뷰]
죄송합니다. 언제 뵈었죠?

[앵커]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추억들이 있는데 제 개인적인 추억으로는 아버님이 하셨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 제가 본 첫 번째 연극이었습니다. 고3때. 그 충격을 지금도 기억하죠. 아무튼 그 얘기를 지금 할 때가 아니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잠깐 봤습니다만 북한의 고아들이 폴란드로 건너가서 폴란드에서 보살핌을 받던 영화라고 저희는 알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는 먼저 좀 감독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역사적 실화인데 아직까지 한국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실화고요. 1951년도의 한국전쟁 정점기에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북한 전쟁 고아, 그중 다수는 남한전쟁 고아도 섞여 있었고요. 이 아이들이 폴란드로 갔는데 거기에서 같은 2차대전 상처를 경험한 폴란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부모 같은 혈육의 정을 주시고 아이들이 전쟁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동심을 회복해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런 내용의 스토리입니다.

[앵커]
감독님께서 처음에 이 소재를 극 영화로 제작하시려고 생각하셨고 준비 기간이 1년 반 정도가 걸렸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계기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 소재를 영화로 제작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셨을까요?

[인터뷰]
처음에는 영화로 제작하려고 1년 6개월 동안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이 한 3고 정도까지 나온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서 직접 폴란드로 가야 되잖아요. 장소도 보고.

폴란드 선생님들 인터뷰도 직접 리서치 하기 위해서 폴란드 측과 접촉을 하는데 이 선생님들 연세가 너무 많으신 거예요. 80대 후반 90대로 넘어가니까 그런데 주변에 한국사회 이 실화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이 실화를 누가 증언해 주지라는 위기감 같은 게 찾아왔어요. 그래서 영화로 만들기 이전에 이분들 살아생전에 육성과 모습을 기억하는 다큐멘터리가 먼저 필요하겠다라는 판단에 이제 급하게 사전 다큐멘터리를 먼저 찍게 되었죠.

[앵커]
이 영화 얘기를 하시면서 상처의 연대라는 메시지를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결국 연대라는 뜻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 뭔가 닮은 데가 많았던 모양이죠?

[인터뷰]
네, 네. 두 민족이 전쟁에 대한 상처가 비슷하고 그리고 폴란드 선생님들에게 있어서는 개인의 상처이자 역사의 상처였던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품는데 굉장히 선하게 사용된 그런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민족의 역사 상처, 한국전과 분단이라는 상처는 65년 동안 어떻게 성찰돼 왔는가. 그래서 선생님들의 그 상처가 선순환, 굉장히 선하게 사용됐던 것처럼 우리도 상처에 대해서 재조명하는, 그 상처 속에서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앵커]
추 감독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떠오르는 것들이 있는데 사실은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병사들이 숨졌고 그다음에 특히 유태인들의 학살을 이야기하지만 그 학살도 폴란드에서 다 벌어졌고 왜냐하면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거기서도 나쁜 짓을 했으니까.

[인터뷰]
2차 대전을 가장 참혹하게 치른 나라죠.

[앵커]
저도 이제 생각이 나네요, 그 말씀을 들으니까. 감독님 말씀을 들으니까 영화를 준비하면서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소중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희가 사전에 인터뷰를 요청드리면서 그래도 명장면 하나만 꼽아주십시오. 부탁을 드렸거든요. 어떤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으셨는지 우선 영상으로 만나보시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빠, 엄마라고 불러라. 이 장면은 어떻게 보세요?

[인터뷰]
저분이 북한 고아들을 양육했던 양육원의 원장 선생님이세요. 아직도 굉장히 럭키하게 살아계셔서 가장 많은 질문을 했었는데 사적으로 그런 얘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북한 고아들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이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까만머리, 까만눈의 동양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아이가 아니라 내 유년시절의 일부분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커리큘럼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엄마, 아빠, 가족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아이들에게 마마, 파파. 그러니까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지시를 내리세요.

그래서 아이들이 8년 동안 양육받는 동안에 엄마, 아빠라고 선생님을 부르고 8년 뒤에 또 가슴 아픈 작별을 하게 되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앵커]
비석인지 기념비인지가 보이더라고요. 파란 이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혈육과 같은 배려에 대해서 너무 고맙다. 그건 아이들이 떠나면서 만든 건가요?

[인터뷰]
네, 아이들이 떠나면서 당시에도 북한 인솔교사조사실이 있었는데 이제 그분들이 다 돌판에 기록을 한 것이죠.

[앵커]
그렇군요. 그런데 1951년인데 전쟁 중인데 고아들을 폴란드로 보낸 이야기더라고요.

[인터뷰]
당시에 북한이 전선이 이동해서 낙동강 상류까지 내려왔을 때 그 바운더리 안에는 UN군없었고 남한군도 없었고 그때 발생한, 그러니까 남한전쟁과도 일부 섞여있을 수밖에 없었고 북한 전쟁 고아들을, 당시 사회주의국가는 형제국가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고요.

어떤 체제 선전을 위해서 김일성이 사회주의동맹국들로 아이들을 다 흩어 보냈습니다. 그래서 배경은 폴란드에만 간 것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동독. 이런 사회주의 동맹국들로 200명, 300명씩 다 보내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1500명의 고아들이 폴란드로 간 것이죠.

[앵커]
그런데 개중에는 러시아로 갔는데 워낙 홀대받고 천대 받다가 폴란드로 다시 온 아이들이 있다면서요?

[인터뷰]
다시 온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1500명의 아이들 중에는 러시아로 갔는데 거기에서 어떤 이유로 방치돼서 건강이 많이 악화돼서 폴란드로 넘어왔기 때문에 폴란드 땅끝 마을에 이 아이들은 비밀리에 양육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배경이 또 있습니다.

[앵커]
감독님 말씀하시는 중간중간에 영화 내용을, 영화 장면을 조금씩 보내드렸는데, 청취자 여러분께. 젊은 배우가 있습니다. 이 배우가 누구인지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인터뷰]
제가 처음에 영화로 먼저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잖아요. 그때 이 영화가 그냥 나만 아역배우들만 출연을 시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북한에서 온 아이들. 그 아이들은 1인 1기 그러니까 한 명이 한 악기를 다루고 전통민요나 노래들, 춤, 가락 이런 것들을 좀 익숙하게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을 대상으로 탈북대안학교 대상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래서 여주인공인 귀덕이라는 인물의 친구, 친구로 나오는 역할을 저희가 옥순이 역할인데 뽑았습니다. 그래서 이송 양이 그 역할에 뽑혔고요. 이송 양하고 함께 폴란드에 갔습니다.

[앵커]
처음부터 마음을 확 열던가요? 주던가요?

[인터뷰]
아니요. 그래서 사실 그게 촬영 에피소드 중 가장 어려웠던 부분인데 저 친구가 자기 경험을 말하지 않고 저도 방법이 잘못됐고. 자꾸 상처를 들춰내니까 힘들었겠죠. 그래서 점점 마음의 문을 닫더라고요.

그런데 그 마음이 회복된 것이 폴란드 선생님들의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능력이라고 저는 표현을 항상 하는데 선생님들이 65년 전에 가르쳤던 생각이 나는 거예요.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래서 송이를 보자마자 안아주시고 눈물 흘리시니까 저 친구가 막 그냥 안겨가지고 통역도 하기 전에 막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배신감을 느꼈죠. 저는 굉장히 잘 해 주고 그래도 마음의 문을 안 열다가 선생님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이제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송이가 상처도 되게 회복되고 본인의 정체성도 세워지는 그런 여정이 되었어요. 그게 다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앵커]
사실 탈북인들 함께 지내다보면 내가 내 신분을 밝히는 게 과연 어떤 위해가 돼서 돌아올지도 너무 불안하고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면 그 에피소드가 자기한테 어떤 발목을 잡을지 몰라 늘 불안해하니까요. 이해는 하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예전에는 배우 추송웅 씨의 딸이래, 이런 이름으로 많이 불리셨죠? 배우 추상미라는 지위를 확보하시고. 이제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감독 추상미 이것 말고 또 더 있습니까?

[앵커]
잠시만요. 그 답변을 하시기 전에 저희가 감독님 몰래 준비한 영상이 있거든요. 감독님께도 뜻깊지 않을까 해서 영상 보시겠습니다.

[인터뷰]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저런 자료를...

[앵커]
기억나십니까? 뭐 때문에 인터뷰하시는지 기억하네요?

[인터뷰]
기억 전혀 안 나고요. 저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게 놀랍네요.

[앵커]
저때가 22년 전 맞죠?

[인터뷰]
거의 데뷔 초기죠.

[앵커]
그래서 저 것을 넘어서서 어디로 가실 건지 얘기를 해주신다면?

[인터뷰]
저때는 연기자로서 아버지가 부담스러웠어요. 워낙 개성 있는 연기인데 그걸 아무나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꽤 많이 아버지의 존재감 자체가 부담이 됐는데 지금은 오히려 굉장히 그게 편해지고 아버지가 배우만 하셨던 게 아니라 종합 예술가셨잖아요.

예술가로서 아버지는 늘 좋은 예술 작품이 분노를 멈추고 성찰하게 만든다는 그런 일지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이 예술가가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신 분이기 때문에 저도 이제 그런 차원에서 제가 만드는 작품들이 이 사회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을 해야겠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아직도 많은 틀을 받고 있습니다.

[앵커]
저희들도 앞으로 좋은 작품에서 계속 만나뵙게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지금 저희 인터뷰 보시면서 감독님 영화 언제 볼 수 있나 궁금해하실까봐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내일 YTN 라이프 채널에서 방영이 됩니다. 많은 분들의 시청 바랍니다.


추 감독님 오늘 반가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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